#132화. 왕도 (4)
알레한드로는 스스로 대도둑이라 자칭하고 다닐 만큼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싸움 실력이야 그리 좋은 축에 속하지는 않지만, 몸이 날랜 데다가 은신술에도 조예가 있어서 당장 암살자로 전향해도 이름을 날릴 것이 분명하리라. 그런 알레한드로는 지하 감옥에 갇힌 직후부터 곧장 탈옥 준비에 나섰다.
‘역시, 쉽지는 않네.’
그는 왕실의 보물고를 털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이전에 왕성을 침입하면서 익혀둔 지리를 토대로 동선을 짜고, 경계해야 할 인물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거금을 털어 특제 마도구까지 준비했다.
까득.
어금니 뒤쪽에 박아둔 일명 ‘마법의 송곳’으로 수갑을 끊어버린 알레한드로가 씨익 웃었다.
왕실의 대장장이들이 극악한 범죄자들의 탈옥을 막기 위해 만든 특제 수갑도, 이 마법의 송곳 앞에선 어쩔 수가 없음이다.
알레한드로가 왕실의 지하 감옥에 갇혀도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이유가 바로 이 송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손톱 크기의 송곳이, 무엇이든 관통하는 날카로움을 지녔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좋아. 슬슬 움직여볼까.’
지하 감옥의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일직선 복도의 양쪽으로 독방이 길게 나열되어 있고, 똑같은 구조의 복도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현재 알레한드로와 죄수들이 묶인 곳은 지하 2층.
그리고 왕족 살해의 죄를 저지른 끝내주는 야만인이 묶인 곳은 3층이었다. 알레한드로가 가장 먼저 향하려는 곳이기도 했다.
‘여간해선 통제가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탈출을 미끼로 쥐고 흔들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거야.’
카가각. 카각.
곧장 바닥에 엎드린 알레한드로가 송곳으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복도의 양 끝에 존재하는 간수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카가각. 카각.
과연 마법의 송곳은 지하 감옥의 바닥까지도 시원하게 꿰뚫었다. 길이가 짧아 여러 번 반복할 필요가 있긴 해도, 어찌저찌 바닥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끄응….”
직사각형의 조그만 구멍을 뚫은 알레한드로는 긁어낸 바닥을 조심스레 옆으로 치우고,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워낙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덕분에 조금만 몸을 비틀어도 충분했다.
사뿐한 움직임으로 조용히 착지에 성공한 알레한드로는 곧장 주변부터 살폈다.
‘로열가드 부단장이 말한 대로. 확실히 특별 관리가 들어간 모양이야.’
그가 내려앉은 독방은 물론이고, 주변의 인기척이 아예 없었다. 아마 그 야만인이 3층을 통째로 전세 낸 모양. 알레한드로에겐 좋은 기회였다.
서겅.
흑철로 만든 쇠창살을 송곳으로 뚫어낸 알레한드로가 고개만 슬며시 내밀었다. 복도 양 끝에 간수가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없네?’
무슨 일인지, 간수는커녕 간수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음에 알레한드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특별 관리를 위해 따로 격리한 죄수를 혼자 내버려 두나?
터벅. 터벅.
‘그럴 리가 없지!’
2층과 이어진 계단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발걸음 소리.
그걸 듣자마자 알레한드로는 펄쩍 뛰어서 방금 뚫은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거꾸로 매달렸다. 그리고는 살짝 눈만 내밀어 복도의 동태를 살폈다.
‘순찰인가?’
그러기엔 숫자가 좀 많은 느낌이다. 물론 왕족 살해를 저지른 끝내주는 범죄자가 상대니, 조심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저만한 숫자가 움직였다면 2층에 있을 때부터 기척이 느껴졌을 텐데…?
“……!”
무언가를 깨달은 알레한드로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2층에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당연히 아래에서부터 3층으로 올라왔겠지!
지하 감옥이 얼마나 깊은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4층에서 저만한 인원이 우루루- 몰려와 3층으로 향하는 건 명백히 이상하다.
‘구린내가 난다. 아주 지독한 구린내가!’
쿵쾅. 쿵쾅.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알레한드로는 어둠에 잠긴 복도를 꿰뚫어 보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머지않아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일단의 무리를 확인한 알레한드로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얼마나 놀랐으면 헛숨을 들이킬 뻔했다. 천하의 대도둑인 알레한드로가 말이다!
‘사람…? 아니, 이족보행 하는 도마뱀인가?’
체형을 가리기 위해 망토를 머리부터 뒤집어썼음에도 전부 가려지지 않는 덩치. 특히 놀라운 건 얼굴로 추정되는 부위가 툭- 돌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파충류의 아가리를 닮은 것처럼도 보였다.
구린내가 썩은내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
*
*
“용의 기운?”
원념의 말에 칸이 자세히 설명하라 재촉하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다수의 기척이 접근해오고 있음을 느낀 칸이 중얼거렸다.
그래, 저것들이군.
굳이 원념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껏 예민해진 직감이 위험하단 신호를 시끄럽게 내보내고 있었으니까.
파각.
양팔을 좌우로 벌리자 수갑의 쇠사슬이 간단하게 끊어졌다. 그렇게 두 손의 자유를 얻은 칸이 첫 번째로 선택한 행동은-.
콰과광!
벽을 부수는 것이었다.
웬 덩치가 옆방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놀랄 법도 하건만, 녀석들은 잠깐의 당황도 없이 곧장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이어지는 칸의 움직임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쾅! 쾅! 쾅!
어깨로 감옥의 벽을 들이받을 때마다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렸다. 순식간에 세 개의 방을 관통한 칸의 고개가 문득 천장으로 향했다.
“헤, 헤헤…. 잘 지냈나?”
“머리 치워라. 뒈지기 싫으면.”
“뭐? 아, 아니 잠깐!”
웬 천장에 매달린 원숭이를 발견한 칸이 곧장 무릎을 구부렸다. 그리고-.
쾅!
“아까부터 뭐야 시벌!”
“알레한드로! 너냐?!”
“나 아니야!”
억울함을 토로하는 원숭이를 뒤로하고, 순식간에 2층에 올라선 칸이 쇠창살을 부수고 복도로 나갔다. 아래쪽에서 뱀대가리들이 다급히 계단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원숭이. 가만히 있지 말고 쟤네들 다 꺼내라.”
“예, 옙!”
순식간에 ‘원숭이’로 이름을 개명한 알레한드로가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렇게 칸과 함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전부 꺼냈을 무렵. 괴물들이 2층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던 죄수들도 이형의 괴물이 살기등등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바짝 정신을 차렸다.
“길 뚫는다. 살고 싶으면 따라와.”
“이놈들아! 왕족 살해자께서 따라오시란다!”
고압적인 명령에 따를 사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가 맨몸으로 저 괴물들을 상대하고 싶을까. 죄수들은 얌전한 어린양이 되어 원숭이의 인도를 따라 칸의 뒤에 바짝 붙었다.
[흐음. 안 그래도 잡스러운 걸, 또 뒤섞었구나. 저걸 만든 마법사의 실력이 상당할 듯한데.]
원념의 품평을 한 귀로 흘렸다. 드라우프니르를 우수로 잡고, 짧은 스틸레토 형태의 ‘네리아의 마법 송곳’을 좌수로 잡은 칸이 이형의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늪지대에서 발견되는 ‘리자드맨’과 닮은 형태의 괴물들은 모두 직검과 방패로 무장했고, 전술적인 움직임에도 조예가 있는지 대열을 갖춘 채 칸을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전술이란 것도 어느 정도 비빌 수 있는 수준이어야 통하는 법.
촤아아악─!
용살의 저주를 머금은 검격이 리자드맨 셋을 일도양단. 후미에서 몸을 숨긴 놈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재차 검을 올려쳐 또 둘의 머리를 절단했다. 순식간에 좁은 복도가 괴물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크륵!”
그러나 리자드맨들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다. 당장 3층 계단을 부리나케 오르는 기척이 열을 가볍게 넘겼다.
콰직.
이제 막 2층 복도를 딛고 선 놈을 향해 잽싸게 접근한 칸이 스틸레토를 쑤셔 박았다. 목에 구멍이 뚫린 놈이 캑캑대는 사이 발로 차 넘어뜨려 진로를 방해한 칸이 곧장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며 외쳤다.
“원숭이!”
“예에! 이것들아, 가자!”
“우오오오! 왕족 살해자를 따르라!”
이형의 괴물을 말 그대로 학살하는 위용에 피가 끓었는지, 되도 않는 구호를 외치며 죄수들이 칸을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
“이 자식들, 어떻게 탈출한 거야?!”
1층에 도착한 죄수들을 맞이한 건, 아래에서 벌어진 소란에 무장을 끝마치고 모여든 간수들이었다.
왕국 전역의 중범죄자들이 모여드는 지하 감옥을 지키는 그들의 수준은 그야말로 왕국 최정예. 거기다 주문이 각인된 장비로 무장한 탓에, 왕실 기사단들도 쉬이 얕보지 못하는 전력이었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기사의 오러에도 잠시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마법검도, 마법사의 주문도 무효화할 수 있는 갑옷도, 수천수만 번을 훈련한 동작들도 무의미했다. 서릿골의 회색 늑대가 왕국 최정예들을 마구잡이로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귀찮네.’
그래도 나름 정예는 정예라는 걸까. 칸의 초인적인 괴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와중에도 매서운 반격이 이어졌다.
“얌전히 자라.”
그들은 기어코 칸의 피부에 얕은 자상을 남겼지만, 그게 끝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칸이 죄수들에게 무기만 챙겨서 따라오라 일렀고, 그렇게 지상으로 나왔다.
“으아아! 이 시부럴 놈들아! 내가 돌아왔다!”
“엿 같은 귀족 새끼들! 탈출하기만 해봐라…!”
“병신들아! 뒤에 괴물들 오는 거 잊었냐!”
탈출의 기쁨을 만끽하던 죄수들을 다그친 원숭이가 멀뚱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칸에게 다가갔다. 지금 상황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칸의 물음이 먼저였다.
“원숭이. 보물고에서 궁중백이 나오는 걸 봤다고 했지.”
“헛. 그, 그렇습니다만?”
“보물을 들고 어디로 갔는지도 봤나?”
“그야… 당연히 봤습죠! 중간까지만 보고 말았지마는.”
“좋아.”
뭐가 좋다는 건데? 원숭이는 도대체 이 야만인의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이족보행 도마뱀들에게 쫓기는 상황에 죄수들을 전부 꺼내준 이유는 또 뭐고, 갑자기 궁중백의 얘기는 왜 나온단 말인가.
안 그래도 보물고를 털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데….
물론 속으로만 불평할 뿐이지. 대놓고 도망치거나 할 수는 없었다. 방금 야만인이 싸우는 꼴을 보고도 멋대로 튀어나갈 정도로 멍청했다면 대도둑을 자칭하지도 못했으리라.
무엇보다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눈앞의 야만인을 따라다니다 보면, 아르곤 왕국 역사에 길이 남길 만한 대사고를 칠 수 있을 거라고…!
“긴말 않겠다. 도망칠 놈들은 도망쳐. 거추장스럽게 전부 끌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왕성을 뒤엎고 싶다, 라는 놈들은 날 따라와라.
야만인의 어마무시한 선언에 원숭이는 전율했다. 역시 왕족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야만인은 뭘 해도 다르다니까!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두목!”
알레한드로. 아니, 이제 스스로를 원숭이라 부르기로 다짐한 자칭 대도둑이 선망에 가득 찬 눈빛을 던지며 칸의 앞에 시립했다. 그 뒤로 풀려난 죄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쯧….’
왕국 최악의 흉악범들이 ‘두목!’이라며 따르는 광경에 칸이 내심 혀를 찼다. 자신처럼 지극히 멀쩡한 현대 지성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야만적인 것들이지만, 나름의 쓸모가 있으니 쳐낼 수도 없었다.
‘나중에 일이 좀 귀찮아질 수도 있겠지마는.’
이건 무고한 사람을 죄수로 만들어서 집어처넣고는, 일을 똑바로 진행하지 못한 흑익공의 책임이 컸다.
‘알아서 하겠지.’
설마 양심이 있으면 제 똥을 치워준 사람보고 뭐라 하진 않으리라. 내심 남아있던 일말의 찝찝함을 전부 털어낸 칸이 원숭이를 앞세웠다.
“우선, 그 늙은이가 사라졌다는 방향으로 가자고.”
하늘에 맹세코.
냄새나는 놈들과 좁은 마차 안에서 며칠이나 동숙시키고, 축축한 감옥에 처박아둔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궁중백을 죽이는 과정에서 왕성이 아주 조금 망가져도, 불평은 없겠지.’
물론, 제거 대상인 궁중백만큼은 확실하게 조져놓을 작정이었다. 그래야 흑익공과 델피나 공주가 약속한 왕실의 보물 두 개를 챙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녀석이 왕실의 보물고에서 몰래 슬쩍했다는 물건도 확보하면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아니겠는가.
‘투 플러스 원 행사는 못 참지.’
망겜 속 야만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