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4화
14화. 싸워 볼 만한 상대일 것이다
나이엘이 완전히 숨을 거둔 걸 확인한 뒤.
시리우스는 입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유테루스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다들 덤벼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유테루스 가문의 최강자였던 나이엘을 시리우스가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모습으로.
“저항할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라. 상대해 줄 테니.”
“……!”
다들 뒷걸음쳤다.
이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놈들이 마지막까지 결사 항전하겠다고 나섰다면, 유테루스 가문은 오늘 전멸했을 것이다.
“없는 모양이군. 너희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이 누구냐.”
“…….”
머뭇거리던 놈들 사이에서, 마른 체격의 남자가 나왔다.
반쯤 감은 듯이 가느다란 눈을 가졌는데, 그 사이로 엿보이는 눈동자에서 총기가 느껴졌다.
이해타산이 빠른 인물이라는 걸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약삭빠른 쥐새끼 같은 인상이군.”
“네?”
“오해하지 마라. 나는 약삭빠른 쥐새끼를 좋아한다.”
“……?”
천랑무제 백무랑에게는 십이위병(十二威兵)이라는 직속 부하들이 있었다.
무림맹보다는 백무랑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집단으로, 무공이 뛰어난 인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 속해 있었다.
그들은 십이지(十二支)에 맞춘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중 한 명이 쥐처럼 약삭빠른 자준(子俊)이었다.
‘자준 그 녀석도 이런 인상을 갖고 있었지.’
자준은 무공 실력은 부족했지만, 눈치가 빠르고 잔꾀가 많은 인물이었다.
여러 사람들을 조율하여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세력을 만들려면 이런 녀석도 필요하겠지.’
시리우스는 이 남자한테 한번 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쓸 만하다면 자준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게 해도 좋을 것이다.
“이름이 뭐지?”
“팔테온 유테루스…… 가주님의 조카입니다.”
“칼테온과 이름이 비슷하군.”
“제 형제입니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테온은 살아 있다.”
“……!”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잘 협조해 준다면 살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다.”
숨을 삼키는 사람들 앞에서, 시리우스는 바닥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나이엘의 마법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시체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나를 따른다면, 최소한 이런 꼴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팔테온, 현재 유테루스 가문에서 서열이 높은 자들을 모조리 집합시켜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하도록.”
시리우스에게 복종해, 리겔 가문 밑으로 들어올 것이냐.
아니면 마지막까지 저항할 것이냐.
유테루스 가문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논의해야 한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해라. 추격하지는 않겠다.”
“시, 시리우스 님…….”
“하지만, 여기 남겠다면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해라.”
신흥 강호 유테루스 가문을 하루아침에 짓밟은 남자가, 냉정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들의 주군이다.”
* * *
팔테온에게 시간을 준 뒤, 시리우스는 건물 내부를 살폈다.
나이엘의 연구실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로군.’
책장과 수납장이 잔뜩 모여 있는 방이 있었다.
리겔 가문에서 시리우스에게 준비해 준 방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이게 약장인가?’
서랍을 열어 보니, 약초 같은 것들이 종류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시리우스의 기억 속에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들이 인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직접 확인해 봐야 하겠지.’
시리우스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며 무슨 약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던 도중…… 말린 꽃 한 송이를 찾을 수 있었다.
‘백빙화(白氷花).’
백빙화는 얼어붙은 북부 변방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식물이다.
하지만 이 백빙화가 백어증을 발생시킨다는 지식은 시리우스의 머릿속에 없었다.
고대의 지식에 관심이 많은 나이엘이었기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있는 자료들을 훑어보면, 다른 약재들의 효능도 알 수 있겠지.’
나이엘이 모아 놓은 자료들을 힐끔 쳐다보며, 시리우스는 백빙화 한 송이를 품 안에 챙겼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이쪽 사람들에게는 독약에 불과한 약도 나한테는 훌륭한 영약이 될 수 있어. 천천히 살펴보면 돼.’
바깥으로 나오니, 넓은 정원에 유테루스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긴장한 표정이었다.
“시리우스 님.”
팔테온이 앞장서서 고개를 숙였다.
“꽤 많은 숫자가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지? 의지할 곳이 있나?”
“칼슈타인 검단(劍團)에 몸을 의탁할 겁니다.”
“칼슈타인 검단?”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흑회입니다. 저희 가문과 물밑에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시리우스는 기억을 되새겼다.
별관의 하녀들이 칼슈타인 검단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사람을 마구 죽이고 다니는 놈들이라, 리겔 가문도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했던 것 같다.
“흑회로부터 민중을 지키는 게 명문가의 역할일 텐데, 너희는 흑회와 친분을 쌓고 있었나?”
“훗날 그들의 힘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가주님이…….”
“알겠다. 그러면 다 같이 쓸어 버리면 되겠군.”
“네?”
눈을 크게 뜨는 팔테온을 내버려 둔 채, 시리우스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들어라.”
시리우스의 또렷한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 유테루스 가문은 리겔 가문 밑으로 들어간다. 이건 곧, 리겔 가문의 보호하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리겔 가문은 유테루스 가문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시리우스의 말에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 밑으로 들어온다고 이해하면 된다.”
“앗…….”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시리우스는 그들의 절대 군주였던 나이엘 유테루스를 쓰러뜨린 사람이다.
그 밑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이엘 유테루스는 너희가 충성을 바칠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다.”
“……!”
“목적을 위해서라면 너희들을 얼마든지 버림패로 쓸 수 있는 놈이었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테루스 가문이 나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나는 유테루스 가문을 보호해 줄 것이다.”
“……!”
숨을 삼키는 유테루스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시리우스는 분명히 선언했다.
“내가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너희들은 금방 알 수 있게 될 거다.”
* * *
시리우스는 유테루스 본가에서 한동안 머무르기로 했다.
각지에서 유테루스 가문의 병력이 뒤늦게 도착했지만, 나이엘을 쓰러뜨린 시리우스에게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팔테온은 그들을 최대한 설득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시리우스를 따르기로 했다.
시리우스가 기대했던 대로, 팔테온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십이위병의 자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약삭빠른 쥐새끼같이 생긴 녀석들이 일을 잘한다니까.”
“…….”
“칭찬이니까 얼굴 펴라.”
팔테온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팔테온, 조만간 정식으로 유테루스 가문의 새 가주로 취임해라.”
“네? 제가 말입니까?”
“그러면 누가 가주 역할을 하지?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네가 가장 서열이 높다면서.”
시리우스의 말을 듣고, 팔테온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리우스 님의 이름을 내세워도 되겠습니까?”
“그래야 일 처리가 쉽겠지.”
“알겠습니다.”
팔테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십이위병의 자준도 그랬지만, 이런 녀석들은 충분한 보상만 주어지면 제대로 충성을 바친다.
시리우스는 팔테온을 잘 조련하여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리우스 님, 살짝 걸리는 게 있습니다.”
“뭐지?”
“칼슈타인 검단으로 도망친 놈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팔테온이 시리우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놈들은 칼슈타인 검단의 힘을 빌려 시리우스 님에게 복수하려 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들에게 힘이 있었다면, 자력으로 시리우스에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럴 힘이 부족했기에 칼슈타인 검단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타도해 봤자 결국 유테루스 가문은 칼슈타인 검단에게 넘어갈 거다.”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흑회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자선 사업으로 유테루스 가문을 도와줄 리 없다.
시리우스를 처치한 뒤, 유테루스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시리우스 님을 군말 없이 따르고 있는 건 칼슈타인 검단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보다 칼슈타인 검단이 두려운가 보지?”
“아니, 그렇진 않습니다만…… 적어도 시리우스 님은 무자비하게 사람을 학살하는 분은 아니시죠.”
팔테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칼슈타인 검단은 사람 목숨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 놈들입니다. 놈들이 유테루스 가문을 장악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영지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릴 겁니다.”
“…….”
“리겔 가문과 칼슈타인 검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복종해야 한다면 리겔 가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리겔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가고,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팔테온이 시리우스에게 협조적인 건, 이런 계산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이엘을 쓰러뜨린 시리우스의 힘에 기대해 보자.
약삭빠른 성격이니만큼, 그런 판단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슈타인 검단은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
“저,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팔테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칼슈타인 검단은 검을 숭상하는 흑회입니다. 특히 간부들의 마법검은…… 옛 가주님도 경계했습니다.”
“수준이 뛰어난가 보지?”
“네, 놈들은 다른 마법은 안 쓰고 오로지 마법검만 단련합니다.”
나이엘의 부하들 중에도 마법검을 쓰는 놈들이 있었지만,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오로지 마법검만 단련한 칼슈타인 검단는…… 과연 어떨까.
“게다가 우두머리인 칼슈타인은 가주님도 싸움을 피하던 7서클의 마법검사입니다.”
“…….”
7서클의 마법검사.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엘보다 더 싸워 볼 만한 상대일 것이다.
* * *
시리우스는 리겔 가문에 편지를 보냈다.
나이엘을 쓰러뜨리고 유테루스 가문을 제압했으니, 이곳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귀환하겠다고 말이다.
팔테온 유테루스를 새로운 가주로 세워서 흑회의 위협에 대처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정도 얘기해 두면 충분하겠지.’
루트베인과 유스티아가 상황을 잘 이해해 주길 바라며, 시리우스는 나이엘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틀에 걸쳐 가공한 백빙화 가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이엘의 연구실에서 찾아낸 자료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기 좋은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원래 약재라는 건 제대로 법제(法製)를 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지.’
시리우스는 산제(散劑)를 복용하듯이 백빙화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셔 삼킨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자, 가슴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빙화의 냉기가 조금씩 흡수되고 있었다.
이것이 전신으로 파급되어 혈맥에 엉키면 나이엘이 말한 백어증(白瘀症)이 된다.
양기가 쇠한 사람처럼 몸이 차가워지고 생명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시리우스는 천랑신공의 구결에 맞춰서 전신의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몸으로 흡수된 백빙화의 냉기도 그 흐름에 휩쓸렸다.
전신의 혈맥 속에 엉키면서 신체 기능을 저하시켜야 했던 차가운 기운이, 시리우스의 진기와 어우러진다.
극음(極陰)의 내공이 되는 것이다.
“…….”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백빙화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이 기운을 활용해 천랑신공의 다음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
칼슈타인은 7서클의 마법검사…… 나이엘과는 달리 접근전을 할 줄 아는 상대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진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천랑신공의 두 번째 단계…….’
이미 시리우스는 천랑신공의 첫 번째 단계인 ‘북명’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는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
1갑자에도 못 미치는 내공으로는 진입할 수 없는 단계였으니까.
지금 백빙화를 통해 얻은 기운으로 1갑자를 넘어선다면…… 두 번째 단계에 발을 들일 수 있다.
“…….”
정해진 경로를 따라 극음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온몸의 혈맥을 차가운 얼음물로 씻고 있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가끔 소름 끼치는 고통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눈을 감은 채 인내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큭……!”
입에서 시커먼 액체가 흘러나왔다.
전신에 쌓여 있던 탁기가 임맥을 타고 올라와서 배출된 것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뒷목에서 정수리로 스멀스멀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더니, 끈적끈적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독맥을 통해 탁기가 올라온 것이었다.
“……!”
시리우스 카니스루트의 육체에 계속 누적되었던 탁기가, 계속해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흘러내리던 시커먼 액체가…… 점점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맑은 액체가 되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가벼웠다. 시리우스의 육체가 한층 더 정갈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울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피부가 더 깨끗해졌고,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생겼으며, 눈빛도 한층 더 맑아졌다.
안 그래도 시리우스는 외모가 수려한 편이었는데…… 한 단계 더 외모가 향상된 것이다.
“잘 생겨진다고 해서 어디 쓸 곳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리우스는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반투명한 백색 기운이 일렁였다.
단지 그것만으로 주위 공기가 서늘해지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성공이군.”
시리우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랑신공의 두 번째 단계.
백랑(白狼)의 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