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25화
25화. 이 정도로 돌대가리들일 줄은
“시리우스가 떠났군요.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유스티아는 살펴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유스티아, 시리우스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지 아느냐?”
“남쪽의 치안 유지와 관련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흠, 그런가…….”
딸의 설명에 루트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바깥일들은 너희한테 맡기기로 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유스티아는 시리우스가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있다.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 양쪽을 제압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시리우스와 직접 논의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
시리우스는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을 동시에 상대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유테루스 가문이나 칼슈타인 검단 때보다 훨씬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싸움에서도 시리우스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
유스티아는 시리우스와 작전을 의논할 때 쓰던 지도를 응시했다.
동북부 끄트머리까지 쫓겨났던 리겔 가문이……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보름달이 뜬 밤.
50여 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산기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발카인 길드의 우두머리인 길드장…… 7서클의 마도사, 발카인이었다.
“길드장님.”
발카인의 뒤를 따르던 줄리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놈들의 본거지까지 가도 되는 걸까요?”
“이미 말했다, 줄리안.”
발카인이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게 천랑검단 단주의 함정이든 아니든, 우리는 갈 수밖에 없다.”
“길드장님…….”
“그놈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1%라도 있는 한…… 가야 한다.”
어젯밤, 줄리안은 발카인에게 달려와 시리우스의 얘기를 전했다.
이 일대의 지배권을 결정하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정예 병력을 이끌고 바로 달려오라는 것이었다.
길드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한밤중에 인원을 소집하여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1%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
“오블레아 용병단에게 이 일대의 지배권을 넘겨주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발카인 길드는 오블레아 용병단과 계속 충돌해 왔다.
두 세력은 서로 규모도 비슷하고 활동 영역도 겹친다.
그리고 두 세력 모두 동북부 전체를 주름잡는 조직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야망을 지녔다.
“칼슈타인이 죽고, 유테루스 가문의 나이엘도 죽었다.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할 절호의 기회다.”
“…….”
“연맹에서 정말로 현지 세력에게 일임할 생각이라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은 오블레아 용병단이 아닌 우리다.”
발카인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얼굴의 흉터를 매만졌다.
얼핏 보기에는 칼로 베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법에 당한 상처였다.
몇 년 전, 오블레아 용병단의 단장과 충돌했다가 생긴 흉터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랑검단 단주는 미친놈이다.”
“…….”
“연맹에서 파견된 놈이 아닌데 이런 사기를 친다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미친놈이다. 연맹에서 파견된 놈인데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상식을 모르는 미친놈이지.”
발카인이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친놈을 상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아예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 다니는 거고, 두 번째는 미친 짓에 말려들지 않도록 신속히 정면 돌파하는 거지.”
“아…….”
“첫 번째 방법은 지금 불가능하다. 그러니 두 번째 방법을 취해야지.”
오블레아 용병단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는 이상, 발카인 길드는 급히 현지로 향해야 한다.
“망설일 필요는 없다. 천랑검단 단주가 연맹에서 온 사람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대의 지배권을 얻어 내야 한다.
“…….”
“만약 놈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그 자리에서 놈을 쓰러뜨리면 되는 거다.”
그놈이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 자리에서 쓰러뜨리고 리겔 가문까지 쓸어버리면 된다.
“줄리안, 칼슈타인 검단의 주요 간부 중에서 6석만 남아 있다고 했나?”
“네, 칼슈타인뿐만 아니라 직속 제자들도 없는 상태입니다.”
“천랑검단의 단주 말고는 전부 잔챙이라는 얘기군. 그렇다면 우리 전력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일대일 승부를 할 필요는 없다.
천랑검단 단주가 아무리 강해도 여럿이서 덤벼들면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아, 길드장님, 앞쪽에……!”
“……!”
칼슈타인 검단의 본거지가 있던 산.
그 입구 근처에 50여 명이 몰려 있었다.
중심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를 확인하고 발카인은 이를 갈았다.
“오블레아……!”
“발카인이군.”
오블레아 용병단의 단장, 오블레아였다.
그는 육중한 체구의 사내로, 발카인과 마찬가지로 7서클의 마도사였다.
다만 발카인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하다니…… 고민하느라 출발이 늦어졌나 보군, 발카인.”
“오블레아, 네놈…….”
“더 늦게 도착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연맹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겠지.”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오블레아를 보면서, 발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양쪽 다 도착한 모양이군.”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출입문 위에서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네놈은…… 칼슈타인 검단의 6석 아니냐?”
“지금은 천랑검단의 알레이온이다. 문을 열어 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렇게 길을 열어 준 뒤, 알레이온은 앞장서서 산길을 올라갔다.
“단주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함께 올라와라.”
“…….”
발카인과 오블레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렇게 된 이상, 수하들을 이끌고 함께 올라갈 수밖에 없다.
“오블레아, 함정이라 생각한 적은 없나?”
산길을 오르면서 발카인이 넌지시 묻자, 오블레아가 코웃음을 쳤다.
“함정? 무슨 함정이지?”
“그건…….”
“우리를 죽이려고 복병이라도 숨겨 놨을 것 같나? 그럴 거면 어느 한쪽만 불렀을 거다.”
“…….”
“우리가 힘을 합쳐 덤벼들면 놈들도 당해 내기 어렵다. 그러니 함정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해야지.”
오블레아의 말에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산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불안한 예감이 강해졌다.
이윽고 산 중턱에 도착하니, 제법 넓은 훈련장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검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장발의 남자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어서 와라.”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로 천랑검단 단주다.”
“…….”
발카인이 그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을 때.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놈은 역시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맞습니다!”
유테루스 가문에서 도망쳐 나온 놈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틀림없습니다!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 시리우스가 분명합니다!”
“큭……!”
발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우리를 속이려 한 건가.”
“쯧쯧, 어리석은 놈.”
하지만, 그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오블레아가 그를 보며 조소를 짓고 있었다.
“저 남자가 시리우스라면 뭐가 문제냐?”
“오블레아, 무슨 소리지? 저놈은 연맹 사람이라고 사칭을 했는데…….”
“발카인, 잘 생각해 봐라.”
오블레아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시리우스는 처음부터 연맹 사람이었던 거다.”
“뭐라고?”
“연맹이 리겔 가문을 장악하기 위해 시리우스를 잠입시킨 거다. 시리우스가 유테루스 가문을 몰아내고 칼슈타인을 죽인 것도 전부 연맹의 계획인 거지.”
“……!”
발카인은 눈을 크게 떴다.
“병약한 학자라 알려졌던 시리우스가 나이엘이나 칼슈타인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도, 시리우스가 처음부터 연맹에서 파견한 실력자였다면 설명이 된다.”
“아……!”
“어쩌면 진짜 시리우스를 죽여 버리고, 사람을 바꿔치기한 걸지도 모르겠군. 연맹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만도 하지.”
“……!”
숨을 삼키는 발카인을 내버려 둔 채, 오블레아가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시리우스, 너희가 우리를 이곳에 불러 모은 이유도 맞춰 볼까?”
“…….”
“너희는 우리한테 정예 병력을 끌고 오라고 했다. 그 말은…… 여기서 우리가 자웅을 겨뤄 보라는 의미겠지.”
대표만 오라고 온 게 아니라, 정예 병력을 다 끌고 오라고 했다.
이건 싸움을 시킬 예정이라는 뜻이다.
“오블레아 용병단과 발카인 길드…… 승리하는 쪽에게 이 일대의 지배권을 맡기겠다, 뭐 그런 얘기를 할 생각이었겠지.”
“…….”
“실로 연맹다운 방식이군. 참으로 흥미로워.”
그렇게 말하고 오블레아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시리우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
“어느 한쪽이 승리하더라도, 승부가 끝나면 많이 지칠 거다. 그 이후 네가 나서서 모조리 죽여 버리면 곤란해.”
싸우다가 지친 두 조직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것.
시리우스가 그걸 노리고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니 뭔가 보장을 해 줬으면 좋겠군. 승부가 끝난 뒤 너희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그, 그래, 맞다!”
발카인도 다급히 동의했다.
“어떤 방법이든 좋다! 그쪽에서 제대로 보장해 준다면, 지금 여기서 승부를 내겠…….”
“혼란하군, 혼란해.”
바로 그때.
줄곧 침묵하고 있던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엉망진창이라 뭐라고 설명해 줘야 될지 모르겠군.”
“뭐……?”
“전부 다 틀렸다, 이 머저리들아.”
시리우스의 입에서 경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하나 맞는 게 없군. 너희들의 판단력을 저하시키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린 건 맞지만, 설마 이 정도로 돌대가리들일 줄은 몰랐다.”
“……!”
“하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니까 허구한 날 동네 장사만 했던 거겠지.”
동네 장사.
나름 규모가 있는 조직인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을, 시리우스는 그렇게 폄하했다.
“나는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다. 연맹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유테루스 가문을 몰아낸 것도 칼슈타인을 죽인 것도 전부 내 의지다.”
“……!”
연맹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추리를 제시했던 오블레아도, 그 말을 믿었던 발카인도 숨을 삼켰다.
“그리고, 네놈들을 서로 싸우게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무, 무슨 소리냐!”
오블레아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우리를 여기에 왜 불러 모은 거지? 대체 이유가 뭐냐!?”
“단순하면서도 깊은 이유가 있지.”
시리우스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며칠 전, 나는 지도를 보면서 너희들의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뭐……?”
“너희들은 대도시 한복판에 본거지가 있더군. 그것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상업지대에.”
발카인 길드는 물류 흐름을 장악하고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오블레아 용병단는 점포들을 돌아다니며 보호비를 갈취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가지 한가운데에 본거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칼슈타인 검단처럼 깊은 산속에 있으면 나 혼자 쳐들어가서 때려잡으면 된다. 피가 흐르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하지만 시장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면 좀 문제가 되지.”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가 시장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벌인다면 민중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가문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고, 리겔 가문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
“게다가 너희들이 민간인들 사이에 뒤섞여 도망치기라도 하면 나 혼자서는 잡기 힘들다. 그래서 내 아내와 함께…….”
그렇게 말하다가 시리우스가 헛기침을 했다.
“리겔 가문 사람하고 고민을 해 봤지.”
어째서 정정을 하는 거지?
시리우스의 어색한 발언에 발카인과 오블레아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너희들 모두를 이곳에 불러 모아 일망타진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
“이곳은 깊은 산속이다. 너희를 모조리 죽여 버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게다가 칼슈타인 검단이 산길을 좁게 만들어 놔서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다.”
일망타진.
그것이 시리우스의 진짜 노림수라는 걸 깨닫고, 발카인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미, 미친 자식……!”
발카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죽고 싶은 거냐!? 여기에는 두 세력의 정예 병력이 다 모여 있다!”
시리우스의 아군은 칼슈타인 검단의 잔당들뿐이다.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의 정예 병력 앞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
시리우스가 칼슈타인을 쓰러뜨린 실력자라고 해도, 설마 9서클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발카인과 오블레아가 협공하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그 순간.
발카인은 시리우스의 표정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런 동요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발카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네, 네놈…….”
그리고 발카인은 비로소 이해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엉뚱한 추측만 하면서 시리우스의 본심을 깨닫지 못한 이유를.
시리우스는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 양쪽을 동시에 상대해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발카인도 오블레아도 엉뚱한 착각만 했고, 시리우스에게 돌대가리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알레이온, 무너뜨려라.”
“네!”
쿠쿵!
등 뒤에서 굉음과 함께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올라온 산길이 막히며 퇴로가 차단되었다.
다들 경악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시작하지.”
“주, 죽여라……!”
발카인 길드와 오블레아 용병단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혈전(血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