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48화
48화. 뒤통수를 칠 수 없는 상태로
“정말로…… 대단한 분이시군요.”
베르디안은 시리우스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연맹 가입을 거절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맹이 먼저 자기 밑으로 기어들어 와야 한다고 말하다니.
“본인이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안 될 게 있나?”
“시리우스, 당신은 연맹이 어떤 조직인지 잘 모르셔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시리우스의 태연한 반응에 베르디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맹은 매우 큰 힘을 지닌 조직입니다. 변방에 해당되는 동부 지역에서 몇 번 승리를 거뒀다고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연맹의 힘이라면 동부 지역 정도는 하루아침에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참 큰일이군.”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힘을 가진 조직이 있다니, 그릇된 길을 걷지 않도록 잘 이끌어 줘야겠어.”
“…….”
베르디안은 할 말을 잃었지만 이건 시리우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무림에 있던 시절, 천마신교와 흑사련이 저지른 만행들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과대망상 환자일 줄은 몰랐군요. 제 실수입니다.”
베르디안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연맹에 들어올 생각이 없다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하지만…… 그렇다면 곤란하군요.”
베르디안은 줄곧 들고 있던 부채를 폈다.
그리고 가면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던 얼굴 아랫부분까지 전부 가렸다.
“당신이 그런 입장이라면…… 저도 당신을 살려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하다 생각하나?”
“안 될 게 있나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베르디안이 피식 웃었다.
“8서클 마도사인 발레리안을 쓰러뜨렸다고 해서 너무 자만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너는 9서클인가 보지?”
“…….”
베르디안이 멈칫했다.
“제가 독왕 전하도 아니고…… 9서클일 리가 있겠습니까.”
“독왕은 9서클인 모양이군.”
“그렇지요. 9서클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는데 ‘왕’을 자처하면 부끄럽지 않을까요?”
“검제도 9서클이라던데, 연맹의 수뇌부는 전부 9서클인 건가?”
비교적 변방이라고 하나, 동부 지역에는 8서클의 발레리안이 가장 높은 경지였다.
연맹에 9서클 마법사가 여러 명 소속되어 있다면, 베르디안의 호언장담대로 동부쯤은 하루아침에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어느 정도 수준이지?”
“글쎄요. 굳이 알려 드릴 필요는 없죠.”
“내가 보기에 7서클 정도인데.”
“…….”
베르디안이 입을 다물었다.
시리우스의 예측이 정확했던 것이다.
시리우스가 이걸 알아낼 수 있었던 건, 기(氣)를 뻗어 베르디안의 서클을 살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도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내공을 파악하곤 했다.
지금까지는 내공이 부족해서 불가능했지만, 이번에 2갑자에 도달하면서 가능해졌다.
“대단하군. 그 나이에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다니, 무슨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 건가?”
“…….”
7서클이면 중견 세력의 우두머리 수준이다.
지금까지 시리우스가 만난 7서클 마도사 중에 베르디안처럼 젊은 사람은 없었다.
“아니면 겉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나이가 매우 많은 건가?”
“아무래도…… 죽이는 것보다는 생포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베르디안이 딱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독왕 전하에게 데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 건지, 독왕 전하라면 정확히 알아내실 수 있겠죠.”
“나도 독왕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이야.”
만약 베르디안이 젊은 나이에도 7서클 마력을 확보한 게 사실이라면, 영약 같은 걸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마력을 증진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왕은 마력을 인위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는 약물을 알고 있을 터.
영약을 원하고 있는 시리우스로서는 독왕의 지식이 필요했다.
“당신에게 질문할 권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베르디안이 다시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멈칫했다.
“……?”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대충 알겠군.”
“네?”
“부채에서 퍼뜨리는 가루 자체는 무해(無害)하지만, 마법적인 자극을 가하는 것으로 독성을 갖게 만드는 건가.”
“……!”
베르디안이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시리우스와 대화를 나누는 척하면서 독을 뿌리고 있었다는 걸 들켜 버렸고…… 어떤 원리인지조차 간파당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예전에도 봤던 수법이어서 말이다.”
무림에 있었을 때의 얘기다.
천마신교의 독마(毒魔)가 이런 수법을 개발했다.
평소에는 아무런 독이 없지만, 공력을 불어넣으면 독성을 띠게 되는 약을 만들어 계략을 꾸몄다.
“그리고 말이다, 베르디안.”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이겠다고 떠들어 대면서, 나한테 덤벼들지는 않고 부채만 살랑거리고 있는데…… 노림수가 너무 뻔한 게 아닌가?”
“……!”
쿵!
시리우스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베르디안도 다급히 몸을 날렸다.
움직임이 제법 날렵했다.
아까 시리우스가 던진 비수를 붙잡은 것만 봐도, 평범한 인간보다는 훨씬 뛰어난 육체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독이 전혀 통하지 않는 건가.
베르디안은 다급히 부채를 크게 흔들었다.
그러자 새로운 독약이 주위에 퍼졌다.
아까 뿌렸던 건 무색무취의, 은밀성을 추구한 약물이라 효과가 약했다.
하지만 지금 살포한 황색 가루는 살상력이 강한 독약이다.
아무리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고 해도, 이걸 들이마셨다간 금방 피를 토하고 쓰러질 터…….
“상당히 독하군.”
“……!”
하지만 시리우스는 멀쩡했다.
원래 천랑무제 백무랑은 독살(毒殺)에 대비해 진기로 독을 정화하는 무공을 익혔다.
무형지독처럼 해독 불가능한 독을 제외하면 천마신교 독마의 독공조차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웬만한 독은 2갑자 내공으로도 정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도, 굳이 이걸 들이마실 필요는 없겠지. 눈도 따갑고.”
“……!”
파앗!
시리우스가 크게 팔을 휘두르자 바람이 불어 황색 가루가 모조리 날아갔다.
베르디안은 경악하면서 숲속으로 도망쳤지만, 시리우스가 추격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윽……!”
베르디안이 부채를 휘둘러 시리우스의 추격을 막으려 했다.
이 부채는 독왕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무기로서도 매우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베르디안 자신도 이 부채를 활용한 근접전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웬만한 마법검사 정도는 부채 하나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다.
쉬익!
마력이 전개된 부채가 바람을 갈랐다.
끝부분이 날카롭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제대로 닿기만 하면 시리우스를 피투성이로 만들 수 있다.
“……!”
하지만 시리우스는 짧은 비수 하나로 베르디안의 부채를 막아냈다.
베르디안은 다급히 부채를 회전시켜 다음 공격에 나섰지만, 시리우스는 가볍게 비수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베르디안의 공격을 전부 봉쇄했다.
“윽……!”
베르디안은 이를 악물면서 부채를 흔들었다.
그러자 여러 색깔의 가루가 주위에 퍼지면서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리우스한테 독이 안 통하는 건 이미 파악했다. 이건 시리우스의 시야를 교란시키려는 의도였다.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약물이 모조리 허공에 흩뿌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시리우스를 뿌리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악……!”
쿵!
황색 가루를 뚫고, 시리우스의 발차기가 베르디안의 몸통을 직격했다.
그 충격에 베르디안은 붕 떠올라 나무에 부딪혔다.
바닥에 엎어져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베르디안 위로, 시리우스가 날아들었다.
“윽……!”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금나수(擒拿手)의 수법으로 베르디안의 팔다리를 완전히 제압했다.
“으윽……!”
베르디안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격통이 느껴졌다.
이래서는 마법도 쓸 수 없다. 부채도 아까 떨어뜨렸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베르디안, 아까 나를 죽이지 않고 생포하겠다고 말했었지.”
“크윽…….”
“그러면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연맹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으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베르디안은 입안에 숨겨 두었던 독약을 깨물려 했다.
포로가 될 것 같으면 자결하라고 독왕이 넣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손가락이 입안으로 파고드는 게 더 빨랐다.
“어째 사고방식이 다 똑같은지 모르겠군.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베르디안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시리우스가 입안에서 독약을 빼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는데, 그렇게 쉽게 죽음을 택하면 안 되는 거다.”
“윽…….”
베르디안은 이미 가면이 벗겨진 상태였다.
그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시리우스의 예상보다 훨씬 앳됐다.
“베르디안,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내가, 대답할 리가…….”
“울텐슈바인 총회 같은 놈들이 어린애를 납치해 어디론가 팔아먹고 있더군.”
“……!”
시리우스가 울텐슈바인 총회와 하부 조직들을 무자비하게 섬멸한 건, 그들이 어린애까지 인신매매하던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카이엔 아그타스와 함께 인신매매에 관여한 다른 조직들을 잡고 있는데, 어디로 끌려간 건지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
“설마 너희 연맹으로 흘러 들어간 거냐?”
베르디안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 반응에 시리우스는 탄식했다.
“연맹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시리우스는 무림의 천마신교를 떠올렸다.
놈들은 어린애를 붙잡아 가서 자기들 병사로 만들기도 하고, 연구 재료로 희생시키기도 했다.
연맹에서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면 천마신교와 같은 대우를 해 주면 될 것이다.
“당신에게 연맹의 정보를 넘겨줄 생각은 없습니다.”
시리우스에게 제압당한 채 베르디안이 힘겹게 말했다.
“독왕 전하의 직속 제자로서, 그런 짓을 할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멍청한 놈, 그건 그냥 세뇌다.”
시리우스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무림에서도 정보를 토해 낼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스스로 믿는 바를 위해 그렇게 결단한 놈과, 어렸을 때 납치당해 세뇌 교육을 받았을 뿐인 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저를 살려 두고 설득하겠다는 소리인가요? 마음을 고쳐먹게?”
베르디안이 피식 웃었다.
“소용없습니다. 자비를 베풀겠다고 저를 살려 두면 반드시 당신의 뒤통수를 칠 테니까요.”
“걱정 안 해도 된다.”
딱히 자비를 베풀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의 좌측 등에 손을 댔다.
손바닥 노궁(勞宮)혈의 위치를 유의하면서, 베르디안의 상체에 존재하는 서클을 감지했다.
“뒤통수를 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줄 테니까.”
“무슨 소리를…… 아악!”
천랑신공의 첫 번째 단계, 북명의 공력.
넓은 북쪽 바다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힘이, 베르디안의 7서클 마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