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명가의 절대무신-31화 (31/129)

몰락명가의 절대무신 31화

31화. 농간에 넘어가시겠습니까?

시리우스는 벨리드를 보며 백무랑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십이위병의 오랑(午郞) 같은 놈이야.’

무림에서도 가끔 이런 녀석들이 있었다.

자신은 능력이 출중한데 주위가 너무 평화로워서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놈들이다.

주로 명문세가의 도련님들이 이런 병증에 빠져 강호를 동경하게 된다.

가문의 보호에서 벗어나 거칠고 어지러운 강호로 향하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병증이 심화되면 홀로 강호에 나서서 협객행을 시도하게 되는데, 대부분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백무랑은 이런 병증을 강호병(江湖病)이라고 불렀으며 강호병에 걸린 도련님들을 강호병자라 부르곤 했다.

벨리드는 난세를 기대하고 있는 듯하니…… ‘난세병’에 걸린 ‘난세병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헛소리 말고.”

시리우스는 난세병자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빨리 나가기나 하자. 공기가 안 좋다.”

“쯧, 알겠다.”

“공기를 맑게 하는 마법은 없나?”

“그 정도는 질풍 마법으로 가능하지.”

벨리드가 손을 치켜들자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순식간에 공기가 순환되었다.

“어때?”

“…….”

아까 어둠을 밝히는 빛을 생성한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쓸 만한 놈이다.

“마법을 잘 쓰는군.”

“이 정도야 당연하지.”

벨리드가 으스댔다.

“아카데미 출신이면 기본적인 거야.”

“…….”

아카데미.

이 세계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전문 교육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체계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싶은 명문가 자제들은 아카데미에 들어간다고 한다.

루트베인 리겔도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리우스, 너도 정말로 뛰어난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거다. 네 스승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카데미 교수님들이야말로…….”

“벨리드, 아카데미에는 9서클 마법사도 있나?”

“9서클? 당연히 있지.”

벨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엄청난 실력을 지니셨지. 지난번에 산사태를 수습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마법이 아니라 기적 같더군.”

“…….”

“나도 실력을 더 쌓으면 언젠가 9서클의 경지에…….”

열심히 떠들어 대는 벨리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시리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무공을 잘 쓰면 산사태 정도는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산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다.

그런 기적적인 힘을 지닌 9서클의 마법사를 꺾으려면 어떤 무공이 필요할까?

여러모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았다.

‘9서클의 마법사들을 만나면…… 새로운 깨달음도 얻을 수 있겠지.’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무림에 있었을 때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시리우스가 이 세계에서 추구하는 또 하나의 목표였다.

* * *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버지를 만나고 가면 어떻겠느냐.

동굴을 빠져나오니 벨리드가 그런 제안을 했다.

그동안 골치를 썩이던 골고트 일당을 토벌했다고 보고해야 하는데, 본인 혼자서 한 일이 아니니 동행해 주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알브라임 가문을 살피고 가주를 만나는 건 시리우스도 원했던 일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벨리드를 따라 알브라임 가문의 본거지로 향했다.

“여기가 우리 알브라임 가문의 본성(本城)이지.”

알브라임 가문의 본거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였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유지 보수도 잘되어 있는 걸로 보였다.

과연 몰락명가 리겔 가문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벨리드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벨리드가 시리우스를 본성으로 데려온 건 여러 가지 속셈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알브라임 가문의 위세를 자랑하는 것이다.

알브라임 가문은 이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다, 그러니 알아 모셔라……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던 것이었다.

“자, 들어가지.”

벨리드가 앞장서자 여러 사람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벨리드 님, 그분은 누구신지……?”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 시리우스다.”

“……!”

“이번에 함께 도적들을 토벌했지, 하하!”

벨리드가 시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하자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이렇게 시리우스와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것도 벨리드의 속셈이었다.

“아버지는 오늘도 정원에 계신가? 보고드릴 게 있는데.”

“정원에 계시긴 합니다. 그런데…… 손님을 응대하고 계십니다.”

“손님? 누군데?”

“그것이…….”

“뭐?”

아랫사람과 귓속말을 하는 벨리드를 내버려 둔 채 시리우스는 혼자 걸어갔다.

내부를 구경하면서 먼저 가고 있자 벨리드가 다급히 쫓아왔다.

“잠깐, 시리우스!”

벨리드는 시리우스의 옷자락을 잡으며 다급히 속삭였다.

“상황이 조금 안 좋다. 아버지를 뵙는 건 나중으로 하자.”

“어째서지?”

“아그타스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고 한다.”

“…….”

아그타스 가문.

시리우스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동북부에서는 알브라임 가문이 가장 강하지만, 동부 전체를 따지자면 아그타스 가문이 제일이라 한다.

대륙 5대 명가에 근접한 위치에 있다는 명문가…… 그것이 아그타스 가문이었다.

“마침 잘됐군.”

“뭐?”

“아그타스 가문도 궁금했었거든.”

“아, 아니 잠깐!”

이번에는 시리우스가 벨리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아까 벨리드가 했던 것처럼 친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벨리드를 앞세워 알브라임 본성을 마음대로 활보하기 위해서였다.

“정원은 이쪽인가?”

“야, 시리우스……!”

벨리드가 저항하려 했지만, 시리우스가 벨리드의 어깨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성안에 조성된 정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정자 같은 구조물이 있었다.

그곳에 백발의 노인과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벨리드, 무슨 일이냐.”

노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결국 벨리드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그동안 요새 증축에 방해가 되던 골고트 일당을 토벌했습니다.”

“흠, 그 도적단 말인가.”

알브라임 가문의 가주, 클린드 알브라임.

과거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었다는 마도사였다.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직접 싸움에 나서는 일은 없지만, 한때 동북부에서는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워낙 신출귀몰해서 대처하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토벌했구나. 벨리드, 네가 큰일을 했다.”

“아, 그게, 사실 저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

벨리드가 조심스럽게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린드 님.”

“자네는…….”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인 시리우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벨리드와 함께 골고트 일당을 토벌했습니다.”

시리우스가 격식 있는 태도로 말하자 클린드가 눈을 크게 떴다.

한편 클린드와 함께 있던 청년은 인상을 찡그린 채 시리우스를 노려봤다.

“허허…… 이것 참, 대단한 인물이 나타났군.”

클린드가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 소문은 많이 들었소.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설마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군.”

그렇게 말하며 클린드가 시선을 돌렸다.

“마침 잘됐소. 안 그래도 그쪽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클린드 님…….”

“어떻소, 파리엘.”

클린드가 함께 앉아 있던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을 향해 말을 건넸다.

“본인한테 직접 얘기를 들어 보는 게 낫지 않겠소?”

“…….”

청년이 입술을 깨문 채 시리우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적의가 담긴 시선으로 잠시 노려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그타스 가문의 아들인 파리엘이라고 한다. 최근 동북부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동북부 최고의 명사(名士)인 클린드 님과 의논드리고 있었다.”

“소란이라니?”

“시치미 떼지 마라, 시리우스.”

파리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테루스 가문을 제압하고 허수아비 가주를 세운 걸로도 모자라서…… 여러 흑회의 수장을 죽이고 수하들을 거둬들였다지? 그리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상인들까지 장악했다고 하더군.”

“…….”

“우리 아그타스 가문에서는 네 행보를 우려하고 있다. 명문 중의 명문이었던 리겔 가문이 이렇게 타락한 것도 안타깝고……. 그래서 알브라임 가문과 상담하고 있던 중이었지.”

그렇게 말한 뒤, 파리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설마 네가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한테서 해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군. 할 말 있으면…….”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파리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동북부에서 어떤 세력이 무슨 짓을 하든 거들떠보지 않던 아그타스 가문이 인제 와서 동북부의 상황을 염려하는 건가?”

“뭐라고?”

“파리엘 아그타스.”

시리우스가 파리엘의 이름을 불렀다.

“칼슈타인 검단이나 발카인 길드, 오블레아 용병단 같은 조직들이 동북부 민간인들을 등쳐 먹을 때. 대체 아그타스 가문은 뭘 하고 있었지?”

“이봐, 아그타스 가문은…….”

“아그타스 가문은 동부에서도 주로 남쪽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는 가문이라 들었다. 하지만 너희의 전력이라면 동북부로 진격하여 흑회들을 토벌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겠지.”

이건 이미 유스티아 등과 얘기하여 확인한 상황이었다.

“내 말이 틀렸나?”

“쉽게 말하지 마라, 시리우스.”

파리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동북부는 우리 가문의 세력권 바깥이다. 개입하려면 그만한 명분이…….”

“그러면 지금은 왜 동북부 상황에 개입하려고 하는 거지?”

“…….”

시리우스의 지적에 파리엘이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동북부의 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겠지. 하지만 동북부는 흑회 놈들이 민간인들을 등쳐 먹고 다니던 때보다 더 안정된 상태야. 명분이 더 없어지지 않았나?”

“…….”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명분이 부족했겠지. 그래서 알브라임 가문을 만나려 했던 거 아닌가?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보려고?”

이번에는 옆에 있던 벨리드가 움찔하며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파리엘의 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동북부 흑회들을 가만 내버려 둔 건, 너희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지.”

시리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동북부에서 흑회들이 제아무리 민간인들을 해치고 등쳐 먹어도 너희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박수를 치겠지. 유테루스 가문이나 알브라임 가문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이봐, 무슨 그런 말을…….”

“너희 아그타스 가문은 동북부가 별 볼 일 없는 촌구석으로 남길 바라고 있지 않았나?”

치안이 형편없고.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동북부가 그런 동네일수록, 아그타스 가문에게는 유리하다.

“너희는 언젠가 동부 전체를 장악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북부가 형편없는 촌구석일수록 유리해.”

“무슨…….”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지. 우리 리겔 가문이 동북부를 안정시키기 시작했으니까.”

시리우스는 파리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우려하는 건 리겔 가문이 다시금 5대 명가의 위세를 회복하고 동부 지역의 맹주가 되는 거다.”

“……!”

“아그타스 가문은 언제나 5대 명가의 일원이 되는 걸 꿈꾸고 있었지. 그래서 리겔 가문이 여기서 다시 일어서는 걸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야.”

리겔 가문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건 유테루스 가문만이 아니다.

아그타스 가문도 리겔 가문을 대신하여 대륙 5대 명가에 이름을 올리길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알브라임 가문을 찾아온 거다. 동북부에서 큰 힘을 지닌 알브라임 가문의 협력을 얻는다면 명분을 만들기도 쉬워질 테니까.”

“허, 헛소리하지 마라, 시리우스!”

파리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내가 알브라임 가문을 찾은 건 어디까지나……!”

“클린드 님.”

시리우스는 파리엘에게 대꾸하지 않고 클린드를 쳐다봤다.

“아그타스 가문은 알브라임 가문을 꼬드긴 뒤 리겔 가문과의 싸움에 선봉장으로 세울 생각일 겁니다. 동북부의 명가 알브라임이 앞장서야 명분이 산다고 말입니다.”

“…….”

“그리고 리겔 가문과 알브라임 가문 양쪽이 큰 피해를 입은 동북부에 진출해, 동부 전체를 장악한다는 오랜 꿈을 달성할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아그타스 가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最上)의 전략이다.

알브라임 가문을 이 싸움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동부 전체를 손에 넣어 대륙 5대 명가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이미 그 속셈을 간파했다.

“그런 농간에 넘어가시겠습니까?”

“…….”

클린드 알브라임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