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29화
29화. 먼저 간다
‘살살 때렸는데 눈물까지 글썽이다니.’
알브라임 가문의 둘째 아들, 벨리드 알브라임.
그가 울먹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한심함을 느꼈다.
만약 진지하게 때렸다면 지금쯤 벨리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팔테온은 벨리드가 요주의 인물이라 말하던데, 그 정도는 아닌 건가.’
지금 시리우스가 이곳에 있는 건 천랑표국의 수송단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수송단을 호위하면서 주위의 도적 떼를 격퇴한 뒤, 알브라임 가문을 직접 두 눈으로 살펴볼 계획이었다.
겸사겸사 짐 옮기는 걸 돕고 있었는데…… 벨리드가 먼저 다가와 시비를 건 것이다.
“벨리드 님?”
“왜 거기서 웅크리고 계십니까?”
주위에서 일하던 알브라임 가문의 인부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시리우스가 벨리드의 뒤통수를 때리는 걸 보지 못했다.
“바, 방금 이 자식이…….”
벨리드가 시리우스를 손가락질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네?”
“그냥 넘어진 거다! 배가 아팠다!”
어느 쪽이냐.
시리우스는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지금 벨리드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이 얻어맞은 걸 숨기는 중이었다.
알브라임 가문의 둘째 아들이 한낱 짐 나르는 인부한테 얻어맞았다고 하면 상당히 쪽팔린 일이니까.
“거기, 너.”
벨리드가 시리우스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일 똑바로 해라. 내가 분명히 경고했다.”
“…….”
고압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벨리드는 고개를 획 돌려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한 번 더 피식 웃었다.
‘재밌는 놈이군.’
그렇게 웃으면서, 시리우스는 짐마차에서 나머지 화물을 내렸다.
* * *
“젠장!”
방으로 돌아온 벨리드는 주먹으로 벽을 쳤다.
알브라임 가문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굴욕감을 참을 수 없었다.
“천랑표국…… 완전히 흑회 같은 놈들이었군.”
리겔 가문에서 책임지고 관리한다고?
그럼 리겔 가문도 흑회 수준으로 타락했다는 얘기다.
제대로 된 명문가라면 산하 단체에서 저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시리우스라는 놈이 나타나면서 가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데, 그것 때문인 걸까.
“내가 이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벨리드 님.”
그때 측근이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천랑표국 사람들이 일을 정말 잘하더군요. 앞으로도 천랑표국에 부탁해야…….”
“일을 잘하긴 뭐가 잘해!”
“왜, 왜 그러십니까?”
벨리드가 버럭 화를 내자 측근이 몸을 움츠렸다.
“고작 그 소리를 하려고 온 거냐?”
“아, 수송단 책임자가 벨리드 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책임자?”
마침 잘됐다.
아까 그 무례한 장발 남자를 언급해서 어떻게든 불이익을 줘야 한다.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벨리드는 뒤통수에 생긴 혹을 어루만지면서 책임자가 도착하는 걸 기다렸다.
이윽고 측근이 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벨리드 님, 이 사람입니다.”
“이봐, 인부들 교육을 대체 어떻게…….”
바로 이번 일을 항의하려던 벨리드는 그 자리에서 경직되었다.
아까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던 그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너, 너…….”
“뭐.”
그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허락도 없이 의자에 앉은 뒤, 다리를 꼬면서 벨리드를 쳐다봤다.
“우리 일은 거의 다 끝났다. 이제 뒷정리만 남았군.”
“너, 너, 이 자식…….”
벨리드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네, 네가 책임자라고?”
“그래, 이번 수송에는 내가 표두(標頭) 노릇…… 아니, 수송단장 노릇을 했다.”
“도대체가!”
기가 막혔다.
“너 같은 불한당이 수송단장이라고? 어이가 없군!”
“뭐가 문제지?”
“닥쳐라, 쓰레기 같은 놈!”
벨리드는 삿대질을 하며 분노했다.
“리겔 가문도 완전히 타락했군! 이런 쓰레기 같은 놈한테 일을 맡기다니, 리겔 가문도 이제는 쓰레기와 다름없…….”
“이봐.”
바로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벨리드의 말을 끊었다.
“지금 리겔 가문을 모욕한 건가?”
“뭐, 뭣?”
“명망 높은 알브라임 가문의 둘째 아들께서, 다른 가문을 쓰레기라 부르며 모욕해? 그것도 대륙 5대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고 줄곧 노력해 온 리겔 가문한테?”
벨리드는 몸을 움찔했다.
“어느 한쪽이 멸문(滅門)할 때까지 싸워 보자는 건가?”
“……!”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벨리드는 다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이, 이봐, 네가 흥분할 필요가 뭐가 있지?”
고작 수송단장한테 쩔쩔매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벨리드는 필사적으로 상대를 타일렀다.
“그냥 우리끼리 하는 얘기잖아. 리겔 가문 사람이 듣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리겔 가문 사람이 왜 안 듣고 있어?”
“뭐?”
“여기 있는데.”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구신지……?”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다.”
“…….”
벨리드는 입을 떡 벌렸다.
“아, 아니, 왜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가 수송단장 노릇을…….”
“천룡표국의 표국주가 내 아내라서 말이다.”
“…….”
“그래서, 벨리드.”
시리우스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어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싸워 보겠나?”
“……!”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고작 이런 일로 알브라임 가문과 리겔 가문이 서로 멸망할 때까지 싸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시리우스다.
자기 아내를 넘봤다는 이유로 유테루스 가문을 박살 내고, 주변 흑회를 모조리 쓸어버렸다는 악귀 같은 남자…….
이번 일을 명분으로 삼아 알브라임 가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버지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개인적인 말다툼 때문에 이런 일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하면……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
“사?”
“사과하겠다…….”
결국, 벨리드는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리겔 가문을 함부로 모욕했다. 내 잘못이 분명하니,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
“가문의 명예가 중요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큰 실수를 해 버렸다. 용서해 줬으면 한다.”
시리우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벨리드는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 그리고 아까 뒤통수를 때린 것도 사과하겠다. 네가 화물을 함부로 다룬다고 착각해서…….”
“…….”
“정말로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그렇게 사과한 뒤, 벨리드는 조심스레 시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뒤통수를 때린 건 딱히 사과할 필요 없다.”
“뭐?”
“나도 가끔 주위 녀석들 쥐어박고 그런다. 빡치는 일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아…….”
언제부터인가 시리우스로부터 나오던 살기가 사라져 있었다.
“굳이 사과해야 할 게 있다면, 네가 착각한 걸 깨닫고도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 것에 사과해야겠지.”
“아, 그건…….”
“하지만 그것도 이미 내가 네 뒤통수를 때렸으니 다 끝난 얘기다.”
시리우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리겔 가문을 모욕한 게 문제인데……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이 자리에서 바로 사과했으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하겠다.”
“아……!”
시리우스의 용서에, 벨리드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 * *
시리우스는 딱히 농담을 하던 게 아니었다.
벨리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리겔 가문을 모욕했다면, 알브라임 가문과 맞붙을 명분으론 충분했기 때문이다.
리겔 가문을 존중하지 않는 명문가 따위는 그냥 쓸어버리면 된다.
‘네가 알브라임 가문을 살린 거다, 벨리드.’
벨리드는 분명 한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가문을 위해 자존심을 죽이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굳이 목숨을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십이위병 중 하나였던 오랑(午郞)이 생각나는군.’
천랑무제 백무랑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오대세가 중 하나였던 남궁세가 출신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옛날에는 허세만 부리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놈이었는데…… 백무랑에게 많이 얻어맞고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서 시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벨리드, 사실 너를 만나러 온 건 다른 이유가 있다.”
“뭐지?”
“이번에 물건을 수송하면서 살펴보니, 도적 떼가 있는 것 같더군.”
“골고트 일당인가.”
벨리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놈들이 수송단을 습격했나?”
“아니, 기웃거리기만 했다.”
“그렇겠지. 이쪽으로 오는 물건이라는 걸 눈치챘을 거다. 놈들은 우리 가문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고 있으니까.”
“놈들을 토벌하려고 한다.”
“뭐?”
시리우스의 말을 듣고, 벨리드가 눈을 깜박였다.
“이, 이봐. 우리 가문이 골고트 일당을 아직 토벌하지 못한 건 놈들이 워낙 신출귀몰하기 때문이야. 쉽게 잡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고.”
“놈들의 본거지를 대충 파악했어. 그곳을 급습하면 된다.”
“보,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벨리드 앞에서, 시리우스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리드, 리겔 가문은 동북부의 흑회들을 모조리 정리할 생각이다.”
“……!”
“구제 불능인 놈은 그냥 죽이고, 갱생 가능성이 있는 놈은 두들겨 패서라도 갱생시킨다. 그게 우리 방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리우스의 방침이었다.
흑과 백을 아우르는 진정한 무림맹을 만들려면, 흑회라고 해서 무조건 몰살시켜서는 안 된다.
물론, 살려 둘 가치가 없는 놈들한테까지 자비를 베풀어 줄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소문을 들어 보니 골고트 일당은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없는 놈들 같더군. 하지만 너희 알브라임 가문의 세력권 안에서 함부로 무력을 쓰면 문제 소지가 있지.”
“으음…….”
“그래서 너한테 양해를 구하려던 거다, 벨리드.”
벨리드가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알겠다. 도적들을 토벌하는 거니 리겔 가문이나 천랑표국에 항의하지는 않겠다.”
“양해해 줘서 고맙군.”
“하지만.”
벨리드의 목소리가 살짝 달라졌다.
공적을 탐내는 청년의 목소리였다.
“나도 함께 가겠다.”
“함께 간다고?”
“안 그래도 언젠가 내 손으로 골고트 일당을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호기롭게 말하면서 벨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는 알브라임 가문의 실력자들이 꽤 있다. 내가 그들을 지휘할 테니 함께 토벌을…….”
“따라올 거면 너 혼자서 따라와라.”
“뭐?”
“사람이 많으면 놈들이 도망칠 거다.”
신출귀몰한 놈들을 잡는 것이다.
우르르 몰려가면 놈들이 눈치채고 줄행랑을 칠 게 뻔하다.
“나 혼자 가거나, 우리 둘이 가거나.”
시리우스는 벨리드를 쳐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 중 하나다.”
“…….”
벨리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어두운 숲속.
시커먼 옷을 뒤집어쓴 두 청년이 어둠 속을 달렸다.
“내가 도둑처럼 이런 옷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한다니…….”
“목소리를 더 낮춰라, 벨리드.”
지금 시리우스와 벨리드는 전형적인 흑의인(黑衣人)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실 시리우스 혼자라면 굳이 이런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벨리드는 은신술을 모르기 때문에 복장이라도 갖춰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정말로 놈들의 본거지가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여기군.”
“……!”
시리우스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교묘하게 위장해 놓은 입구를 찾아냈다.
무림에 있을 때 녹림채를 여러 번 털어 봤기에, 이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따라와라.”
“자, 잠깐……!”
낭떠러지 같은 곳으로 몸을 날리자, 입구를 지키던 놈이 흠칫 놀라며 칼을 뽑으려 했다.
“웬 놈이…….”
놈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시리우스가 스쳐 지나가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자, 목이 꺾이면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벨리드, 내가 선행한다. 너는 내가 놓치는 잔챙이들을 잡으면 된다.”
“시, 시리우스…….”
“먼저 간다.”
도적들이 우글대는 어둠 속으로 시리우스가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벨리드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본 뒤, 이어서 뒤통수를 맞고 목이 꺾여 죽은 사체를 쳐다봤다.
“큭……!”
이 남자는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벨리드는 오금이 저리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