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32화
32화. 부부는 일심동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파리엘 아그타스는 초조함을 느끼며 소리쳤다.
“클린드 님, 시리우스의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침묵하는 클린드 알브라임을 노려보며 파리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리우스는 온갖 나쁜 소문이 도는 인물입니다! 저런 놈의 이간질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얼씨구.”
시리우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반박할 말이 없으니 유치하게 인신공격으로 넘어가다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리우스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혹한 인물인지는 클린드 님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심지어 흑회들 위에 군림하는 ‘연맹’의 관계자라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급기야 시리우스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까지 언급하기 시작했다
“파리엘, 그 얘기까지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소.”
하지만 클린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리우스는 명문 리겔 가문의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연맹의 관계자라 몰아세우는 건…… 너무 모욕적이지 않소?”
“아니, 흑회들 사이에서 분명 그런 얘기가…….”
“아그타스 가문은 흑회 놈들이 하는 소리를 믿는 것이오?”
“…….”
“증거도 없이 사람을 그렇게 몰아세워서는 안 되는 법이오.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니…….”
파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명예를 들먹이면 할 말이 없었다.
“시리우스, 당신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소.”
“…….”
“아그타스 가문이 그런 속셈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그쪽의 말도 믿어 주기 어렵소.”
그렇게 말한 뒤, 클린드가 시리우스와 파리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 알브라임 가문은 판단을 유보하겠소.”
“크, 클린드 님!”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을 편들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소.”
파리엘이 반발했지만 클린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브라임 가문은 중립을 지키겠소.”
“……!”
중립을 지키겠다.
그것은 리겔 가문과 아그타스 가문이 어떻게 싸우든 알브라임 가문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클린드 님…… 설마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파리엘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결과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알브라임 가문의 협력을 얻는 건 실패했지만, 적어도 알브라임 가문이 아그타스 가문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셨으니, 아그타스 가문이 어떻게 움직여도 개입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시오. 입 다물고 지켜보기만 할 테니.”
“알겠습니다.”
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셨다면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가주님한테 클린드 님의 뜻을 빨리 전달드려야 하니…….”
“오해 없도록 잘 전달해 주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리우스를 한 번 째려본 뒤, 파리엘이 정원 바깥으로 나갔다.
팽팽했던 긴장이 해소되었고,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벨리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이렇게 되면…….”
“네가 시리우스를 데려온 덕분에 얘기가 잘 풀렸구나, 벨리드.”
“네? 그, 그렇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는 벨리드를 내버려 둔 채 클린드가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혹시 다 알고서 이 타이밍에 찾아온 것이오?”
“그런 건 아닙니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알브라임 가문의 입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클린드가 미소를 지었다.
“시리우스, 이 성채를 보면 알겠지만…… 알브라임 가문은 기본적으로 수성(守城)을 추구하는 가문이오.”
“…….”
알브라임 가문의 본성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일대에서 그런 성벽이 필요할 정도의 싸움은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는데 말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벨리드에게 명령해 외곽의 요새까지 증축하고 있었다.
“대대로 내려져 온 영지를 지키는 것, 그것이 알브라임 가문을 이어받은 내 사명이오. 동부 전체를 지배한다든가, 중앙에 진출한다든가…… 그런 야심은 가져 본 적이 없소.”
“…….”
“리겔 가문과 아그타스 가문의 싸움? 마음대로 하시오. 알브라임 가문에 피해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겠소.”
이런 마음가짐이기에 클린드는 처음부터 아그타스 가문의 협력 요청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리우스의 방문이 반가웠던 것이다.
양쪽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는 척하면서 아그타스 가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우리 알브라임의 입장이오, 시리우스.”
“잘 알겠습니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저희 리겔 가문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는 체제에 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겠군요.”
“그렇소. 잘 알고 있군.”
현재 시리우스와 유스티아는 동북부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동북부에서 제일가는 힘을 지닌 알브라임 가문이 여기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곧 리겔 가문이 주도하는 새로운 체제를 용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시리우스가 아그타스 가문까지 제압하고 동부 전체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알브라임 가문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클린드에게 중요한 건 선조가 물려준 알브라임 가문을 지키는 거니까.
“시리우스, 한 가지 묻겠소.”
“네, 클린드 님.”
“아까 동부의 맹주가 될 거라고 했는데…… 진심으로 하는 얘기요?”
아까 파리엘 앞에서 했던 얘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통과점입니다.”
“통과점?”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으니까요.”
“…….”
천랑무제 백무랑은 다시 태어나면 새로운 무림맹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죽었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시리우스는 지금 이곳에 있다.
동부의 맹주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은…… 과거의 위세를 회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륙 5대 명가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뜻이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륙 5대 명가뿐만 아니라 모든 세력을 아우르면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려 합니다.”
“…….”
“그것이 제 목표입니다.”
클린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리우스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트베인 리겔이 사위 복이 있군. 부럽구나.”
이윽고 클린드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 자식은 어떤 인물을 배우자로 데려올지…… 쯧쯧.”
“아, 아버지?”
지켜보던 벨리드가 당혹스러워했다.
“벨리드, 명령을 내리겠다.”
“네?”
“너는 계속 요새에 머무르면서 시리우스 측과 자주 연락을 취하고, 그쪽에서 요청이 있을 경우 도움을 주도록 해라.”
“……!”
벨리드가 깜짝 놀라며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 방금 중립을 지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리겔 가문과 아그타스 가문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건 상관없지.”
이건 궤변이다.
리겔 가문에 도움을 주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간다.
하지만 클린드는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벨리드, 내가 보기에 시리우스는 매우 패도적인 인물이다.”
본인이 버젓이 눈앞에 있는데, 클린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리우스가 동부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우리 가문이 방해된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멸문하려 들 거다.”
“……!”
“하지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우리를 존중하고 우대해 주겠지. 어쩌면 우리를 지켜 줄지도 모른다.”
알브라임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클린드는 그 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리겔 가문과 아그타스 가문의 정면 대결이 멀지 않은 듯하다. 승리하는 쪽이 동부 지역의 맹주가 되겠지.”
“……!”
“나는 리겔 가문 쪽이 기대가 되는구나.”
클린드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시리우스를 지그시 쳐다봤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겠지만 알브라임 가문은 리겔 가문의 편에 서겠소.
클린드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과, 과연…….”
그때 벨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난세가 시작되는 거군요.”
“…….”
“알겠습니다.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 난세를 헤쳐 나가 보겠습니다.”
혼자 들뜨기 시작한 벨리드.
그 모습을 보면서 클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우스, 보다시피 많이 부족한 아들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어디 이상한 곳을 기웃거리다가 맞아 죽을 놈이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 줬으면 좋겠소.”
“…….”
“신경 써 줬으면 좋겠소.”
두 번이나 연속해서 말하는 클린드에게서 압박감을 느끼고, 시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리우스는 알브라임 가문을 떠났다.
벨리드가 배웅해 주려 했지만, 그냥 사양했다.
‘지금 시점에서 벨리드가 나를 따라다니면 아그타스 가문에서 의심할 테니까.’
시리우스는 바로 경공을 사용했다.
현재 내공으로 경공을 펼치면 천랑표국까지 채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빠르게 복귀한 시리우스였지만 도착하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아, 시리우스 님!”
회의실 안에 주요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천랑검단의 알레이온, 유테루스 가문의 팔테온, 그리고…… 유스티아까지.
“초대장이 왔어요.”
“초대장?”
유스티아가 시리우스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엔트로빌 6인회에서 보낸 초대장이에요. 천랑표국의 대표를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엔트로빌…….”
엔트로빌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큰 강을 끼고 있어 선박 운송이 활발하다.
엔트로빌 6인회는 그곳을 주름잡는 여섯 개 조직의 수장들이 모인 단체다.
“알레이온, 엔트로빌 6인회가 어떤 놈들이었지?”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놈들이지만…… 결국 그냥 평범한 흑회입니다.”
그동안 시리우스와 함께 주위 흑회들을 정리하고 다녔던 알레이온이 입을 열었다.
“발카인 길드와 비슷한 놈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엔트로빌의 상공업을 꽉 잡고 상당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그런 놈들을 아직까지 내버려 둔 건, 엔트로빌이 동북부 지역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뒤 마지막으로 엔트로빌을 제압할 예정이었다.
“그 엔트로빌 6인회가 먼저 천랑표국을 초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를 초대한 거죠.”
유스티아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랑표국의 대표가 직접 와 달라고 했으니까요.”
“…….”
천랑표국의 표국주…… 총책임자는 유스티아다.
유스티아를 직접 만나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싶다는 것이 편지의 내용이었다.
“천랑표국과 엔트로빌 6인회가 함께 힘을 합쳐 동북부의 발전을 도모하면 좋지 않겠는가…… 취지는 좋군.”
“편지만 그럴듯하게 썼지, 속마음은 시커먼 색일 겁니다.”
편지를 읽는 시리우스 앞에서 팔테온이 입을 열었다.
“유스티아 님이 엔트로빌로 찾아가면 그놈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저 같으면 유스티아 님을 납치해서 인질로 삼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나올 가능성이 높지.”
시리우스가 편지 내용을 다시 훑어보며 말했다.
“유스티아를 납치해서 아그타스 가문에 넘기면 몸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그타스 가문은 유스티아가 납치되어도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할 것이다.
아그타스 가문 같은 명문가가 그런 짓을 한다면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엔트로빌 6인회를 앞에 내세우면 문제 될 게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천랑표국과 엔트로빌 6인회의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이며 아그타스 가문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시치미를 떼면서 물밑에서 리겔 가문을 협박하면…… 리겔 가문과의 싸움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다.
“시리우스 님, 역시 그냥 무시하는 게 좋겠습니다.”
팔테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놈들도 유스티아 님이 순순히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이렇게 초대장을 보내서 우리의 반응을 본 뒤, 다음 수를 쓸 생각이겠죠.”
“그렇겠지.”
“아예 반응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답장을 보냈다가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팔테온이 유스티아를 쳐다봤다.
“어떠십니까, 유스티아 님.”
“답장을 보내는 것보다 그냥 무시하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하네요.”
유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우스, 그렇게 할까요?”
“흠…….”
시리우스는 편지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기껏 초대해 줬는데, 무시하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
“네?”
“엔트로빌 6인회도 결국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천랑표국이 나타나면서 시장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 테니 그쪽도 할 말이 많겠지.”
편지를 내려놓으면서,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대리로 가서 놈들과 대화를 나눠 보지.”
“……!”
시리우스가 대리로 간다.
그렇게 되면 평범한 대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나는 현재 천랑표국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부부는 일심동체…… 내가 유스티아를 대신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놈들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렇게 밀어붙이면 된다.”
시리우스는 그렇게 자신의 대처법을 정당화했지만…… 부하들이 실실 웃는 모습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방금 내가 했던 말 중에서 ‘일심동체’ 부분은 잊어라.”
“네엡, 알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
유스티아가 ‘왜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건가요.’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시리우스를 째려봤다.
시리우스는 그 시선을 피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답장이나 써서 보내.”
방침은 정해졌다.
이제 엔트로빌 6인회를 집결시키면 된다.
“천랑표국을 대표하는 사람을 보낼 테니 여섯 명 전부 모여 있으라고.”
그날이야말로, 엔트로빌 6인회가 해체되는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