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42화
42화. 야채를 많이 먹어야
“일반인들은 발레리온 아그타스가 그냥 스스로 은퇴한 줄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다음 목적지로 향하면서, 벨리드가 설명을 했다.
“대륙 5대 명가에서 압력을 넣었지. 아마 리겔 가문도 동참했을 거야.”
“그래, 유스티아도 그렇게 말하더군.”
시리우스가 아그타스 가문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던 건 유스티아에게 미리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발레리온이 너무 위험한 인물이라, 이대로 계속 가주 노릇을 하게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던데.”
“그렇지. 사령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거든.”
“사령 마법이라…….”
사령 마법은 죽은 사람을 활용하는 마법이라고 한다.
시체나 해골을 움직이게 해서 병사로 쓸 수도 있다고 한다.
동부에서 손꼽히는 명가인 아그타스 가문에서 그런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니, 대륙 5대 명가에서도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도 순리를 거스르는 힘을 추구하는 놈들이 있단 말이지…….”
“……?”
천마신교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인 혈교(血敎)에서도 혈강시(血殭屍)라는 것을 만들었다.
백무랑이 혈교 토벌전에 나섰을 때도 혈강시들 때문에 꽤 고생을 했었다.
“어쨌든, 발레리온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가주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어. 발레리온은 8서클의 마도사였지만 대륙 5대 명가를 한꺼번에 적으로 돌리면 살아남을 수 없었거든.”
“…….”
“그 이후 이십여 년 동안 발레리온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어. 카이엔이 가주 노릇을 잘했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도 발레리온을 잊어버렸지. 아예 죽은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벨리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발레리온이 죽었으면 아그타스 가문에서 장례식을 치렀을 테고…… 아마 어딘가에 숨어서 사령 마법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겠지. 대대적으로는 못 하고, 조용히 말이야.”
“…….”
“아버지가 지난번에 말씀하셨어. 아그타스 가문이 위기에 몰리면 발레리온이 다시 나타날 수 있으니 그때는 몸을 사리라고 말이야.”
벨리드의 아버지인 클린드 알브라임도 발레리온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발레리온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여간 시리우스…… 너는 그 발레리온과도 싸울 생각이야?”
“물론이지.”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순리를 거스르는 힘을 쓰는 놈을 굳이 살려 둘 필요는 없으니까.”
“정말 자신만만하네…….”
벨리드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발레리온은 7서클도 아니고 8서클이야. 게다가 이십여 년 동안 마법 실력을 갈고닦았을 거라고. 네 고유 마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벨리드.”
“왜?”
“만약에 발레리온이 나보다 더 강하다고 치자.”
시리우스가 말했다.
“그럼 나하고 발레리온이 싸우면 10할 확률로 내가 죽는 거냐?”
“그건…….”
“그러면 나는 발레리온을 마주치면 그냥 자결하는 게 낫겠군. 열심히 싸워 봤자 피곤하기만 하고 말이야.”
“…….”
“벨리드,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나타났다고 해서 무조건 뒤로 물러설 생각만 하지 마라.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목에 칼을 찌르면 죽는다.”
옆에 있던 알레이온이 몸을 움찔했다.
방금 얘기는 예전에 시리우스가 알레이온한테 했던 말과 비슷했다.
“발레리온이 나보다 훨씬 강해서, 100번 싸우면 99번 패배할 실력 차이가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건 100번 싸우면 한 번은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지.”
“아…….”
“그렇다면 발레리온과 내가 실제로 맞붙는 상황을 그 한 번으로 만들면 되는 거야.”
“……!”
벨리드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실전에서 그 한 번의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 어떤 게 있지? 치밀한 작전을 세우는 건가?”
“그런 것뿐만이 아니야. 예를 들어…….”
시리우스는 벨리드가 허리에 차고 있는 목검으로 시선을 향했다.
얼마 전에 흑회들과 싸울 때 부러져서 새로 교체해 준 목검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철저한 연습을 해 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
“……!”
숨을 삼키는 벨리드를 내버려 둔 채 시리우스는 전방으로 시선을 향했다.
“벨리드, 강적이 나타났다고 해서 뒷걸음치지 마라.”
“시리우스…….”
“실전에서 한 번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적이 상대여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거니까.”
옆에 있던 알레이온도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드는 말없이 시리우스가 해 준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듯했다.
“저쪽에 산적들이 있는 것 같군. 토벌하고 간다.”
“알겠습니다, 단주님.”
“조, 좋아!”
산길에 숨어 있는 산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시리우스는 거침없이 전진했다.
이제 이 산을 넘으면…… 아그타스 가문의 본성(本城)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 * *
“그런 상황입니다, 카이엔 님…….”
“…….”
카이엔 아그타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눈앞에는 울텐슈바인 총회의 2인자인 발드웨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발드웨인은 큰 부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시리우스 그놈이 저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지나가는 마을마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도록…….”
마차에 실려 가는 발드웨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로 울텐슈바인 총회가 멸망한 거구나.
이제는 울텐슈바인 총회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가주님, 이미 소문이 쫙 퍼진 상태입니다.”
측근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리우스가 울텐슈바인 총회를 비롯한 많은 흑회들을 박살 내고 다닌다고 말입니다.”
“…….”
“민중들 사이에서 시리우스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시리우스가 자기들 마을에 방문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카이엔이 입술을 깨물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구나.”
로브를 뒤집어쓴 채 뒷짐 지고 서 있던 노인.
선대 가주…… 발레리온 아그타스였다.
“녀석의 의도가 눈에 보이는군.”
“아버지, 시리우스가 무슨 의도인지 아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발레리온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 여기저기에 우리를 비방하는 괴문서를 뿌리고 있다면서?”
“네, 맞습니다.”
“결국 여론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발레리온은 카이엔의 얼굴을 손가락질했다.
“카이엔 아그타스는 흑회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몰래 비겁한 음모나 꾸미던 쓰레기.”
“네……?”
“한편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는 동남부 사람들을 괴롭히던 흑회들을 순식간에 토벌해 준 영웅 중의 영웅.”
“……!”
얼굴이 빨개지는 카이엔을 보면서, 발레리온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게다가 시리우스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가정적인 인물이기도 하지. 다들 시리우스 같은 사람이 동남부를 다스려 주는 걸 바랄 거다.”
“아, 아버지……!”
“멍청한 녀석, 너는 완전히 시리우스의 전략에 말려든 거다.”
시리우스의 노림수를 제대로 이해한 건 발레리온이 처음이었다.
“이제 시리우스가 여기로 쳐들어와서 너를 척살해도, 동남부의 민중들은 박수를 보낼 거다. 그리고 시리우스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하겠지.”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황당한…….”
“지금까지 시리우스가 한 짓 중에 황당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
“…….”
“네 머리를 완전히 뛰어넘은 놈이다. 그냥 받아들여라.”
침묵하는 아들을 보면서 발레리온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시리우스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건가?”
“추적하고 있긴 합니다만…… 고작 세 명이서 움직이는 거고, 워낙 신출귀몰해서…….”
“쯧쯧, 쓸모없는 것들.”
혀를 찬 뒤 발레리온이 발드웨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발드웨인이라고 했나? 너는 놈들의 얼굴을 기억하겠지?”
“무, 물론입니다. 세 놈 전부 기억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발드웨인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보, 복수할 기회를 주신다고요?”
“그럴 생각이 없나?”
“아, 아닙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어르신.”
발드웨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그래, 무슨 짓이든…….”
바로 그때.
발레리온이 손에 들고 있는 금속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리고…… 시커먼 그림자가 바닥을 휩쓸었다.
“컥……!”
발드웨인이 몸을 비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팔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온몸을 비틀면서 난동을 부렸다.
“아, 아버지 무슨 짓을……!”
“가만히 지켜봐라.”
발드웨인의 육체가 점점 변화했다.
곳곳에서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절단되어 있던 오른쪽 손목에서도 새로운 살이 돋아났다.
그리고 점점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 끔찍한 외형을 지닌 마수(魔獸)가 되었다.
“아버지! 불사병뿐만 아니라 이런 괴물까지 만드시면……!”
발레리온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마수로 변해 버린 발드웨인을 향해, 사냥개한테 하듯이 말을 걸었다.
“놈들을 추적해라. 네 두뇌는 놈들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르르르…….”
마수가 코를 벌름거리면서 으르렁댔다.
하지만 발레리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음……?”
“아버지, 왜 그러시죠?”
“이 반응을 보니…… 놈들, 의외로 가까운 곳에…….”
네 다리로 바닥을 기면서, 마수가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가주님, 방금 들어온 소식입…… 으악!”
“무, 문을 닫아라!”
뛰어 들어온 부하가 마수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아버지의 마법 생물이다! 신경 쓰지 말고 보고부터 해!”
“아, 알겠습니다. 사실…….”
부하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아래쪽 시가지에 와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카이엔은 다급히 아버지를 쳐다봤다.
이건 예상 못했는지 발레리온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 *
아그타스 가문의 본성은 이중 구조다.
일단 넓은 범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있고, 그 안에 민간인들이 사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중심에는 요새화된 성관(城館)이 존재하는데, 그곳이 바로 아그타스 가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시리우스는 당당하게 성문으로 들어와, 시가지에서 민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시리우스 님?”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사람이 울텐슈바인을 척살했다고?”
“엄청난 미남이셔! 아아, 결혼만 안 하셨어도……!”
지금 시리우스는 시장의 노상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리우스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울텐슈바인 총회를 하루 만에 괴멸시켰다는 게 사실입니까?”
“나인부르크 연합을 해산시킨 것도 시리우스 님 맞으신가요?”
“하하, 제가 차근차근 설명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에 대답해 준 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리드였다.
“여러분들이 들으신 소문은 전부 사실입니다! 여기 있는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수많은 흑회들을 쳐부수며 동남부의 평화를 가져다줬죠!”
“오오……!”
“자세한 얘기가 듣고 싶으시죠?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벨리드 알브라임! 알브라임 가문의 둘째 아들로서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식사도 안 하고 길거리에 서서 일장 연설을 시작한 벨리드를 보면서, 알레이온이 투덜거렸다.
“어째서 벨리드 저 녀석이 유세를 떠는 겁니까?”
“내버려 둬.”
시리우스는 포크로 고기를 찍어 먹으며 대꾸했다.
“저런 게 적성에 맞는 모양이니까.”
벨리드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잘난 척을 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시리우스도 민중들 상대로 여론몰이를 하고 싶었으니 벨리드를 앞에 내세우면 딱 알맞다.
“그래서 제가 나인부르크 연합의 우두머리를 이 목검으로 단번에 쓰러뜨렸죠……!”
“오오……!”
벨리드가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면서, 알레이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풍이 섞여 있는데요?”
“흠…….”
시리우스는 벨리드의 접시에서 고기를 하나 가져갔다.
“알레이온, 너도 한 점 가져가라.”
“네?”
“저 녀석이 허풍을 떨 때마다 하나씩 가져가는 걸로 하자.”
“좋습니다.”
벨리드는 시리우스의 활약을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활약을 한 번씩 과장되게 표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리우스와 알레이온이 고기를 한 점씩 가져갔다.
“후우, 배고프군. 잠시만요. 한입만 먹고 얘기를 다시…….”
한참 떠들어 대던 벨리드가 식사를 하려 했지만 자기 접시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야채밖에 없지?”
“여기, 음식이 맛있군.”
“그러게 말입니다, 단주님.”
시리우스와 알레이온은 입을 닦으며 시치미를 뗐다.
“벨리드, 다 식었다. 어서 먹어.”
“응, 그런데 시리우스, 내 요리에 야채밖에…….”
“투정하지 말고 먹어라. 야채를 많이 먹어야 건강해지니까.”
“알레이온, 네가 뭔데 나한테 잔소리를…….”
벨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포크를 들었을 때.
사람들을 헤치고 병사들이 접근해 왔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 님, 맞으십니까?”
“…….”
시리우스는 대답 없이 그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거리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주님이 시리우스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성관으로 모시겠습니다.”
“…….”
시리우스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가자.”
“어? 나 아직 야채도 못 먹…….”
벨리드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알레이온이 뒤통수를 때려서 일어서게 했다.
“안내해라. 안 그래도 가주님과 이 지역의 현안에 관해서 논의하고 싶었으니까.”
“…….”
당당한 태도로 말하는 시리우스를 보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