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명가의 절대무신-45화 (45/129)

몰락명가의 절대무신 45화

45화. 깨끗이 승복하는 거다

만약 시야가 확보되어 있었다면 발레리온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우스가 정신을 못 차리도록 암흑 마법을 연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레리온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리우스가 검을 날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피할 수 없었다.

“컥……!”

푸욱!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검이 발레리온의 복부를 관통했다.

출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발레리온은 이미 절반쯤은 시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반은 살아 있는 몸이다.

격통에 휩싸인 발레리온은 비행 마법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

추락한다.

그 사실을 깨닫고 발레리온은 다급히 술식을 구성했다.

8서클의 마도사인 발레리온은 일일이 손을 치켜들지 않아도 술식을 전개할 수 있다.

덕분에 땅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비수.

그것이 발레리온의 목에 꽂혔다.

“욱……!”

그러나 이건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이걸로 숨이 끊어졌겠지만 발레리온은 절반쯤 시체였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버틸 수 있었다.

“흥……!”

발레리온은 비수를 뽑아서 멀리 던져 버렸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리우스는 무기가 없다. 아무리 시리우스가 강하다고 해도, 맨손으로 암흑 마법에 대항할 수는 없을 터.

어리석은 놈. 그렇게 생각하며 발레리온은 술식을 전개했다.

“죽어라……!”

남아 있는 마력을 모조리 전개했다.

암흑 마법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주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발레리온에게 제일 중요한 건 시리우스를 제압하는 것이었으니까.

힘없는 이들에게는 악몽처럼 느껴질 거대한 암흑이 주위를 뒤덮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

시리우스가 암흑을 뚫고 솟구쳤다.

경악하는 발레리온을 내려다보며 시리우스가 공중에서 손을 움직였다.

백랑의 공력이 분출되면서,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새하얀 냉기가 암흑 마법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그 확산을 막았다.

시리우스의 기파(氣波)가 발레리온의 암흑 마법을 압도한 것이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발레리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리우스……!”

발레리온은 다급히 마력을 수습했다.

시리우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여러 겹으로 중첩된 암흑의 방패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손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암흑의 방패를 모조리 찢어 버렸다.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리우스는 발레리온의 마법을 돌파할 힘을 갖고 있었다.

“이 애송이가……!”

절망을 느끼면서 발레리온은 오른손을 치켜 들었다.

마지막 발악으로, 시리우스에게 사령 마법의 사악한 기운을 주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의미했다.

시리우스는 발레리온의 손목을 낚아챈 뒤 백랑의 공력을 주입했다.

“허억……!”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

100년 넘게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감각이다. 발레리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 시리, 시리우스…….”

발레리온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혀, 협상을 하자.”

“협상?”

“너, 너는 확실히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이미 발레리온은 팔뿐만 아니라 몸통까지 얼어붙고 있었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발레리온이 마지막 목숨 구걸을 했다.

“네가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내가, 너를 지도해 주마.”

“…….”

시리우스한테는 코웃음만 나는 얘기였다.

발레리온은 시리우스를 어쩌다가 대단한 힘을 얻은 애송이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이미 무(武)의 절정에 도달했던 경험이 있기에 발레리온의 지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카, 카이엔도 내 말이라면 잘 들을 것이다. 아그타스 가문 전체가 너를 도울 거다. 너를 동부 지역 전체의 지배자로 만들어 주마.”

발레리온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손목을 붙잡은 채 계속 백랑의 공력을 흘려보냈을 뿐이다.

“대륙 5대 명가 정도는 짓밟아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될 거다. 그러니, 그러니…….”

차가운 시리우스의 시선 앞에서, 발레리온이 절규했다.

“그러니…… 이걸 제발 멈춰다오……!”

그걸로 끝이었다.

발레리온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계속해서 주입된 냉기에 발레리온의 전신이 얼어붙었다.

반쯤 썩어 있던 머리통까지.

시리우스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북명의 공력으로 전환한 뒤, 발레리온의 가슴을 강타했다.

얼음이 깨지듯이 산산조각 나는 발레리온의 체내에서, 8서클 마도사의 마력이 유출되었다.

거대한 흑색 바다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북명의 공력 속으로, 얼어붙은 마력이 녹아 들어갔다.

“…….”

산산조각 난 발레리온의 시체를 내버려 둔 채 시리우스는 주위를 둘러봤다.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그타스 가문의 성관은 발레리온이 무차별적으로 난사한 암흑 마법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휘말려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시리우스가 발레리온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커, 커험!”

그때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벨리드가 몸을 일으켰다.

불사병들과 싸우느라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이성을 잃고 폭주한 사령술사 발레리온을,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쓰러뜨렸다! 이제 다들 안심해도 된다!”

“오오……!”

벨리드가 재빠르게 ‘상황 요약’을 해 준 덕분에 아그타스 가문 사람들도 뒤늦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시리우스 덕분에 자신들도 목숨을 건진 거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시리우스는 아그타스 가문을 위협하던 동북부의 무법자가 아니라…… 악독한 선대 가주의 폭주에서 사람들을 지켜 준 구원자가 되어 있었다.

“…….”

그 분위기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그타스 가문의 가주이자…… 발레리온의 아들인 카이엔이었다.

“카이엔 아그타스.”

“……!”

시리우스는 카이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하고 말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전하겠다면 받아들이겠다.”

“……!”

“지금 당장이 어렵다면 내일이어도 좋고, 모레여도 좋다. 기다려 주지.”

이 남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카이엔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혼자서 덤벼도 좋고, 수하를 데리고 와도 좋다. 나는 혼자서 싸우겠다.”

“혼자서……?”

“다른 녀석들은 부상을 입은 상태라서 말이다.”

사람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고 있는 벨리드는 꽤 부상을 입은 상태다.

그 근처에서 주저앉아 있는 알레이온도 상처가 많았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동부 지역의 진정한 맹주를 가리기 위한 것이어도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건 최소한으로 하고, 그냥 우리들끼리 결정하지.”

“시, 시리우스…….”

“그리고, 결과에는 깨끗이 승복하는 거다.”

그 말을 듣고.

카이엔은 비로소 깨달았다.

시리우스는 결국 이것을 위해 지금까지 움직여 왔던 것이다.

그동안 여론전을 펼쳤던 것도, 여기까지 쳐들어온 것도, 발레리온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던 것도…… 전부 지금 이 상황을 위해서다.

카이엔에게 패배를 인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허허…….”

카이엔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버지에게서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이래, 이십여 년 동안 동남부 지역에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

그렇기에 자신이 큰 인물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카이엔은 자신의 진짜 그릇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청년에 비하면…… 자신은 정말로 왜소한 인물이었다.

“…….”

시리우스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카이엔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아니, 이렇게 시간을 들이지 않고 그냥 카이엔을 찾아와 암살해도 됐다.

실제로 시리우스는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죽이지 않더라도, 혼쭐을 내서 강제로 항복을 받아 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카이엔의 아들인 파리엘을 인질로 협박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떤 식으로든 아그타스 가문을 강제로 복종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그타스 가문은 그냥 지방의 중소 가문하고는 다르다. 고만고만한 흑회하고도 다르다.

강제로 굴복시켜 봤자 진심으로 승복한 상태가 아니라면 오히려 훗날의 위협이 된다.

그래서 시리우스는 카이엔이 진심으로 승복하기를 바랐다.

만약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카이엔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시리우스도 미련 없이 카이엔의 목을 날리고 아그타스 가문을 멸망시킬 것이다.

시리우스가 선택권을 줬으니…… 카이엔도 답을 해야 했다.

“시리우스.”

카이엔은 시리우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까 시리우스가 동남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아그타스 가문을 비난하던 것을 떠올렸다.

가문 사람들이 휘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을 날리던 아버지를 막아 줬던 것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들은 잘 치료 받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해 줬던 것도 떠올렸다.

“동부 지역 전체의 맹주를 맡아 주시오. 아그타스 가문은 당신의 뜻에 따르겠소.”

그렇게 말하고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동남부 최강의 가문이었던 아그타스 가문이,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 시리우스 카니스루트에게 진심으로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 * *

시리우스는 카이엔과 함께 앞으로의 사항을 얘기했다.

카이엔은 시리우스가 아그타스 가문에 원하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 놀랐다.

“정말 그것뿐이오?”

아그타스 가문의 병력을 각지에 투입하여 치안 강화에 전력을 다할 것.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시리우스와 연계하여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출 것.

요약하자면 이 정도였다.

“성의를 보여 주고 싶다면 엔트로빌에 자금 지원을 좀 해 줬으면 좋겠군요. 파리엘이 습격했을 때 선착장 시설이 좀 손상되었으니까.”

“…….”

시리우스는 딱히 아그타스 가문을 정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앞으로 이 세계에 만들어 나갈 진정한 무림맹에 아그타스 가문이 참여하도록 만들면 그걸로 족하다.

아그타스 가문을 멸망시키고 리겔 가문이 그 땅을 차지해 버린다?

시리우스가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계에 무림맹이 아니라 천마신교를 만들려 했을 것이다.

“카이엔, 조만간 흑회들 위에 군림하는 ‘연맹’에서 움직일 겁니다.”

“……!”

“놈들에게 대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울텐슈바인 등이 경고했듯이, 연맹은 동부 지역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대응하려면 이쪽도 여러 세력이 참가하는 연맹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

“어떤 것이오?”

“빙백화라는 약초를 찾고 있는 중인데, 도무지 구할 수 없더군요. 아그타스 가문에서도 한번 수소문해 주십시오.”

“흠,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아랫사람들에게 얘기해 두겠소.”

“고맙군요.”

시리우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카이엔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한 전투광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시리우스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시리우스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에 불과할 텐데도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애송이 같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부탁할 건 이 정도일 것 같고…… 조만간 리겔 가문에서도 사람이 올 테니 그쪽과도 협의해 주십시오.”

동부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기 위해서는, 리겔 가문과 아그타스 가문 사이의 우호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면 시리우스보다는 리겔 가문 직계 사람들이 와서 얘기하는 게 낫다.

“그렇다면…… 루트베인 님이 오시는 건가?”

“글쎄요, 그건 그쪽에서 결정하겠죠. 유스티아가 대신 올 수도 있고.”

지금쯤 유스티아의 언니도 리겔 가문에 도착했을 테니 함께 올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그 남편들까지 함께 나타날지도 모른다.

“유스티아 양이라…….”

카이엔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소문은 많이 들었소.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면서 외모도 매우 아름다운 재색겸비 그 자체라고…….”

“자, 잠깐만요, 카이엔 님.”

바로 그때.

회의에 동석하고 있던 벨리드가 다급히 카이엔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런 얘기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자기 아내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거라고 시리우스가 오해할 수 있단 말입니다.”

“앗! 이런 실수를……!”

카이엔이 당황하면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시리우스가 아내를 탐내는 놈들을 모조리 척살해 왔다는 소문은 카이엔도 잘 알고 있었다.

“시, 시리우스, 오해 마시오. 나는 평생 여자라고는 아내 한 사람만을 사랑해 온 남자요. 그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건 결코 아니니 노여워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소.”

“…….”

시리우스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쓸데없는 소리를 한 벨리드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