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20화
20화. 이제부터 내가 운영할 것이다
기(氣)는 흐르는 것이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실제로는 계속 순환하고 있다.
기가 흐름을 멈춘다면 그건 그냥 죽은 것이다.
천랑신공의 두 번째 단계, 백랑은 상대의 기를 얼려 정지시키는 극음의 빙공(氷攻)이었다.
“아니……!”
칼슈타인의 마법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칼슈타인은 시리우스의 흑색 검기에 대응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천랑신공의 첫 번째 단계, 북명에 당하지 않게 마법검을 제어하는 것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백색으로 변한 시리우스의 검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 마법검은……!”
칼슈타인이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마법검을 재정비하면서, 시리우스가 새롭게 펼친 기술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윽……!”
쿵!
칼날과 칼날이 충돌했다.
하얀 검기가 칼슈타인의 마법검에 흠집을 냈다.
흠집이 난 부분으로 냉기가 침투하여 마법검을 구성하는 마력을 얼렸다.
얼어붙은 부위는 더 이상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다.
칼슈타인은 그걸 수복하느라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으윽……!”
칼슈타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넘어지듯이 자세를 무너뜨려 시리우스의 공격을 피한 뒤, 그대로 거리를 벌렸다.
마치 바닥을 뒹구는 것처럼 추한 자세였지만, 시리우스는 비웃지 않았다.
“나려타곤 같군.”
칼슈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뒤, 시리우스는 한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마법검이 자꾸 얼어붙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칼슈타인은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
이것은 칼슈타인의 검술이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
입술을 깨물면서 칼슈타인이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땅을 강하게 밟으며 움직였다.
그 순간, 시리우스는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하압!”
칼슈타인이 시리우스의 측면을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시리우스의 소맷자락이 찢어졌다.
비록 상처는 없었지만, 칼슈타인의 칼날이 시리우스에게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시리우스는 칼슈타인이 무슨 짓을 한 건지 한눈에 꿰뚫어 봤다.
칼슈타인은 마법으로 바람을 발생시키고, 그 바람에 몸을 맡겨 자신의 속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칼슈타인의 절기(絶技)……!”
뒤에서 구경하던 알레이온이 탄성을 질렀다.
팔리스가 그토록 배우고 싶어 하던 칼슈타인의 절기는, 바람의 마법을 활용한 고속 전투술이었다.
“고난도의 기술이군.”
터득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 바람의 마법과 마법검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적절히 조절하면서 자신의 움직임과 연동시켜야 한다.
“문제는 너무 복잡하다는 거군.”
“뭐라고?”
“더 쉬운 길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
무공을 사용하는 시리우스가 보기에는, 너무 번거로운 방식이었다.
“건방진 놈.”
칼슈타인이 짧게 중얼거린 직후.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칼슈타인의 움직임은 현란했다.
바람의 방향을 순간적으로 전환하면서 관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의 정면에서 달려드는 듯했다가 곧바로 좌측으로 파고들었고,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두르다가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공격했다.
“시, 시리우스……!”
칼슈타인의 칼날이 계속 시리우스를 덮치는 모습을 보면서, 알레이온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역시 칼슈타인한테는 안 되는 건가.
알레이온이 절망적인 심정을 느끼고 있었을 때.
“아까까지는 시리우스 님이라고 부르더니, 왜 호칭이 바뀌었냐.”
“……!”
시리우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시리우스는 지금까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옷자락은 찢어져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칼슈타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슬슬 칼슈타인의 움직임에도 익숙해졌다.
“여유를 부리기는……!”
칼슈타인이 목소리를 높이며 시리우스의 가슴을 노렸다.
그러나 칼슈타인의 검은 시리우스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시리우스가 바람처럼 움직여서 위치를 바꿨기 때문이다.
“……!?”
칼슈타인은 바람의 마법을 활용하며 시리우스를 추격하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칼슈타인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법 같은 걸 사용하지 않아도, 시리우스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보법이고 신법이다.
“네놈……!”
칼슈타인의 눈에는 시리우스가 순수한 육체능력만으로 자신의 속도를 능가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내공이 반영된 움직임이었지만, 칼슈타인은 구분할 수 없다.
계속해서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칼슈타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승부를 내기 위해 큰 기술을 펼치는 수밖에 없다.
“하압……!”
칼슈타인의 진정한 절기.
바람의 마법이 실린 3연격이 시리우스를 향해 전개되었다.
시리우스가 첫 번째 공격과 두 번째 공격을 막거나 피하더라도, 마지막 공격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도록 설계된 연속 공격이었다.
“……!?”
하지만, 시리우스는 칼슈타인의 예상을 능가했다.
지금까지 칼슈타인이 목격한 적 없는 정교한 움직임으로 첫 번째 공격과 두 번째 공격을 피한 뒤, 세 번째 공격을 정확히 막아 냈다.
“윽……!”
시리우스는 칼슈타인의 연속 공격 직후에 생긴 빈틈을 파고들었다.
칼슈타인은 여기서 빈틈이 생긴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이 기술을 펼치고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리우스의 검을 막기 위해 이를 악물고 방어했지만, 이미 자세가 무너진 상태였다.
“……!”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시리우스의 칼날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걸 알기에 칼슈타인은 이를 악물고 시리우스의 칼날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칼날에 전개된 하얀 기운이 칼슈타인의 마법검을 파고들었다.
파팟, 파팟.
마치 빙결 마법이 전개된 것처럼 칼날이 얼어붙었다.
시리우스는 백랑의 공력을 계속해서 쏟아 내며 칼슈타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젠장…….”
칼슈타인이 짧게 중얼거린 직후.
시리우스의 검이 칼슈타인의 검을 부러뜨리고,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 *
시리우스는 검을 거둬들였다.
칼슈타인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나이엘은 근접전에 약했기 때문에 접근만 해도 해치울 수 있었지만, 칼슈타인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간만에 제대로 싸워 볼 수 있었군.’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 잔챙이들하고만 싸우면 아무런 보람이 없다.
제대로 공방을 주고받으며 아슬아슬하게 맞붙어야 싸우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칼슈타인조차 일격에 쓰러졌다면 시리우스는 꽤 실망했을 것이다.
“시리우스…….”
그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칼슈타인에게서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네놈…… 연맹의 관계자냐?”
“연맹?”
연맹.
그것은 여러 흑회들을 지배하는 거대 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 가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명문가라면, 각지의 흑회들 위에 군림하는 건 연맹이었다.
“네놈의 검술은 결코 명문가의 것이 아니다. 연맹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보낸 자객인 거냐……?”
“…….”
“젠장, 내가 놈들을 설득하기 위해 차석 제자도 보냈는데…….”
칼슈타인이 피를 토하면서 계속 말했다.
“마력을 얼리는 냉기…… 연맹이라면 그런 기술을 숨기고 있을 법도 하다. 혹시 너희는 나를 제거하는 것으로 이 지역을 다른 흑회에게…….”
“헛다리를 짚고 있군, 칼슈타인.”
시리우스는 칼슈타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나는 네가 리겔 가문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제거했을 뿐이다.”
“…….”
시리우스의 말을 듣고, 칼슈타인이 잠시 침묵했다.
“나를 죽인다고 이 주변의 치안이 안정될 것 같나……?”
“…….”
“칼슈타인 검단이 사라지면,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에서 다른 흑회들이 몰려든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다 죽이고 다닐 거냐?”
칼슈타인이 웃음소리를 냈다.
“작은 마을을 털고 다니는 소규모 흑회까지 네가 전부 잡고 다닐 수는 없다. 리겔 가문이나 유테루스 가문을 총동원해도 어렵겠지. 리겔 가문은 몰락했고, 유테루스 가문은 네가 반쪽으로 만들어 놨으니 말이다.”
“…….”
“결국 너는 이 근방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어떻게 수습할 거지……?”
그렇게 묻는 칼슈타인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 별 걸 다 걱정해 주시는군, 노인네.”
“큭…….”
“앞으로 본인이 어떤 지옥에 떨어질지 걱정하는 게 더 유익할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나?”
칼슈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뒤질 사람이 왜 그런 걸 걱정하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챙길 테니 신경 쓰지 마라.”
“네놈…….”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딴 거라니, 인생 헛살았군.”
“…….”
칼슈타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리우스는 칼슈타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시, 시리우스 님…….”
싸움을 지켜보던 알레이온이 침을 삼키며 시리우스에게 다가왔다.
“칼슈타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칼슈타인 검단이 무너졌다는 걸 알면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 같은 세력이 이쪽으로 진출할 겁니다.”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
팔테온 유테루스한테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놈들은 소규모 흑회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 놈들이 각지에서 소란을 피우면 일일이 대응하기가…….”
“알레이온.”
느긋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면서, 시리우스는 입을 열었다.
“아래로 뛰어가서, 검단 조직원들을 집합시켜라.”
“네?”
“아무리 6등이라고 해도 명색이 간부이니, 네 명령에 따르겠지.”
아까 4석 발가트와 3석 율레인을 쓰러뜨렸을 때도, 알레이온이 뒷수습을 했다.
“아까 지나쳤던 골짜기 훈련장에 모이라고 해라.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그런 놈들까지 다 붙잡아 올 필요는 없으니까.”
“시, 시리우스 님, 어쩌시려고…….”
“알레이온.”
시리우스는 당혹스러워하는 알레이온을 째려봤다.
“뛰라는 말 못 들었나?”
“아, 알겠습니다!”
다급히 뛰어가는 알레이온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 * *
이윽고 훈련장에 칼슈타인 검단 조직원들이 집합했다.
물론, 모든 조직원이 다 모인 것은 아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도망친 놈도 적지 않았다.
“시리우스 님, 일단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다.”
구석에 앉아 있던 시리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알레이온을 대동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저놈은……!”
유테루스 가문 출신들이 시리우스의 모습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아까 4석 발가트와 3석 율레인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 놈들도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 자식, 아까 용케도 율레인 누님을……!”
혈기 왕성한 남자 한 명이 상관의 원수를 갚겠다고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는 시리우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
시리우스가 날린 검이 그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컥……!”
일격에 쓰러지는 남자의 모습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오로지 숨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렸다.
“다음.”
“……?”
“다음에 덤빌 놈.”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을 쓱 훑어본 뒤, 시리우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칼슈타인은 내가 죽였다.”
“……!”
“수석 제자인 팔리스, 3석 율레인, 4석 발가트, 5석 유르카도 내 손에 목숨을 잃었다. 차석은 어디 다른 곳에 간 모양인데, 뭐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6속 알레이온을 힐끔 쳐다봤다.
알레이온은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칼슈타인 검단은 이제부터 내가 운영할 것이다.”
“……!”
“너희 스승님을 섬겼던 것처럼 나를 섬기도록 해라.”
칼슈타인 검단을 접수하겠다는 발언에, 다들 경악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별로 지을 일이 없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지금까지와 별로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
“하지만, 나는 조금 욕심이 있다. 우리 조직을 더 크게 윤택하게 만들려고 하는 욕심이지. 그러니…… 힘없는 민초들에게서 더 가열차게 뜯어내야 할 것 같다.”
시리우스의 느긋한 목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알레이온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담당하던 율레인이나 발가트 등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군. 아주 큰일 났다.”
시리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그동안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뜯어내는 것을 진두지휘하던 실무 책임자들, 앞으로 나와라. 너희들을 새로운 간부로 임명하여 앞으로의 일들을 맡길 생각이니까.”
“……!”
“특히 인신매매에 일가견이 있는 놈들을 우대한다. 선착순이다.”
간부로서 우대해 준다는 얘기에 이십여 명의 조직원들이 튀어나왔다.
앞다투어 달려 나오는 놈들의 눈동자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리우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뒤늦게 눈치챈 알레이온만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하고 있었다.
“…….”
그렇게 모인 놈들을, 시리우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칼슈타인 검단에서도 갱생의 여지가 없는 진짜 쓰레기들만 모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