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5화
15화. 리겔 가문을 더 키울 생각이다
“정말로 나이엘 유테루스를 쓰러뜨리다니…….”
유스티아는 시리우스의 편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리우스는 나이엘 등 유테루스 가문의 중진들을 처치한 뒤 팔테온 유테루스를 새로운 가주로 내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시리우스는 유테루스 가문 사람들의 ‘진술서’까지 첨부했다.
나이엘과 카르데인 등이 꾸미던 음모를 낱낱이 밝혀, 유테루스 가문과의 싸움이 정당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말로 대단하구나, 유스티아.”
함께 편지를 읽고 있던 루트베인이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가 이런 남자일 줄은 몰랐다.”
“네, 이런 증거까지 확보한 상태라면 다른 가문들도 정당한 조치였다는 걸 인정해 줄 겁니다. 생각보다 철두철미하군요.”
“아니, 그 얘기가 아니다.”
루트베인이 미소를 지었다.
“시리우스가 너를 정말로 아끼는 것 같구나. 내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더니.”
“네?”
“이 편지들만 봐도 너를 빼앗으려는 놈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노가 느껴진다.”
“…….”
루트베인의 착각에 유스티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버지, 시리우스는…….”
“왜 그러지?”
“그게 말이죠…….”
유스티아는 골치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유스티아와 시리우스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계약 결혼’을 했다는 건 당사자들만 아는 얘기다.
애초에 루트베인은 두 사람이 한 번도 잠자리를 함께한 적이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시리우스가 유테루스 가문의 파렴치한 음모를 강하게 비판하는 건, 유테루스 가문을 장악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는 것이다.
나이엘이 시리우스를 악당으로 몰아세워 명분으로 삼으려 했듯이, 시리우스도 유테루스 가문의 음흉함을 강조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계산에 불과하다.
딱히 시리우스가 유스티아를 아끼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유스티아, 나는 솔직히 네가 시리우스를 남편감으로 골랐을 때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
“하지만 너는 알고 있었던 거구나. 시리우스가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도 루트베인의 착각이다.
유스티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리우스가 병약한 학자인 줄만 알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에게도 자신의 본성을 철저히 숨겼다.
“남자 보는 눈이 있었구나, 유스티아.”
“음…….”
사실 유스티아는 시리우스가 어떤 남자인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리겔 가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리우스의 움직임에 호응해야 한다.
“아버지, 시리우스가 바깥에서 저렇게 움직이고 있다면 저희도 리겔 가문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유테루스 가문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면서, 리겔 가문은 무방비해졌다.
6서클 마법사인 루트베인이 있긴 하지만, 가주가 직접 영지 전체를 순회하며 경비한다는 건 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다.
다행인 것은 시리우스가 신생(新生) 유테루스 가문과 연계하여 칼슈타인 검단 같은 흑회를 견제하겠다고 말해 줬다는 점이다.
시리우스가 흑회들을 견제해 주는 동안, 가문 내부를 최대한 재정비해야 한다.
“제가 구체적인 계획을 짜겠습니다.”
“네가?”
“그동안 가문의 회계 자료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흠…… 좋다. 너한테 맡기마.”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유스티아를 보면서, 루트베인이 미소를 지었다.
“막내딸과 막냇사위가 둘 다 유능해서 기쁘구나.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
다른 건 몰라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은 취소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리겔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새로운 가주가 된 팔테온 유테루스가 시리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두 사람은 주위 지역의 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간단히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빨리 유테루스 가문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나?”
“아,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없어. 너희 가문을 짓밟았으니,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겠지.”
“…….”
팔테온이 잠시 머뭇거린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 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잖아. 말해 봐.”
“저는 시리우스 님이 옛 가주님 일파를 숙청해 주셔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나이엘, 올스테드, 카르데인…… 그쪽 사람들이 가문을 장악하고 저희 가족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팔테온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제 아버지는 선대 가주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죠.”
“나이엘이 죽인 건가?”
“나이엘과 올스테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암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증거는 없습니다만.”
팔테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흔히 있는 일이긴 합니다.”
“흔한가?”
“요즘 들어서 점점 심해지고 있죠. 옛날에는 무조건 장남한테만 가주 자리를 물려줬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첫째든 둘째든 아들이든 딸이든 가리지 않고 가주 자리를 물려주는 풍조이니, 오히려 다툼이 심해지는 거죠.”
태어난 순서나 성별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는다.
이건 백무랑이 살던 세상보다 더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리겔 가문은 어떤 상황인 걸까.
루트베인은 딸만 셋이라고 하니, 3자매 중 한 명이 차기 가주가 될 것이다.
문제는 세 명 다 마법의 재능이 없다는 점이다.
루트베인이 어떤 기준으로 차기 가주를 선정할 건지, 시리우스는 아는 게 없었다.
“시리우스 님이 옛 가주님…… 아니, 나이엘 일파를 싹 쓸어 줘서, 솔직히 저는 속 시원했습니다.”
“그렇군.”
“덕분에 저도 가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말입니다. 유테루스 가문 자체가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앞으로 복구하면 되는 거고요.”
그렇게 말한 뒤, 팔테온이 시리우스의 눈치를 보면서 덧붙였다.
“시리우스 님을 열심히 도우면서 말입니다.”
“속이 엿보이는군, 팔테온.”
시리우스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도울 테니 본인의 자리를 보장해 달라…… 이 얘기겠지?”
“하하, 그렇습니다.”
팔테온이 멋쩍게 웃었다.
“팔테온.”
“네, 시리우스 님.”
“나는 리겔 가문을 더 키울 생각이다.”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테루스 가문이 리겔 가문을 계속해서 돕는다면, 자연히 유테루스 가문도 성장하게 되겠지.”
“…….”
“다른 마음 품고 헛짓하는 것보다 더 나을 거다.”
너희가 제대로 도와준다면, 너희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해 주겠다.
시리우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리우스 님은…… 대륙 5대 명가의 위세를 되찾으려고 하시는 거군요.”
“그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
“네?”
“이왕 하는 거, 정점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시리우스의 목표는 이 땅에서 진정한 무림맹을 만드는 것이다.
다만 무림맹이라고 말해 봤자 알아듣지 못할 테니, 일단 이렇게 말해 두기로 했다.
“저, 정점이라니…… 5대 명가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세상에 5대 명가만 있나? 흑회도 많고, 다른 세력들도 있을 텐데.”
“……!”
시리우스의 발언에 팔테온이 입을 떡 벌렸다.
“시리우스 님,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실현 가능성이…….”
“가능성은 내가 판단할 문제이니, 네가 고민 안 해도 돼.”
“으음…….”
팔테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신음했다.
시리우스의 대담한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일단 기억해 두겠습니다.”
결국, 팔테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괜히 딴지를 걸었다가 시리우스의 노여움을 사면 팔테온만 손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되면 리겔 가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시리우스 님은 리겔 가문와 혈연이 없으니, 직접 가주가 되실 수는 없지요. 그러면 유스티아 님을 가주로 만드실 생각인지……?”
“…….”
시리우스는 침묵했다.
그런 부분은 아직 생각한 적이 없다.
애초에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의 목표는 리겔 가문을 발판삼아 새로운 무림맹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리겔 가문의 가주 자리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아니면, 유스티아 님과의 자식을 가주 자리에 올려도 되는 거고요.”
“…….”
자식이라니.
그건 더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전생에서도 자식은 없었다.
“아, 사실 제가 아까 리겔 가문에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는지 여쭤 본 것도 유스티아 님 때문이었습니다. 신혼이신데 아내를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둬도 되는 건지 해서…….”
“팔테온.”
시리우스는 멋대로 떠들어 대는 팔테온에게 쏘아붙였다.
“밥이나 먹어라.”
“…….”
팔테온이 움찔했지만, 곧바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부인과 다투기라도 하셨습니까?”
“…….”
“에이, 신혼이신데 그러시면 안 되죠. 빨리 돌아가셔서 화해하고 2세도 만드셔야…… 악!”
팔테온이 이마를 움켜쥐면서 비명을 질렀다.
시리우스가 접시에서 굴러다니던 콩알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팔테온의 이마에 명중시켰기 때문이다.
“왜, 왜 이러십니까!?”
“쓸데없는 참견 마라.”
그러고 보니 십이위병의 자준도 쓸데없는 소리를 자주 하는 놈이었다.
이런 것까지 닮았을 줄이야.
“……혹시 정말로 사이가 안 좋으신 겁니까?”
빨간 자국이 남은 이마를 문지르면서, 팔테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이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그래도 시리우스 님, 카르데인한테 그렇게 화를 내며 응징하신 걸 보면 실제로는 부인을 진심으로…….”
“이 자식이 자꾸…….”
“죄, 죄송합니다.”
시리우스가 다시 한번 콩알을 날리려 하자, 팔테온이 몸을 움츠렸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건 바로 그때였다.
“가주님……!”
“무슨 일이냐?”
바깥에서 뛰어들어온 남자가 시리우스의 눈치를 보며 팔테온에게 다가왔다.
“지금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시리우스 님을 만나고 싶다고…….”
“리겔 가문에서 온 건가?”
“아닙니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칼슈타인 검단에서 온 사람입니다.”
“……!”
팔테온이 흠칫 놀라며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시리우스 님, 이걸 어떻게…….”
“기다리라고 해.”
“네?”
“식사가 안 끝났으니까.”
팔테온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시리우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 팔테온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 탓이지.”
“아니, 그게 제 잘못입니까?”
어이없어하는 팔테온 앞에서, 시리우스는 느긋하게 식사를 했다.
* * *
식사를 마친 뒤, 시리우스는 예전에 나이엘과 싸웠던 방으로 향했다.
아직 곳곳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이엘이 쓰던 의자에 앉은 뒤, 칼슈타인 검단의 사자를 불렀다.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나타났다.
체구는 마른 편이지만, 전신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육체를 잘 단련한 검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얕보는 건가? 네가 아무리…….”
“자기소개.”
“뭐?”
“자기소개부터 하라고.”
시리우스는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 쏘아붙였다.
“누군지 알아야 대화를 할 거 아니냐.”
“…….”
남자가 시리우스 곁에 있던 팔테온을 쏘아봤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았냐고 힐난하는 눈빛이었다.
팔테온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인상을 찡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칼슈타인 검단 6석, 알레이온이다.”
“6석, 6석이라.”
시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열이 꽤 낮군.”
“뭐라고?”
“6등이라면서? 사천왕(四天王)에도 오호장(五虎將)에도 들지 못하는 애매한 순위지.”
“……?”
당혹스러워하는 알레이온을 향해, 시리우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서열이 낮으니 이런 사자 노릇을 하는 거겠지.”
“……나를 모욕하는 거냐?”
알레이온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시리우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6석 나부랭이가 무슨 용무로 나를 만나러 온 거냐.”
“네놈……!”
알레이온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살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