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0화
10화.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무랑, 자네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싶네.”
아직 천랑무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
당시의 무림맹주였던 서문휘가 백무랑을 찾아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서문세가는 무림맹을 장악하고 있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다.
사돈을 맺고 싶어 하는 세가들이 줄을 섰는데, 왜 백무랑을 사위로 삼는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게. 어디까지나 내가 자네를 높게 평가해서 사위로 삼고 싶을 뿐이니까. 서문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림맹에 힘을 보태 줬으면 좋겠군.”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백무랑은 일단 백도 정파에 소속된 인물이었지만, 너무 패도적이라고 욕을 먹곤 했다.
마치 흑도 같은 인물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백도를 하나로 모으는 무림맹주가 사위로 맞아들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림맹에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그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며 보여 준 모습은 확실히 패도적이었지. 하지만…… 순리에서 벗어난 일을 저지른 적은 없었네.”
“정파 명문들이 온갖 핑계를 대면서 방치하고 있던 악인들을 척살한 게 자네였네. 때로는 부패한 백도들조차 처단했지.”
“그러면서 자네는 항상 멈출 때를 아는 인물이었네. 무자비하게 적들을 도륙하다가도, 싸움을 멈춰야 할 때가 되면 냉정하게 검을 거두어 들였지.”
“참모들이 말하더군. 결국 따져 보면 백무랑이 나서 준 덕분에 희생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다고 말이야.”
“자네는 분명 백도이면서 흑도 같은 면모를 갖고 있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자네는 흑과 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사람이야.”
“흑과 백이 어우러진 자네 같은 상태를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잘 모르겠다면, 자네 스스로 생각해 보게. 지금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으니.”
“하지만 무랑…… 나는 무림맹에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우리 서문세가에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내 사위가 되어 주게.”
“흑과 백이 어우러진 자네라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생각해 보면, 백무랑에게 서문휘는 장인이라기보다는 스승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백무랑은 그에게서 은혜를 느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서문환과 서문세가에 많은 배려를 해 줬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서문휘가 백무랑에게 기대했던 대로라면, 서문환과 서문세가에도 가차 없는 태도를 취해야 했다.
백무랑이 해야 했던 것은…….
“시리우스.”
침착한 목소리에 과거 회상을 중단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유스티아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가 부르셔요. 집무실로 들어가시면 돼요.”
“그래, 알겠어.”
시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테루스 가문과의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현생의 장인어른인 리겔 가문의 가주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 * *
루트베인 리겔의 집무실에는 책이 많았다.
하지만 선대 가주의 소장 도서와는 달리 대부분 마법 관련 책이었다.
젊은 시절에 마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에서 마법 철학을 공부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뒤처리에 시간이 걸려서 말이야.”
루트베인이 차분한 태도로 시리우스를 맞이했다.
어젯밤에 만났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정말 점잖은 분위기의 인물이다.
눈빛에서도 깊이 있는 지성이 느껴졌다.
‘무림이었다면…… 세가의 가주보다는 고매한 유학자가 더 어울릴 인물이군.’
시리우스는 허술한 얘기로는 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울 거라 느꼈다.
이 남자 상대로는 깊이 있는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밝은 곳에서 보니, 확실히 안색이 좋아졌군. 사람이 달라 보여.”
시리우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루트베인이 말했다.
“정말로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군.”
“체력 단련을 좀 했습니다.”
“몇 주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좋아진다는 게 신기하군.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말한 뒤, 루트베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시리우스.”
“네, 가주님.”
“유테루스 가문에서 자네를 죽이고 유스티아를 취하려 했던 게 사실이라면…… 나는 유테루스 가문과 연을 끊을 생각이네.”
그동안 루트베인은 줄곧 유테루스 가문의 힘에 의존해 왔다.
그걸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리겔 가문이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최소한의 긍지는 있네.”
“…….”
“이런 수모를 당하고서도 유테루스 가문에 고개를 숙인다면, 선조님들을 볼 낯이 없지.”
루트베인이 작게 미소 지었다.
“자네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을 걸세. 유테루스 가문이 자네를 내놓으라고 하겠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네.”
“가주님.”
“내 딸을 지키려 한 사위를 사지(死地)에 보낼 수는 없네.”
루트베인이 시리우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게 되었군. 우리가 제대로 처신했더라면 자네가 칼을 뽑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일세.”
“…….”
그저 그런 소인배였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냐고 시리우스를 책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루트베인은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시리우스를 지키겠다 말하며, 사과를 하고 있다.
가문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시리우스는 루트베인에게 호감이 생겼다.
멸망해 가는 리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능력은 없어도…… 인품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지금 다른 가문에 보낼 서한을 작성하고 있네.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번 일의 잘잘못을 판단해 달라고 말이지.”
“…….”
“유테루스 가문은 세상의 평판에 민감한 편이네. 다른 가문이 개입하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겠지.”
루트베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타지에 나가 있는 큰딸과 작은딸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일세. 힘을 모아서…… 대처해 봐야지.”
루트베인도 유테루스 가문에 맞서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리겔 가문의 방침이 그렇게 정해졌다면 시리우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다른 가문들에 상황을 알리는 건 괜찮은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시리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중재를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뭐라고?”
“잘잘못을 가리는 건 당사자들끼리 하면 됩니다.”
흠칫 놀라는 루트베인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유테루스 가문과 결판을 내겠습니다.”
“시리우스…….”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으니까.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
루트베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입을 다문 채 시리우스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
“네, 가주님.”
“내가 6서클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솔직히 나 정도만 되어도 이 일대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네. 하지만…… 유테루스 가문과는 함부로 싸울 수 없지.”
“…….”
“유테루스 가문에는 7서클의 마도사…… 나이엘 유테루스가 있으니까.”
이 세계에서는 마법사의 경지를 서클의 숫자로 구분한다.
마법사들은 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여 서클의 숫자를 늘린다.
평범한 재능의 마법사들은 평생 노력해 봤자 6서클이 한계다.
선천적인 재능이 없으면 7서클에 진입할 수 없다.
그리고 7서클이 되면 마법적 능력도 비약적으로 향상되기 때문에, 7서클 이상은 ‘마도사’라 불리며 6서클 이하가 대적할 수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나이엘 유테루스가 바로 그 7서클의 마도사였다.
“그런데 지금 태도를 보면…… 자네는 7서클의 마도사조차 상대할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
시리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루트베인을 응시했을 뿐이다.
“정말로 놀랍군.”
그 눈빛 앞에서 루트베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런 힘을 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캐묻지 않겠네. 아마 카니스루트 가문에서 예전부터 해 온 연구하고 관계 있겠지만 말일세.”
“…….”
“자네도 나한테 말해 줄 생각이 없겠지. 지금까지 계속 비밀로 해 왔으니까.”
루트베인의 진지한 눈동자가 시리우스에게 향했다.
“하지만 시리우스…… 한 가지만 말해 줬으면 좋겠네.”
“…….”
“자네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생각이지?”
루트베인은 우려하고 있었다.
시리우스가 그 힘을 사용해 유테루스 가문을 도륙하고 이 일대를 피로 물들일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건 루트베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가주님.”
루트베인은 고매한 지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니 허술한 얘기로는 루트베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시리우스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제대로 전달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는 흑(黑)과 백(白)이 있습니다.”
“흑과 백……?”
시리우스는 집무실 책상 위에 있던 종이와 펜을 잡았다.
그리고 작은 동그라미를 두 개 그렸다.
하나는 동그라미 안을 아예 검게 칠했고, 하나는 그냥 내버려 뒀다.
흑색의 원과 백색의 원.
시리우스는 그 두 가지를 루트베인에게 보여 줬다.
“흑회들처럼 모든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흑입니다. 한편 가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폭력 외의 수단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 백이라 할 수 있겠죠.”
흑도(黑道)와 백도(白道).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순수한 흑이 있다면, 그는 살육의 화신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온 세상을 피로 물들여 버리겠죠.”
“…….”
“그러면 우리는 순수한 백을 추구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순수한 백은 흑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합니다.”
무림에서도 그런 존재들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극에 달한 존재들은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루트베인이 펜을 들었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하나 그린 뒤, 절반만 검게 칠했다.
흑색 반원과 백색 반원이 결합된 도형이 만들어졌다.
“흑만 있어도 안 되고 백만 있어도 안 된다, 흑과 백이 함께 있는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조금 다릅니다.”
답에 근접했지만, 조금 다르다.
“저는 흑과 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화를……?”
“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시리우스는 아까 그렸던 흑색 원에 하얀 원을 덧씌웠다.
“유테루스 가문의 본성은 흑에 가깝습니다.”
“…….”
“하지만 백의 가면을 뒤집어쓰려고 발버둥 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치에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흑색 원 위에 백색 원을 그린다고 해서 흑색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뭐라 말하기 힘든 지저분한 도형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 유테루스 가문의 형상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리겔 가문은 어떻습니까?”
시리우스는 아까 그렸던 백색 원에 다시 손을 댔다.
“제가 보기에 가주님은 백을 추구하시는 분 같습니다. 하지만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지요.”
“…….”
백색 원 위에 빗금을 그었다.
이번에는 백색 원이 의미가 없어졌다.
“이런 식으로 흑과 백이 제대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가 되면 결국 언젠가 파멸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느새 루트베인은 몰입한 표정으로 시리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학자의 것에 가까웠다.
“균형을 이뤘다는 건 어떻게 판단하지?”
“순리에 맞으면 됩니다.”
“순리라…….”
많은 무림인들이 백무랑을 보면서 너무 패도적인 인물이라 했다.
하지만 그건 백무랑이 생각하는 순리에 따르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알아봐 준 사람이…… 백무랑을 서문세가의 사위로 삼았던 무림맹주 서문휘였다.
“제가 유테루스 가문을 공격하여 어린애 하나 남겨 두지 않고 몰살시킨다면, 그건 아무리 대단한 명분이 있어도 순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
“거꾸로 유테루스 가문의 잘못을 모조리 눈감고 평화롭게 화해한다면, 그것 또한 순리에 맞는 일이 아닐 겁니다.”
시리우스는 새로운 도형을 그렸다.
하나의 원에서 흑과 백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조화를 이루는 상태.
이렇게 음양(陰陽)의 순리를 표현하는 도형을 태극(太極)이라 한다.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
서문휘가 백무랑에게 기대했던 것도 이것이다.
흑도들처럼 폭력이나 살육에 빠져들지 않고.
백도들처럼 명분이나 체면에 휘둘리지 않고.
흑과 백이 어우러진 태극을 체현하면서, 무림을 올바르게 이끌어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백무랑은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는 다를 것이다.
* * *
“아버지, 들어갈게요.”
집무실에 들어간 유스티아는 흠칫 놀랐다.
아버지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죠?”
“유스티아…….”
종이에는 흑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도형이 그려 있었다.
루트베인은 계속 그 도형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카니스루트 가문이 오랫동안 학문 연구를 해 온 게 맞는 모양이다.”
“네?”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 된 시리우스의 식견이, 나보다 더 깊은 거 같구나.”
루트베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에서 마법 철학을 공부한 자신보다 시리우스가 세상의 이치를 더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유스티아, 현재 이 대륙은 엉망이다.”
“아버지…….”
“흑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서슴지 않고 사람들을 해치지. 명문가들은 자기들 체면만 생각하면서 거들먹거릴 뿐이다.”
흑과 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세계다.
하지만 시리우스라면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리에 맞게 어우러져 있는, 이 오묘한 도형처럼.
“그래, 본래 대륙 5대 명가는…… 대륙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지.”
루트베인은 벽에 걸린 지도를 응시했다.
대륙 5대 명가였던 리겔 가문은 현재 동북부 끄트머리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시리우스라면…… 리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뒤, 이 대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리겔 가문의 가주인 루트베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유스티아, 리겔 가문의 앞날을 시리우스에게 맡기고 싶다.”
“……!”
리겔 가문을 위해, 나아가서는 대륙 전체를 위해.
루트베인은 시리우스가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돕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