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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명가의 절대무신-28화 (28/129)

몰락명가의 절대무신 28화

28화. 네가 먼저 때렸다

표국(鏢局)이란 표물(鏢物)을 운송하고 보호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상인들에게 의뢰를 받아 물건을 옮기지만, 문파나 관부의 의뢰를 받을 때도 많았다.

표물을 옮기는 표행(鏢行)이라는 건 그냥 물건을 다른 곳으로 실어 나르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어느 길로 가야 신속하고 안전한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운송을 방해하는 요소가 나타났을 때는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녹림의 산적들이 나타나면 맞서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과 협상을 하여 무사히 표물을 통과시키는 유연함도 요구되었다.

그렇기에 실력 있는 표국은 강호의 이름 높은 문파들 못지않은 명성을 누렸다.

‘천랑표국은 이 세계에서 그런 존재로 자리 잡을 것이다.’

시리우스는 발카인 길드의 간판을 떼고 천랑표국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굳이 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건, 흔히 생각하는 운송업 길드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걸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천랑표국은 리겔 가문 직속의 공적 기관이 된다.

흑회처럼 사사로운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안정화시키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우선한다.

이걸 통해 리겔 가문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것이다.

“단주님.”

시리우스가 오블레아 용병단의 잔당을 해산시키고 돌아오자, 안경 쓴 청년이 다급히 달려왔다.

아까 시리우스에게 지목당했던 실무자였는데, 조금 얘기를 나눠보니 머리가 좋고 정신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에디스 총관.”

시리우스는 그를 천랑표국의 총관으로 임명하여 대소사를 관리하게 한 상태였다.

갑자기 승진하게 된 에디스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유테루스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유테루스 가문?”

에디스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가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약삭빠른 쥐새끼 같은 인상의 남자다.

“어이쿠, 시리우스 님.”

“팔테온.”

“벌써 발카인 길드를 접수하고 오블레아 용병단을 해체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유테루스 가문의 현(現) 가주인 팔테온이 시리우스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일대까지 시리우스 님의 영역이 되는 거군요.”

“리겔 가문의 영역이다, 팔테온.”

“아, 그랬죠. 하여간 유테루스 가문도 계속해서 협력 드리겠습니다.”

천랑표국이 출범하면 유테루스 가문에서도 인력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유테루스 가문도 천랑표국이 활성화되면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팔테온이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시선을 향했다.

“유스티아 님도 모셔 왔습니다.”

“…….”

유스티아가 외출복 차림으로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그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유스티아.”

“네, 시리우스.”

“앞으로 나는 이 일대의 자잘한 흑회 조직을 정리할 거다. 그러다 보면 동북부 전체를 평정하게 되겠지.”

유스티아와 눈을 마주치면서, 시리우스는 천천히 말했다.

“그걸 관리하는 것이, 당신의 역할이다.”

“걱정 마세요, 시리우스.”

유스티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정(內政)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당신은 뜻대로 움직이세요.”

“그러도록 하지.”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시리우스와 유스티아는 얼굴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분이 사모님이셨어요?”

“그래, 잘 어울리는 한 쌍 아니냐?”

에디스와 팔테온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리우스와 유스티아는 함께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 * *

유스티아는 천랑표국의 국주(局主) 역할을 맡게 되었다.

리겔 가문의 딸이라고는 하나, 갑자기 젊은 여자가 나타나 총책임자가 되니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스티아의 업무 능력을 확인하고는 다들 입을 다물었다.

특히 에디스는 이런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면서 그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확실히 머리가 좋은 여자란 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산술(算術)의 천재였던 제갈연 총관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렇게 계속 실무 경험을 쌓다 보면 시리우스가 만들 새로운 무림맹의 총관 역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스티아가 그 역할을 받아들여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천랑표국을 유스티아에게 맡긴 뒤, 시리우스는 팔테온 등을 데리고 주위 지역을 정리했다.

흑회의 구성원 중에서 갱생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놈들은 천랑검단에 편입시켰다.

시리우스는 새로 들어온 놈들의 정신머리를 고칠 수 있도록 지옥 훈련을 시키라고 알레이온에게 말해 두었다.

천랑검단이 더 몸집이 커지면, 시리우스의 사병(私兵)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크고 작은 흑회들을 정리하고 치안을 안정시키자 민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겔 가문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난 것이다.

그런 여론에 힘입어, 유스티아는 천랑표국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켜 갔다.

몰락명가였던 리겔 가문은 조금씩 동북부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동북부 최대 세력이 남아 있습니다.”

팔테온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평야 지대를 꽉 잡고 있는 알브라임 가문입니다. 발카인 길드나 오블레아 용병단도 그쪽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알브라임 가문이라…….”

시리우스는 예전에 유스티아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대륙 5대 명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꽤 역사가 있는 명문가라고 한다.

“정보를 수집해 보니, 알브라임 가문은 현재 저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리겔 가문이 다시 일어서서 동북부를 장악하는 걸 경계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알브라임 가문은 흑회 세력이 아니다.

역사가 있는 명문가이기 때문에, 아무런 명분 없이 리겔 가문을 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건 리겔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이유 없이 알브라임 가문을 건드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동안 탐색전이라는 건데…….”

“사람을 뽑아서 알브라임 가문 쪽을 염탐하게 시킬까요?”

팔테온의 제안에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그러면 어떻게…….”

“내가 직접 보고 오는 게 낫겠어.”

“네?”

시리우스는 에디스의 사무실로 나갔다.

에디스는 수많은 서류에 둘러싸인 채 일을 하는 중이었다.

“총관.”

“아, 단주님.”

에디스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시리우스가 손짓으로 제지했다.

“백빙화(白氷花)를 구할 수 있는 방법, 알아봤나?”

“죄송합니다. 워낙 희귀한 약초라…….”

백빙화는 시리우스가 복용했던 극음(極陰)의 약초다.

나이엘이 남긴 자료를 확인하면서 여러 가지 약재를 시험해 봤지만, 백빙화처럼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약은 없었다.

그래서 천랑표국에 백빙화를 구해 달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리우스는 진짜 용건을 꺼냈다.

“총관, 혹시 알브라임 가문으로 가는 화물이 있나?”

* * *

“벨리드 님, 자재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다.”

그 말에 알브라임 가문의 둘째 아들인 벨리드는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마 전에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엘리트로, 아직 스물넷인데도 불구하고 5서클에 도달한 수재였다.

“세상이 흉흉하니, 방비를 철저히 해야지.”

이곳은 알브라임 가문이 보유한 요새.

벨리드는 이곳의 증축 공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벨리드 님, 그런데 이렇게 크게 증축할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 세상이 이 정도 방어 시설은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쯧쯧,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벨리드는 측근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이제 곧 난세가 올 거다.”

“난세요?”

“변두리에서는 큼직큼직한 흑회들이 하루아침에 멸망했다고 한다. 신흥 강호였던 유테루스 가문이 무너지고 죽어 가던 리겔 가문이 다시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 하지.”

최근 수집한 정보를 열거하면서 벨리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 이게 난세의 징조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

“조만간 대륙에 피바람이 불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리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난세야말로 내 능력을 발휘하기 딱 좋지.”

벨리드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형을 제치고 알브라임 가문의 가주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한데, 혼란스러운 세상일수록 실적을 쌓기 좋다.

“흑회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기라도 하면 좋겠구나. 내가 모조리 격퇴하고 공을 세울 수 있을 테니.”

“아, 네…….”

측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으로 나가 공사장을 살펴보니 여러 대의 짐마차에서 물건을 내려놓는 중이었다.

“그런데 꼭 천랑표국에 부탁해야 했던 거냐?”

“거길 통해 자재를 들여오는 게 가장 저렴합니다.”

“흠, 너무 저렴하면 믿음이 안 가는데.”

“발카인 길드 시절보다 훨씬 믿음직해졌다는 평판입니다. 리겔 가문에서 가문의 이름을 걸고 관리한다고 하니…….”

리겔 가문의 이름에 벨리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리겔 가문 놈들이 장난질을 치지는 않았을까?”

“네?”

“나 같으면 우리 쪽에 불량 자재를 공급할 거다. 그리고 나중에 분쟁이 생기면, 그 불량 자재를 사용한 곳을 집중 공격하는 거지.”

벨리드의 상상에 측근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리겔 가문은 대륙 5대 명가입니다. 그런 짓을 할 리가…….”

“혹시 모르지. 시리우스라고 했던가? 그 막냇사위 놈이 영 수상하단 말이야.”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시리우스가 그 일대의 실력자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고 한다.

그 정체가 ‘연맹’에서 파견한 실력자라는 낭설이 있을 정도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놈은 분명 우리 가문에 피해를 줄 놈이야.”

“…….”

“언젠가 내가 직접 손을 봐줘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벨리드는 계단을 내려갔다.

“어쨌든, 한번 살펴보마.”

“베, 벨리드 님!”

벨리드는 측근을 내버려 두고 공사장으로 향했다.

수상한 부분이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사실 벨리드 눈으로는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자재가 불량인지 아닌지 구별할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음…….”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을 때.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짐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짐을 옮기는 인부가 저렇게 머리를 기르다니…… 쯧쯧.”

그렇게 혀를 차다가, 벨리드는 눈을 크게 떴다.

장발의 남자가 나무상자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뭐 저런 놈이…….”

벨리드는 곧장 그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뒤통수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이 자식아!”

퍽!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알브라임 가문의 물건을 그따위로 집어 던져? 제정신이냐?”

너무 세게 쳤는지 손이 아팠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만큼 세게 쳤는데도, 놈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걱정 마라. 물건이 손상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뭐?”

반말로 지껄여 대는 남자를 보면서 벨리드는 눈을 치켜떴다.

“이 자식아, 그렇게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으면서 무슨…….”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벨리드는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줄 알았던 상자들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인제 보니 상자 하나하나가 상당히 육중해 보였다.

이런 무거운 상자를 집어 던져서 차곡차곡 쌓아 놨단 말인가?

이건 벨리드가 마법을 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못 믿겠으면 열어 봐라. 손상된 물건이 있으면 변상하지.”

“이, 이 자식이…….”

벨리드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아, 뭘 잘했다고 반말로 대들어?”

장발의 남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짐 나르는 인부 주제에 내게 감히…… 악!”

빠악!

벨리드는 바닥을 굴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뒤통수가 아픈 걸 보니 한 대 맞은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이 자식이……!”

“뭐.”

눈물을 글썽이며 벨리드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장발의 남자는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가 먼저 때렸다.”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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