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33화
33화. 이거 한 잔만 더 마시고
대륙 동북부를 다른 지역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엔트로빌 시(市).
커다란 강 옆에 조성된 대도시 한구석에 엔트로빌 6인회의 구성원들이 집결해 있었다.
‘일이 잘 풀릴지 모르겠군.’
자리에 앉아 있는 나머지 다섯 명을 보면서, 로디우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로디우스는 엔트로빌 선착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재력가로, 세 자리 숫자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여섯 명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인물이 바로 로디우스였다.
‘과연 리겔 가문의 막내딸이 이곳으로 올까?’
로디우스는 다시 한번 편지를 확인했다.
며칠 전에 도착한 답장에는 천랑표국의 대표가 직접 엔트로빌로 찾아오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리겔 가문은 우리처럼 근본 없는 놈들과는 달라.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물론 유스티아 리겔이 혼자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법사도 아닌 평범한 여자다.
자기 몸을 지켜 줄 수하들을 데리고 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도 오겠지.’
시리우스 카니스루트.
그 이름을 되새기면서, 로디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칼슈타인 검단, 발카인 길드, 오블레아 용병단…… 동북부의 쟁쟁한 흑회들이 시리우스 한 사람에게 당했다.
다른 중소 흑회들도 시리우스의 손에 해산되었다.
‘칼슈타인, 발카인, 오블레아…… 다들 엄청난 실력자였어.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으니 시리우스 역시 동급 이상이라는 건데.’
지금 이곳에 있는 여섯 명 중에 칼슈타인이나 발카인, 오블레아 수준의 실력을 지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섯 명이 협공한다면 그나마 승산이 있겠지만…… 위험한 일이야.’
협공해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몇 명은 목이 날아갈 것이다.
목숨을 부지한 사람도 팔다리 하나쯤은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러니 싸우는 일 없이 해결해야지.’
로디우스는 이미 계략을 준비해 뒀다.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의 수면약을 입수해 놓았다.
아무리 시리우스라고 해도 그 약을 먹고 잠들면 무력해진다.
‘유스티아가 오든, 시리우스가 같이 오든…… 잠재워 버린 뒤 처리하면 돼.’
만약 작전이 잘 진행되어 아그타스 가문과의 거래가 성공하게 된다면, 엔트로빌 6인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이권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위험이 크지만…… 어차피 우리에게는 이 길밖에 없어.’
그동안 시리우스는 동북부의 흑회 대부분을 쓸어버렸다.
이제 남은 세력은 엔트로빌 6인회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놈들이 엔트로빌 6인회를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다고 하더라도…… 발카인 길드처럼 실권을 빼앗긴 채, 리겔 가문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우리가 선수를 치는 거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었는데, 유스티아 일행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엔트로빌 6인회의 하위 조직 중에는 도로를 관리하면서 통행료를 받는 조직도 있다.
유스티아 일행이 나타나면 소식을 전해 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깜깜무소식이었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여섯 명이 모여서 준비를 마쳐 놓았다.
다들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유스티아도 시리우스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로디우스, 정말로 오기는 오는 건가?”
그때 참다못한 드레이더가 입을 열었다.
드레이더는 엔트로빌 6인회의 2인자로, 엔트로빌 유흥가의 지배자였다.
“어째서 아무런 소식도 없지?”
“으음, 일단…….”
로디우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혹시 지금 소식이 전해진 걸까.
로디우스가 기대감을 갖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대답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여기 있는 여섯 명 중, 저런 남자를 수하로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마……!”
“약속 시간보다 30분쯤 일찍 왔는데, 다들 빠르군.”
남자가 비어 있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천랑표국을 대표해서 온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다. 만나서 반갑군, 6인회 제군.”
“……!”
갑작스러운 등장에 엔트로빌 6인회 전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약속일이 되자 시리우스는 혼자서 엔트로빌로 출발했다.
엔트로빌 6인회의 수하들이 길목에서 통행료를 받고 있었지만 시리우스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경공을 사용해 산과 들을 뛰어넘으며, 최단 거리로 엔트로빌까지 왔기 때문이다.
“아, 아니 어떻게…….”
로디우스를 비롯한 엔트로빌 6인회의 구성원들은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사전에 정보를 전달받았기에 시리우스는 그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내가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거였나?”
“…….”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랑표국의 대표를 초청한 건 너희들일 텐데.”
“우, 우리가 천랑표국의 대표자를 부르긴 했지만…….”
6인회의 2인자, 드레이더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유스티아 리겔이 와야지…… 왜 너 혼자 온 거지?”
“유스티아가 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시리우스는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그러니 지금 나는 천랑표국의 표국주와 동등한 권한을 지닌다. 나하고 얘기하면 유스티아하고 얘기한 것하고 똑같으니 아무 문제 없어.”
“……!”
그렇게 말하고, 시리우스는 덧붙였다.
“딱히 부부가 일심동체여서 내가 온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
“아무튼.”
시리우스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너희들이 불러서 온 건데…… 별로 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군. 좀 섭섭한데.”
“미, 미안하군.”
로디우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설마 시리우스 당신 혼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잠시 당황한 거네.”
“그, 그래.”
드레이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편지에 적었듯이, 우리는 천랑표국과 힘을 합쳐 동북부 전체를 발전시키고 싶네. 알고 있겠지만 동북부는 상당히 낙후된 곳이어서 말이야.”
“그래, 흑회 놈들이 힘없는 민초를 쥐어짜고 있기 때문이지.”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 있는 여섯 명 모두, 힘없는 민초를 쥐어짜는 흑회 놈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크, 크흠, 견해의 차이가 좀 있는 것 같군.”
헛기침을 하며 로디우스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방문 바깥에서 사람이 들어와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탁자 위에 차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인식 차이를 좁혀 보면 어떻겠나? 그러다 보면 친분도 쌓이겠지.”
“친분이라, 좋지.”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앞에 놓인 음료수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시니 감귤류의 상큼한 맛이 느껴졌다.
“무슨 음료지?”
“레몬즙에 탄산수를 섞고 설탕을 넣었지. 중앙 지역에서 유행하는 음료야.”
“중앙 지역이라.”
시리우스는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로디우스를 비롯한 여섯 명 모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군. 이 음료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어.”
“그, 그건 다행이군.”
로디우스가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러면…… 사업 얘기를 좀 해 볼까? 천랑표국 쪽에서는 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딱히 우리는 사람들을 쥐어짜서 이득을 올리고 있는 게 아니야.”
“그, 그래, 대륙 평균을 생각하면 적정 수준이지.”
“나는 최근의 목재 시세에 관해서도 천랑표국에 의견을 말하고 싶군.”
여섯 명이 제각각 떠들어 대며 시리우스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말없이 음료수만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내가 먼저 얘기하지. 요즘 천랑표국에서 대폭으로 낮춘 수송료 말인데…….”
로디우스가 진지하게 사업 관련 얘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시리우스는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미안하지만 얘기해 봤자 알아듣지 못한다.”
“뭐……?”
“그런 실무적인 부분은 유스티아 표국주나 에디스 총관에게 맡기고 있으니까. 나를 상대로 숫자를 들먹이며 교섭하려고 해 봤자 아무 의미 없어.”
“아니, 그러면…….”
다들 방금 전에 시리우스가 던져 준 위임장에 시선을 향했다.
“그러면 위임장에 무슨 의미가…….”
“나는 천랑표국의 표국주 대리로서, 너희들에게 제안을 하러 온 거다.”
“제안?”
시리우스가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첫째, 엔트로빌 6인회는 모든 산하 조직을 해체한다.”
“뭐, 뭣……!”
“둘째, 엔트로빌 6인회는 수하들과 함께 전원 천랑표국 밑으로 들어온다. 셋째, 앞으로 있을 아그타스 가문과의 분쟁에서…….”
“자, 잠깐!”
로디우스가 시리우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는 대화를 하자고 천랑표국을 부른 건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어차피 너희도 처음부터 대화할 생각은 없었을 텐데.”
“뭐라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긴 하지만 전부 시간 벌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그럴듯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벌려 할 것이라고, 시리우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들.”
시리우스는 음료수를 전부 들이마셨다.
청량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겨우 이 정도 독에 당할 줄 알았나?”
“……!?”
천랑무제 백무랑은 웬만한 독은 스스로 진기를 운용해 해독할 수 있었다.
그건 시리우스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디우스! 맛도 없고 향도 없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라더니……!”
성질이 다급한 드레이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로디우스가 그 경솔한 행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커억!”
쐐애액!
시리우스가 집어 던진 흉기가 드레이더의 목을 꿰뚫었다.
테이블에 올려 있던 포크였다.
“으, 어어…….”
신음 소리를 내면서 드레이더가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말석의 거한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감히 드레이더 형님을…… 억!”
빠르게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시리우스가 두 번째 포크를 던지는 게 훨씬 빨랐다.
그도 똑같이 목을 꿰뚫려 절명했다.
“……!”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이 죽은 것이다.
“6인회가 4인회가 되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리우스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디우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로디우스는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시리우스는 그저 로디우스의 음료수 잔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잘 생각해 봐라, 머저리 같은 놈들아.”
“…….”
“너희는 칼슈타인이나 발카인, 오블레아보다 못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니 여섯 명이 뭉칠 수밖에 없는 거지.”
로디우스의 음료수를 빼앗아 마시면서, 시리우스가 말했다.
“너희 같은 놈들은 이제 내가 나설 필요도 없다. 알레이온한테 명령해서 천랑검단을 움직이는 걸로 충분해. 천랑검단도 다른 흑회 조직원들을 흡수해 몸집이 커졌으니까.”
“…….”
“그럼에도 내가 직접 나서서 너희를 상대하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 묻고 시리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시리우스가 대답을 기다린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로디우스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천랑검단한테 너희를 처리하라고 하면 이곳 엔트로빌은 피로 물들게 될 거다.”
“…….”
“로디우스, 네 부하 중 절반은 평소 선착장에서 짐을 나르는 인부라고 하더군. 그런 놈들이 너를 지키겠다고 우르르 몰려나오면 천랑검단은 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다.”
시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를 잡겠다고 너희 수하들까지 모조리 척살하면 엔트로빌의 도시 기능까지 죽게 된다. 그런 도시를 접수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아그타스 가문에 내주고 말지…….”
“…….”
“그러니 나 혼자 온 거다. 너희들과 직접 담판하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음료수 잔을 치켜들었다.
“그러니 선택해라.”
“…….”
“천랑표국 밑으로 들어와서 갱생하든가, 아니면 엔트로빌 6인회의 자존심을 지키고 여기서 죽든가.”
갱생이냐, 죽음이냐.
시리우스는 그들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이거 한 잔만 더 마시고, 너희 대답을 듣겠다.”
음료수를 마시는 시리우스를 보면서, 6인회에서 4인회가 되어 버린 그들이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