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43화
43화. 무덤 속으로 처넣어 주마
아그타스 가문의 성관(城館)은 본래 일반적인 저택이었다.
하지만 카이엔의 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개축해서 지금처럼 방어 시설을 갖춘 성관이 되었다.
알브라임 가문보다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그타스 가문의 위세가 그대로 느껴졌다.
“분위기가 살벌하군요, 단주님.”
“이,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 건가?”
알레이온과 벨리드가 우려를 드러냈다.
무장한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기하고 있는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건, 흑회 조직원들이 우글대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긴장되는 법이다.
“알레이온, 벨리드,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그타스 가문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우리들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다짜고짜 죽이려 들까?”
“네?”
“그건…….”
아무 감정 없는 놈이나 바로바로 죽일 수 있는 거지…… 정말로 미운 놈은 그렇게 급하게 죽여 버리지 않는다.
“하다못해 직접 얼굴을 보고 욕이라도 한 다음에 죽이려 들 거야.”
“으음…….”
“결국 죽이려 든다는 거잖아…….”
벨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놈들이 덤벼들면 내 목검 솜씨로…… 윽.”
헛소리를 하던 벨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전방에서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이봐, 지금…….”
“단주님…….”
벨리드와 알레이온까지 느낄 정도다.
전방에 심상치 않은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
시리우스는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러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만나서 반갑군, 시리우스 카니스루트…….”
의자에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중후한 느낌을 주는 외모를 지녔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내가 아그타스 가문의 가주, 카이엔 아그타스다.”
“…….”
하지만 시리우스의 시선은 카이엔이 아니라 그 옆으로 향했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일부 노출되어 있는 맨살을 보면 나이가 많은 노인 같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흉흉한 기운은…… 저 노인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군, 카이엔 아그타스.”
시리우스는 다시 카이엔을 쳐다봤다.
말을 높이지 않는 시리우스의 모습이 카이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리우스.”
“그런가? 나는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만.”
“뭐라고?”
“당신하고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크흠…….”
헛기침을 하는 카이엔을 보면서, 시리우스가 말했다.
“카이엔, 그쪽에서는 무슨 용무가 있어서 나를 부른 거지?”
“우리 쪽 말인가?”
“용무가 있어서 부른 걸 텐데.”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뒤를 돌아봤다.
지금 문이 닫혀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바깥에는 병사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다.
“설마 우리를 죽여 버리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말이다.”
“그건…….”
카이엔이 입술을 깨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당연히 용무는 있다.”
“어떤 거지?”
“네가 최근에 이 일대에서 저지른 일들에 관해서다.”
카이엔은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시리우스, 너는 그동안 많은 민간 조직들을 학살하고 다녔다고 하더군. 아그타스 가문의 세력권 안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
“말을 바로 했으면 좋겠군, 카이엔.”
시리우스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민간 조직이 아니라 흑회겠지. 강도, 살인, 인신매매……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쓰레기들이었다.”
“크흠, 그건…….”
“그리고 너희 아그타스 가문은 그 쓰레기들을 제대로 청소하지 않고 있었지.”
“……!”
카이엔이 몸을 움찔했다.
“이미 흑회 관계자들에게서 증언을 들었다. 너희 아그타스 가문은 놈들에게 뇌물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군.”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명문가인 우리 아그타스가 그런 더러운 돈을 왜 받느냔 말이다!”
물론 시리우스가 들었던 얘기는 아그타스 가문의 아랫사람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카이엔이 결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발을 위해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 그러면 너희는 뇌물도 안 받았는데 흑회 놈들의 만행을 묵인해 주고 있었던 건가?”
“뭐, 뭐라고?”
“기가 막힌 얘기다. 돈을 받고 눈감아 준 거라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돈도 안 받았는데 봐주고 있었다니…… 혹시 마음속으로 흑회를 동경하고 있었던 거냐?”
“시리우스……!”
카이엔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동남부는 동북부와 사정이 다르다! 땅이 넓고 인구도 많아! 흑회들을 일일이 잡으러 다닐 수 없단 말이다!”
“핑계 대지 마라. 의지가 없었을 뿐이겠지.”
“무슨……!”
“실제로 나는 흑회들을 일일이 잡고 다녔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다! 제대로 된 근절은 될 수 없어!”
“카이엔, 변명하지 마라.”
시리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너희는 그냥 흑회들을 묵인했을 뿐이다. 아그타스 가문의 지배 체제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굳이 힘을 쓰고 싶지 않았던 거다.”
“무슨……!”
“실제로 아그타스 가문으로 오는 물자를 습격했던 산적들은 철저히 토벌하지 않았나? 너희는 아그타스 가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흑회들만 토벌하고, 다른 흑회들은 그냥 방치했어.”
“으음…….”
“너희 가문은 병력이 많다. 치안이 안 좋은 곳을 정기적으로 순찰시키면서 흑회들을 견제하면 그것만으로도 놈들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어. 하지만 너희는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지.”
큰 세력을 지닌 울텐슈바인도 아그타스 가문과 직접 충돌하는 걸 꺼렸다.
아그타스 가문이 제대로 나선다면 흑회들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었다.
“너희 머릿속에 있는 건 동부 전체를 장악하고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뿐이었지. 그러니까 흑회 토벌 따위에 병력을 동원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시리우스, 말을 함부로…….”
“카이엔, 명문가라면 흑회들의 위협에서 민중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윽…….”
“너는 대륙 5대 명가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 하지만 어린애까지 인신매매하는 조직들을 방치하던 주제에…… ‘명예로운 가문’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
의자 팔걸이를 붙잡은 카이엔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리우스, 네가 감히……!”
“카이엔 님, 잠깐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카이엔의 말을 끊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벨리드였다.
“벨리드 알브라임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뻐, 뻔뻔하기는…… 중립을 지킨다고 했으면서 시리우스에게 붙은 주제에!”
“아니, 그건…….”
벨리드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카이엔 님, 저는 이번에 동남부를 둘러보면서 놀랐습니다. 이곳은 저희 알브라임 가문이 관할하는 지역과 비교하면 너무 치안이 나쁘더군요.”
“뭐, 뭐라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합니다. 낙후된 동북부에 비하면 도시도 크고 시장도 활발하더군요. 하지만 조금만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머리채를 붙잡히고 끌려다니는 여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칼에 찔리고 지갑을 빼앗기는 광경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
“물론 가문 전체를 책임지는 가주님이 그런 곳까지 들여다보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런 곳을 관리하는 건 아랫사람들이겠죠. 하지만 카이엔 님에게 책임이 없는 건 아닙니다.”
벨리드의 발언은 상당히 조리 있었다.
시리우스처럼 도발적인 말투도 아니어서, 카이엔은 화를 내는 것도 어려웠다.
“으음…….”
카이엔은 신음했다.
오늘 카이엔은 시리우스와의 싸움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진행되고 있는 건 피 튀기는 싸움이 아니라 아그타스 가문 체제에 대한 규탄이었다.
“카이엔 님, 아그타스 가문이 진정으로 명예로운 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대륙의 여러 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힘을 기르는 것보다, 관할 지역 내의 민중들을 챙기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으으음…….”
카이엔 입장에서 더욱 답답한 건, 시리우스와 벨리드의 발언에도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동부 전체를 장악하려 하는 아그타스 가문의 적이니까.
게다가…….
“끌끌끌…….”
바로 그때.
카이엔의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한심하구나, 카이엔.”
“아, 아버지.”
“저런 놈들의 궤변에 휘둘리다니, 멍청한 녀석.”
카이엔의 아버지 발레리온 아그타스가 입을 열었다.
“벨리드라고 했나? 클린드 알브라임이 아들놈을 잘못 키운 모양이군.”
“뭐, 뭐라고요?”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는 천민들의 목숨까지 왜 우리가 신경 써야 되는 거냐. 그놈들을 보호해 줘 봤자 이득 볼 게 하나도 없는데.”
“하, 하지만 민중을 보호하는 건 명가의 의무입니다!”
“그런 의무 따위는 없다, 벨리드. 그냥 고상한 척하고 싶어 하는 가문들이 멋대로 그렇게 떠들고 다닐 뿐이지.”
발레리온의 발언에 벨리드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아그타스 가문의 명예는…….”
“명예? 당연히 중요하지. 하지만 그건 뒷골목에 굴러다니는 천한 놈들을 지킨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무슨…….”
“가문의 명예라는 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룩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발레리온이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리겔 가문도 먼 옛날 큰 위업을 달성하였기에 대륙 5대 명가로 꼽히게 된 것이다. 그 명예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거지.”
“…….”
“우리 아그타스 가문도 그런 위업을 달성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뭐, 나하고 내 아들이 추구하는 건 서로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카이엔은 동부 전체를 장악하여 대륙 5대 명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꿈이다.
하지만 발레리온이 지향하는 건 카이엔과 달랐다.
“그런 의미에서…… 시리우스.”
“뭐지?”
“우리 가문의 위업을 위해, 네가 협력을 해 줬으면 좋겠다.”
“협력이라.”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엇을 원하지?”
“너는 매우 특수한 고유 마법을 쓰는 것 같더군. 그동안의 정보를 종합해 보니 인간의 육체에 작용하는 고유 마법으로 보인다.”
“…….”
“본래 고유 마법은 9서클이나 되어서야 추구할 수 있는 것…… 네가 벌써 9서클에 도달했을 리는 없고, 어디서 고대의 고유 마법을 입수했겠지.”
음침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발레리온이 손을 치켜 들었다.
“그걸 연구하고 싶으니…… 네 몸을 내놓도록 해라.”
바로 그때.
발레리온의 뒤편에 있던 장막에서 괴물이 뛰쳐나왔다.
네발짐승 같은 외모였는데, 가죽이 없고 온몸에서 근육이 튀어나와 있었다.
“시리, 우스……!”
괴물의 목소리를 듣고, 알레이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단주님! 발드웨인의 목소리입니다!”
“뭐? 설마 저 괴물이 그놈이라는 거야?”
당황하며 벨리드가 뒷걸음쳤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내공을 끌어 올리면서,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치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늑대처럼, 그 목을 쳤다.
“저건, 낭교인(狼咬刃)!”
자신에게 가르쳐 줬던 흑영탈명검법의 기술이 펼쳐진 걸 알아보고 알레이온이 탄성을 질렀다.
평범한 칼이라면 목을 베지 못했겠지만 시리우스의 칼날에는 이미 백랑의 공력이 담겨 있었다.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워진 검기가 괴물의 머리를 정확히 떨어뜨렸다.
“끄윽…….”
머리와 몸이 분리된 괴물이 땅을 굴렀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던 것인지 시체 같은 냄새가 났다.
“하하, 훌륭하구나!”
발레리온이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그러자 장막에서 새로운 괴물들이 출현했다.
뼈다귀만 없는데 저절로 움직이는 해골 병사…… 불사병이었다.
“아, 아버지!”
“물러서 있거라, 카이엔!”
카이엔에게 호통을 치면서, 발레리온이 두 손을 치켜들었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의 고유 마법이 어떤 것인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하고 싶…… 윽!”
그때 발레리온이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졌다.
시리우스가 날린 비수가 발레리온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네놈……!”
“역시 그랬군.”
북명의 공력으로 비수를 회수하면서, 시리우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느낌이 영 안 좋다 했는데, 송장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던 건가.”
발레리온의 얼굴은 반쯤 문드러져 있었다.
마치 썩어 가는 시체 같은 얼굴이었다.
“사령 마법을 익히면 그렇게 되는 건가? 아니면 억지로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나?”
“시리우스, 네놈……!”
발레리온이 고함을 지르자 불사병들이 일제히 앞으로 뛰쳐나왔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지만 시리우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들이군.”
시리우스는 내공을 끌어 올리면서 차갑게 내뱉었다.
“전부 다 무덤 속으로 처넣어 주마.”
물론 발레리온도 포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