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5화
5화.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육체를 단련하기 시작한 지 5일째 되던 날.
바깥에서 돌아온 시리우스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시리우스.”
이 별관에서 시리우스를 존칭 없이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시리우스의 배우자인 유스티아였다.
“요새 산책을 많이 하시는 것 같더군요.”
“내가 체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말이야.”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체력 단련을 시작했지.”
“…….”
유스티아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방 안에서 학문 연구만 하시던 분이 체력 단련을 시작했다고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건 아니지만…….”
“나도 이제 홀몸이 아니니, 건강을 챙겨야지.”
“…….”
“내 고질병이 도져서 어느 날 갑자기 픽 죽어 버리면 당신도 곤란하지 않나?”
유스티아가 시리우스하고 결혼한 건, 리겔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는 다른 가문들의 구애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아무런 힘도 없는 병약한 학자라도 남편으로 앉혀 놓으면 다른 가문의 구애를 원천 차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리우스가 죽어 버리면…… 그런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자기 가문 사람과 ‘재혼’하라고 여러 방면에서 압박하기 시작할 테고, 리겔 가문은 다시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리겔 가문이 다른 가문에게 장악당하는 걸 최대한 막고 싶은 유스티아 입장에서는, 시리우스가 건강히 오래 살아 줘야 좋을 수밖에 없었다.
“뭐…… 요즘 혈색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픽 죽어 버릴 것 같지는 않네요.”
“체력 단련 덕분이지.”
“대체 어떤 식으로 체력 단련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네요.”
유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체력 단련을 하는 건 좋지만, 내일은 바깥에 나가지 말고 집 안에 있어 줘요.”
“어째서지?”
“손님이 오니까요.”
“혹시 가주님이신가?”
“아니요. 아버지도 요새 바쁘셔서 본관 밖으로 나오기 어려우세요.”
유스티아의 아버지인 루트베인 리겔은 ‘6서클’의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경지는 1서클부터 9서클까지 있기 때문에, 6서클이면 꽤 실력 있는 마법사라 할 수 있지만…… 대륙 5대 명가의 가주치고는 많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 자녀들은 아버지보다 재능이 없기 때문에…… 리겔 가문의 미래는 꽤 암담한 상황이다.
“내일 찾아오는 건, 치안대를 맡고 있는 카르데인 님이에요.”
“카르데인?”
“유테루스 가문에서 파견된 분이죠. 결혼식 때 인사 나눴을 텐데…… 기억 못 하는 건가요?”
유스티아의 질문에,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지.”
카르데인 유테루스.
몰락 명가 리겔 가문을 돕기 위해 파견된 5서클의 마법사.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고 있다.
시리우스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몇 번이고 확인했기 때문이다.
“피로연 때 많이 얘기를 나눴으니 말이야.”
시리우스가 쓰러졌던 결혼식 피로연.
그때 시리우스에게 독한 술을 강요했던 장본인이 바로 카르데인 유테루스였다.
* * *
이튿날.
시리우스는 하녀의 부름을 받고 별관 정문으로 내려왔다.
유스티아와 함께 카르데인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군.”
“네?”
“카르데인 치안대장은 리겔 가문에 보수를 지급받는 입장 아닌가?”
정문에서 기다리던 도중,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에게 말을 건넸다.
“고용인이 피고용인을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니,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유스티아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리겔 가문에는 아버지 말고는 카르데인 님보다 강한 마법사가 없으니까.”
“…….”
“현재 리겔 가문은 유테루스 가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죠.”
유스티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딱딱했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유스티아가 카르데인과 유테루스 가문에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카르데인 님 앞에서 이런 얘기 꺼내는 일 없도록 해 주세요. 제가 주도해서 응대할 테니까, 당신은 그냥 옆에서 조용히 있으면 돼요.”
“회계 관련 얘기를 한다고 했지? 끼어들고 싶어도 끼어들지 못하는 분야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말을 탄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건장한 체격을 지닌 중년 남자였다.
“카르데인 님, 어서 오십시오.”
“결혼식 이후 처음이군, 유스티아 아가씨.”
말에서 내린 남자가 유스티아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시리우스한테도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우리 사위님도.”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이놈이 왜 이리 멀쩡하지?’하고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카르데인 치안대장님.”
그런 카르데인 앞에서, 시리우스는 깍듯이 인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 * *
“그러니까, 이 부분의 금액이 너무…….”
“그건 아가씨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응접실에서 유스티아과 카르데인의 입씨름이 계속 이어졌다.
유스티아는 유테루스 가문에서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비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가씨, 유테루스 가문은 리겔 가문을 위해 많은 인원과 물자를 제공해 주고 있어. 그러니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 줘야지.”
“네, 저도 유테루스 가문이 힘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노고에 충분한 금액을 지불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그래, 그러니…….”
“하지만 물품 관련 경비가 너무 시세보다 비싸게 책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너무 과도합니다.”
“아니, 유테루스 가문에서 운송하는 비용 같은 걸 생각하면…….”
“그렇다면 필요하신 물자의 리스트를 전달해 주십시오. 저희가 직접 수매해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어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두 가문이 놓인 처지를 생각할 때, 분명 유스티아가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스티아는 조리 있게 논지를 전개하면서 카르데인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하녀들이 ‘유스티아 님은 리겔 가문에서 가장 똑똑하신 분이에요.’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던데, 허황된 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런 모습은…… 제갈 총관을 떠오르게 하는데.’
시리우스는 천랑무제 백무랑의 기억을 떠올렸다.
백무랑이 무림맹주 자리에 있을 때, 누구보다 신뢰하는 직속 부하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여성의 몸으로 무림맹 대총관(大總官)의 자리에 오른 제갈연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산술(算術)의 천재로 소문이 났었는데, 제갈세가에서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한직에 머물고 있었다.
백무랑은 그 제갈연을 거둬들여서 총관으로 삼았고, 나중에 무림맹주가 되면서 대총관의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무림맹 내부의 부패도 막을 수 있었을 터라, 백무랑은 줄곧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지금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에게서 제갈연과 비슷한 인상을 받고 있었다.
‘그래, 내가 앞으로 이 세계에서 진정한 무림맹을 만들려면 총관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무림맹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각종 실무를 처리하는 총관 역할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맡아 줘야 했다.
만약 유스티아가 제갈연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시리우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스티아가 카르데인에게 반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리우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르데인 님, 제가 자료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직접 하나하나 짚어 드리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결국, 유스티아가 추가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응접실을 나갔다.
객관적 자료를 더 제시해서 카르데인의 입을 다물게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허허, 이것 참.”
카르데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스티아 아가씨는 돈 얘기밖에 안 하는군. 나는 신혼부부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들른 거였는데 말이야.”
“그러셨군요.”
“머리가 너무 똑똑해도 큰일이야. 일일이 따지고 살면 피곤할 텐데.”
그렇게 떠들어 대면서 카르데인이 시리우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 사위님…… 신혼 생활은 좀 어떤가?
“그냥 평범합니다.”
“평범, 평범이라.”
카르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이야, 사위님.”
“네.”
“나는 꽤 걱정했었어. 사위님이 피로연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말이야.”
“…….”
“그때 내가 사위님에게 술을 너무 많이 먹인 탓이겠지? 사실 오늘은 그것도 사과하고 싶었어.”
“괜찮습니다.”
시리우스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정말인가?”
“네, 보다시피.”
“…….”
“사실 그날 밤에 바로 회복되어서 멀쩡해졌습니다.”
그 말에 카르데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날 밤에 회복되었다고?”
“네, 맞습니다.”
“크흠,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였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니 괜찮아지더군요.”
카르데인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런 카르데인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를 건넸다.
“왜 그리 표정이 굳어지십니까?”
“아니, 딱히…….”
“제가 이유를 맞춰 볼까요?”
“뭐?”
카르데인이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오늘 치안대장님은 저를 보면서 계속 심기가 불편하셨을 겁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죠.”
“갑자기 무슨…….”
“일단 첫날밤에 얼어 죽었어야 할 시리우스가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게 당혹스러우셨겠죠.”
“……!”
물론 다른 이가 술에 약을 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 태도를 보니…… 시리우스를 죽이려 했던 범인은 카르데인이 맞다.
“그리고…… 이 학자 나부랭이가 유스티아 아가씨와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도록 불쾌하신 것 아닙니까?”
“뭐, 뭐?”
카르데인이 유스티아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리우스는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카르데인의 눈동자에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빛이 감도는 걸 여러 번 확인했다.
눈앞의 여자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음흉한 눈빛이었다.
“시, 시리우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이봐, 카르데인.”
더 이상 존댓말을 써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카르데인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내가 고민을 좀 해 봤어.”
“뭐, 뭐라고?”
“시리우스는 아무런 힘이 없는 병약한 막냇사위에 불과해. 리겔 가문을 둘러싼 권력 싸움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 그런 놈을 왜 굳이 죽여야 했을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시리우스는 죽든 말든 별 상관없는 존재다.
하지만, 시리우스가 죽어야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하나뿐이지. 시리우스를 죽여야만 유스티아와 결혼할 수 있으니까.”
“……!”
그렇다.
이것이 시리우스의 몸을 차갑게 얼려 죽이려 했던 이유.
“네 하찮은 정욕 때문만은 아니겠지. 유테루스 가문 차원에서 진행한 계획일 거야.”
그동안 시리우스는 육체 단련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시리우스의 기억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그동안 친분을 쌓은 하녀들 상대로도 여러 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리겔 가문이 처한 상황을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리겔 가문의 가주는 딸만 셋이지. 장녀와 차녀는 이미 다른 가문의 아들과 결혼한 상태고, 그쪽 가문도 리겔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
“그들을 제치고 리겔 가문을 차지하려면, 유테루스 가문도 ‘리겔 가문의 사위’라는 입장을 손에 넣어야 해.”
유스티아도 유테루스 가문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스티아는 카르데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카르데인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유테루스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봤자 리겔 가문의 미래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스티아는 아무런 힘도 없는 시리우스와 결혼했다.
유부녀가 되면 카르데인도 유테루스 가문도 더 이상 자신을 넘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이 결혼은…… 이런 놈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유스티아의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이봐, 카르데인.”
카르데인을 노려봤다.
검버섯이 군데군데 있던 카르데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것 같은데,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애를 아내로 취하고 싶나? 역겹군.”
“네놈……!”
카르데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쫘악!
내공이 실린 싸대기 한 방에, 카르데인의 입에서 이빨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