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34화
34화. 어떻게 대처할 것이오?
“이미 얘기는 들었겠지만 천랑표국 밑으로 들어오면 지금처럼 상납금이나 보호비 같은 걸 마음대로 뜯어 가지는 못할 거다.”
레몬 음료수를 홀짝이면서 시리우스는 말을 이어 갔다.
“천랑표국은 현재 화물 운송을 주력으로 하고 있지만 원래 표국이라는 건 물건도 지키고 사람도 지키는 것이다. 규모가 커지면 창고도 관리하고 점포도 관리하고 선착장도 관리하게 되겠지. 결국 너희들이 하던 업무를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
“단, 모든 요금은 표국에서 결정한 대로 받아야 한다. 바가지를 씌우는 것도 안 되고, 여러 조직이 이중, 삼중으로 돈을 뜯어 가는 것도 안 된다. 돈이 오갈 때는 반드시 영수증을 발행해서 상부에 올려야 하지.”
침을 삼키는 엔트로빌 6인회의 네 사람 앞에서, 시리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상당히 빡빡할 거다. 유스티아는 유테루스 가문 놈들이 회계에 장난질을 치는 걸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돈 갖고 장난치는 걸 용납하지 않아.”
“…….”
“하지만…… 그런 체제가 계속해서 유지되면 엔트로빌은 ‘장사하기 좋은 동네’로 소문나게 되겠지.”
장사하기 좋은 동네로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 모여들어 상업이 활성화된다.
자연스레 다른 산업도 발전할 수밖에 없다.
“10년 지나서 너희 장부를 확인해 보면 생각보다 손해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시, 시리우스 님.”
로디우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반말을 썼지만, 지금은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리겔 가문은 결국 동북부를 경제적으로 장악하려는 겁니까? 천랑표국을 내세워서?”
“잘 이해했군.”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북부만 해도 크고 작은 가문들이 수십 개다. 그들 모두를 멸문시키고 리겔 가문이 동북부 전체를 직접 통치하는 건 불가능해. 그럴 만한 인력도 없고 말이다.”
“그, 그렇지요.”
“하지만 천랑표국을 통해 동북부의 상공업을 장악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너희 흑회들을 규합하면 되는 거니까.”
동북부의 상공업을 흑회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리우스가 그 흑회들을 때려잡고 천랑표국에 복종시키면 동북부의 상공업을 리겔 가문의 뜻대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동북부 전체를 지배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동북부의 중소 가문들은 시리우스가 있는 리겔 가문에 반기를 들지 못한다.
시리우스와 천랑표국이 만드는 새로운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규모를 키운 천랑표국이…… 대륙 각지에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
“……!”
로디우스가 숨을 삼켰다.
리겔 가문에서 단순히 동북부를 장악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걸 이해한 것이다.
“슬슬 배가 출발한다, 로디우스.”
“시, 시리우스 님…….”
“올라타든 말든, 너희 자유다.”
여기서 배에 올라타면 너희는 천랑표국의 일원으로서 대륙을 누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의 발언을 한 뒤, 시리우스가 음료수 잔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시리우스가 음료수를 다 마셨다는 걸 깨닫고, 네 사람 전부 숨을 삼켰다.
“상큼하고 달콤해서 좋은데, 너무 많이 먹으면 트림이 나올 것 같군.”
음료수의 감상을 입에 담은 뒤, 시리우스는 눈앞에 있는 네 사람을 쓱 훑어봤다.
“그러면…… 슬슬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시리우스에 의해 목이 달아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시리우스가 늘어놓는 말에 솔깃해진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로디우스가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한 뒤, 대표로 고개를 숙였다.
“엔트로빌 6인회를 해체하고…… 수하들과 함께 천랑표국 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걸로 끝인가?”
“그, 그동안 저희가 쌓아 온 재물도 천랑표국에 관리를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또…….”
“아니, 그게 아니고.”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지. 아그타스 가문과의 분쟁에서 너희들이 전면에 나서 줘야 한다고.”
“네?”
“아, 생각해 보니 너희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끝까지 말을 못 했군.”
기억을 되새기면서 시리우스는 말을 이어 갔다.
“로디우스, 너희는 유스티아를 납치해서 아그타스 가문에 넘길 생각이었을 거다.”
“그, 그건…….”
“시치미 뗄 필요 없다. 인제 와서 그 부분을 질책할 생각은 없으니까.”
“네, 죄송합니다…….”
로디우스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에 관해서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군. 아그타스 가문에서 너희에게 먼저 제안을 한 건가?”
“아, 저희한테 제안이 들어온 건 맞는데…… 아그타스 가문에서 직접 우리한테 접촉한 건 아닙니다.”
“중개인이 있었나?”
“네, 최대한 은밀히 처리해야 하니까요.”
아그타스 가문에서 리겔 가문의 막내딸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는다는 건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스티아가 납치당해도 아그타스 가문은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라고 시치미를 뗄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상관없지.”
“네?”
“로디우스, 네 이름을 걸고 문서 하나 작성해 줬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나머지 셋도 다 서명을 해 줬으면 좋겠군.”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리우스 님, 무슨 문서를…….”
“아그타스 가문에서 너희에게 유스티아 납치를 의뢰했다고 증언하는 문서.”
“……!”
이것이야말로, 시리우스가 직접 찾아와 엔트로빌 6인회를 굴복시킨 또 하나의 이유였다.
“중개인의 존재는 그냥 생략하고, 아그타스 가문이 의뢰한 거라고 적으면 돼.”
“시, 시리우스 님, 그래 봤자 아그타스 가문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발뺌할 텐데…….”
“그건 당연하지.”
중개인을 사이에 둔 것도 결국은 발뺌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폭로를 한다고 해서 그들이 순순히 인정할 리 없다.
하지만.
“이건 여론전을 위한 거다.”
“여론전이요?”
“너희 흑회 놈들은 이득 되는 일이 있으면 부리나케 달려가지만, 명문가 녀석들은 일단 명분을 갖춘 다음에 움직이지.”
시리우스는 손가락을 깍지 끼며 말했다.
“우리가 선수를 치는 거다.”
* * *
동부 지역에는 커다란 강이 흐른다.
그 강이 동북부와 동남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다.
동북부는 지형이나 치안 등의 문제로 낙후된 지역이지만 인구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고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다.
동남부의 최대 세력인 아그타스 가문은 때가 되면 동북부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동부 전체를 장악한 뒤, 몰락한 리겔 가문을 대신하여 5대 명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 한 것이다.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아그타스 가문의 가주, 카이엔 아그타스는 지도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도에는 동북부의 주요 세력이 전부 표시되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X 표시가 되어 있는 상태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등장하면서 발생한 변화였다.
‘리겔 가문이 되살아나고 있어. 이 이상 세력이 커지기 전에 동북부를 쳐야 한다.’
동북부의 강호인 알브라임 가문에서는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알브라임 가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동북부에서 아그타스 가문의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는 없다.
오히려 동북부 바깥이 문제다.
‘리겔 가문은 여전히 대륙 5대 명가다. 다짜고짜 리겔 가문을 공격하면 아그타스 가문은 전 대륙의 지탄을 받겠지.’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유테루스 가문도 이것 때문에 리겔 가문을 집어삼키지 못했다.
만약 유테루스 가문이 무력으로 리겔 가문을 병합했다면 아그타스 가문이 나서서 유테루스 가문을 단죄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그타스 가문이 충분한 명분 없이 리겔 가문을 공격한다면 다른 가문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이름 없는 중소 가문도 아니고, 전통 있는 대륙 5대 명가의 일각이니까.
“슈레이드.”
카이엔은 고개를 돌렸다.
실내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미 다 확인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칼슈타인 스승님이 남겨 주신 인맥을 통해 다 확인을 마쳤습니다.
슈레이드.
그는 동북부의 대표 흑회였던 칼슈타인 검단 출신이었다.
칼슈타인의 차석 제자로, 주로 외부 활동을 전담했다.
몇 달 전, 칼슈타인은 슈레이드를 연맹에 파견했다.
연맹이 칼슈타인 검단을 인정해 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레이드가 돌아오기 전에 칼슈타인은 죽었고, 칼슈타인 검단은 천랑검단이 되었다.
순식간에 슈레이드가 돌아갈 곳이 없어졌고, 그는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결국 아그타스 가문에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다.
“유테루스 가문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한테도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리우스는 천랑검단의 우두머리 ‘천랑’과 동일 인물이 맞습니다. 그리고…….”
슈레이드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랑은 자신이 연맹에서 파견된 사람이라 떠들어 대고 있지만, 실제로는 연맹과 아무 관계 없는 인물입니다.”
“확실한가?”
“네, 연맹 관계자를 통해 확인이 끝났습니다. 연맹은 최근 동북부에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슈레이드의 대답을 듣고, 카이엔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큰일이군.”
“네, 큰일이지요.”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가 거대 흑회 조직의 우두머리이고…… 게다가 연맹에서 파견된 사람이라 사칭하고 다니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카이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재 동북부에는 시리우스 때문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고 하지. 하지만 지금 동북부에서 시리우스의 폭주를 제지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우리 아그타스 가문이 나서는 수밖에.”
이걸로 명분은 갖춰졌다.
두 얼굴의 악당 시리우스를 처단하고, 동북부의 질서를 회복한다.
이 명분을 내세우면 아그타스 가문의 동북부 점령을 정당화할 수 있다.
아그타스 가문이 정정당당하게 동부 전체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자네도 스승의 복수를 할 수 있겠지.”
“네, 카이엔 님.”
고개를 끄덕인 뒤, 슈레이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의외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엔트로빌 6인회 얘기인가?”
“네, 맞습니다.”
얼마 전, 슈레이드는 엔트로빌 6인회에 접촉했다.
유스티아 리겔을 납치하여 달라는 의뢰를 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별로 기대되지 않는군. 그런 흑회 나부랭이들이 유스티아 리겔을 납치할 수 있을까?”
“그런 흑회 나부랭이들이니까, 리겔 가문 측도 방심하겠지요. 잘하면 유스티아뿐만 아니라 시리우스까지 걸려들 수도 있습니다.”
“흐음…….”
“연맹 관계자를 통해 입수한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의 수면약을 건네줬습니다. 그걸 입에 댄다면 아무리 시리우스라고 해도 무력해지겠죠.”
“연맹의 독왕(毒王)이 만든 약물이라 했던가? 소문대로의 효과였으면 좋겠군.”
흑회 우두머리인 시리우스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흑회와 작당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세상에 알려지면 손가락질당할 일이지만 카이엔은 별로 우려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이 음모가 드러나더라도, 엔트로빌 6인회나 슈레이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꼬리 자르기를 하면 되니까.
“슈레이드, 이제 곧 다른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도착할 거야. 내가 그들에게 설명할 테니 자네도 증언을 해 주게.”
“물론입니다, 카이엔 님.”
오늘 카이엔은 여러 가문을 불러들여 동북부 진출의 정당성을 설파할 예정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명분을 얻은 뒤, 가능하다면 그들에게서 병력이나 물자까지 지원받을 생각이었다.
“카이엔, 오랜만이구려.”
“바깥에서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봤는데, 여전히 위세가 대단하군.”
이윽고 여러 가문의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가주가 직접 찾아온 가문도 있었고, 대리인을 보낸 가문도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카이엔 공, 잠깐 괜찮겠소?”
“왜 그러시오?”
동남부의 중견 가문인 마이우 가문의 가주가 카이엔에게 다가왔다.
남부 스테판 가문에서 파견된 대리인과 함께였다.
“이번에 우리 쪽에 이런 문서가 흘러들어 왔소. 스테판 가문도 같은 문서를 입수했다는군.”
“문서?”
“문서랄까, 고발장이라고 할까.”
“고발장이라니……?”
카이엔은 인상을 찡그리며 종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천천히…….
“아그타스 가문에서 엔트로빌 6인회에 의뢰하여 유스티아 리겔을 납치하려 했다는 내용이요. 카이엔, 이 내용이 사실이오?”
“……!”
문서는 아그타스 가문을 강하게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비겁한 음모를 꾸민 아그타스 가문은 이제 더 이상 명문가라 할 수 없으며,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가주 카이엔은 스스로 자결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말미에는 엔트로빌 6인회의 서명과 함께 ‘이 모든 내용이 진실임을 보장함.’이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터, 터무니없군. 이건 모함이오.”
카이엔은 문서를 찢어 버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회 놈들이 리겔 가문과 결탁하여 우리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거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는 것이오?”
“우리도 이 내용을 믿고 싶지 않소, 카이엔.”
마이우 가문의 가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강을 따라서 이 문서가 퍼지고 있는 모양이오.”
“강을 따라서?”
“엔트로빌 6인회는 수운(水運)을 전문으로 하는 놈들 아니오? 그놈들이 강을 따라 물건을 실어 나르면서 이 문서를 퍼뜨리고 다니는 것 같소.”
“뭐, 뭣……!”
마이우 가문도, 스테판 가문도, 영지 한가운데에 강이 흐르고 있다.
배를 타고 도착한 엔트로빌 6인회의 수하들이 이 괴문서를 뿌리고 간 것이다.
“가만 내버려 두면 대륙 전체의 물길을 따라 이 문서가 퍼질 거요. 카이엔, 어떻게 대처할 것이오?”
“……!”
평범한 입소문하고는 다르다.
강줄기를 따라 대륙 구석구석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아그타스 가문하고 아무런 교류가 없는 가문한테도 소문이 퍼질 텐데…… 그들한테 일일이 해명을 할 수 있을까?
“이게 고약한 것은, 상대가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라는 점이오.”
“그게 왜…….”
“카이엔, 잊었소?”
마이우 가문의 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는 자기 아내를 건드리는 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애처가(愛妻家)로 유명하오.”
“……!”
“그 엄청난 애처가가 이번에는 어떻게 보복에 나설지…… 대륙의 호사가들이 관심을 기울일 거란 말이오.”
그들은 이 문서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 따위는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시리우스가 어떻게 아그타스 가문에 보복할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뿐이다.
지금 당장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흥미롭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여론전에서 이미 뒤처졌소. 카이엔, 어떻게 대처할 것이오?”
“…….”
카이엔은 입술을 깨문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