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56화
56화. 중심을 잡아 줘야 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 결혼했으면 2세 계획을 궁금해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제부, 어떻게 생각하지?”
“음…….”
레티시아의 추궁을 받으면서, 시리우스는 시선을 돌렸다.
“그건 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는 무슨 자연스럽게야. 지금처럼 밖으로 싸돌아다니는데 애가 생기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경악스러운 거지.”
이건 레티시아의 지적이 너무 날카로웠다.
시리우스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애초에 시리우스와 유스티아는 동침한 적조차 없다.
신혼 첫날밤, 다시 태어난 시리우스가 침실에서 뛰쳐나간 이후 계속 각방을 썼으니까.
“제부뿐만이 아니야. 유스티아도 천랑표국이니 뭐니 하는 걸 운영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잖아.”
“언니, 리겔 가문과 동부 지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에요.”
“그런데 그걸 왜 네가 하는데? 리겔 가문의 막내딸이 왜 그런 일을 해?”
“그건…….”
“아, 오해하지 마. 아버지가 허락하신 일이기도 하고, 강제로 그만두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내 마음에 안 들 뿐이야.”
레티시아가 그렇게 딱 잘라 말하자 유스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투덜거리는 거라면 유스티아가 아무리 논리적인 반박을 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말이야, 너희는 신혼부부야. 서로 좀 붙어 있어야지. 이러다가 사이가 멀어지면 어쩌려고? 만약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한테 한눈이라도 팔면?”
“…….”
“나는 제부가 엄청난 애처가라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 사이가 매우 양호한 줄 알았어.”
손사래를 치면서 레티시아가 떠들어 댔다.
“근데 직접 보니까, 두 사람 분위기가 아주 냉랭하더라고?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네는 일도 없고 말이야. 무슨 가짜 부부인 줄 알았다니까?”
놀랍게도…… 레티시아는 시리우스와 유스티아의 관계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제부, 어떻게 생각해? 할 말 있어?”
“그건…… 저희 성격이 원래 그렇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지만, 속으로는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
수하들이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버럭 했을 텐데…… 아내의 언니한테까지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대답이 왜 그래? 확실히 말 못 하는 거야?”
“…….”
“제부, 유스티아를 사랑하는 게 맞긴 한 거야?”
이 사람, 생각보다 엄청나게 날카로운 인물 아닐까.
시리우스가 곤혼스러워 하자 결국 유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언니, 알겠어요. 언니 말이 다 맞아요.”
“유스티아, 나는 지금 네 남편하고…….”
“언니 말 참고해서 저희도 노력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며 유스티아가 레티시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야, 내 얘기 아직 안 끝났거든? 인생의 선배로서 너희들한테 할 얘기가…….”
“언니.”
유스티아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방해된다고요.”
“방해?”
“시리우스가 밤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 보면 몰라요?”
“…….”
레티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아, 아아……!”
그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아아, 그런 거니? 나도 참, 눈치가 없었네.”
“…….”
“그래, 알겠어. 그런 거면 방해하면 안 되지.”
레티시아가 후다닥 방문 쪽으로 향했다.
“좋은 시간 되렴.”
“…….”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한 뒤, 레티시아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된 숙소 안에서, 유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언니는 원래 저런 사람이라서.”
“아니,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지.”
시리우스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레티시아가 리겔 가문의 주도권 문제를 들먹이며 덤벼들었다면 시리우스도 당당하게 맞서 싸웠겠지만…… 이런 걸로 따지고 들면 대답하는 게 쉽지 않다.
“나야말로 미안하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미리 말을 맞춰 놓는 게 좋겠네요.”
하지만 지금 당장 이 부분을 논의할 생각은 두 사람 다 없었다.
레티시아의 오지랖에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유스티아.”
그래서 시리우스는 본래 하려고 했던 얘기를 꺼냈다.
“조만간 여러 가문이 참가하는 치안 유지 부대를 창단할 생각이야.”
“카이엔 님한테서 들었어요.”
유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전체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합동 부대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이죠.”
“그래, 그게 만들어지면 동부 지역 전체가 안정되겠지.”
시리우스는 동부의 주요 흑회 조직을 무너뜨리고 연맹 동부 지부까지 괴멸시켰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동부가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경쟁자가 없어진 틈을 타서 세력을 키우려는 놈들이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올 것이다.
그런 놈들까지 시리우스가 일일이 잡으러 다닐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번에 새로 현무위단을 창단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리겔 가문에서 중심을 잡아 줘야 해.”
“…….”
“아그타스 가문이나 알브라임 가문으로는 동부의 구심점이 될 수 없으니까.”
시리우스 개인의 무력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리겔 가문의 힘은 아직 보잘것없다.
아그타스 가문은 물론이고 알브라임 가문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리겔 가문에는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라는 이름값이 있다.
그 이름을 내세우면서 동부의 대표로 삼으면 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명 같은 걸 발표하면 좋겠군요.”
유스티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그타스 가문의 카이엔 님이나 알브라임 가문의 클린드 님도 성명문에 이름을 올리게 하면 더 좋을 테고요.”
“그래, 그런 부분은 당신에게 맡기지.”
새로운 무림맹에 ‘원로원’이 설치된다면 이런 인물들이 원로원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동부를 안정시키고…… 이제부터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연맹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이야.”
“연맹…….”
유스티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리우스, 연맹은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조직이에요. 당신이 동부 지부를 무너뜨리긴 했지만, 함부로 대적해서는 안 되는 세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내가 동부 지부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놈들과 대적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야.”
“…….”
“어차피 놈들도 한동안은 탐색전일 거야. 지금 당장 나를 잡기 위해 9서클의 실력자를 파견하지는 않을 테니 우리도 천천히 준비하면 돼.”
베르디안을 거둬들인 것도 그 일환이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긴 하지만, 그 태도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군요.”
유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죠? 연맹 동부 지부도 다 해치워 버렸다면서요?”
“남부 쪽을 알아볼 생각이야.”
“남부 지역이요?”
남부 지역.
이름 그대로 대륙 남쪽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날씨가 따뜻하다.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다.
“노이엔 마이우를 족치면서 알아낸 건데, 연맹의 세력이 가장 강한 게 남부 지역이라더군.”
“아……!”
“그러니, 직접 부딪혀 보면서 조사할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고, 시리우스는 덧붙였다.
“남부 연합에도 접촉해 보고 싶고 말이야.”
“……!”
남부 연합은 남부의 여러 가문의 동맹이다.
레티시아가 시집간 레티우드 가문도 그 일원이다.
시리우스가 동부 지역을 안정시켰으니…… 동부 지역의 대표로서 남부 연합과 직접 대화할 자격이 있다.
“시리우스, 설마 스트라우스 가문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인가요?”
스트라우스 가문.
남부 연합에서도 수장 역할을 하고 있는, 남부 최고의 명문가다.
리겔 가문과 마찬가지로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리겔 가문과는 달리 스트라우스 가문은 전혀 몰락하지 않은 상태지만 말이다.
“스트라우스 가문의 가주는 9서클이라고 하더군. 연맹과 싸울 때 도움을 줄 수 있겠지.”
* * *
밤늦게까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한 뒤,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의 숙소에서 나왔다.
레티시아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굳이 유스티아와 밤을 보낼 필요는 없다.
유스티아도 생각할 게 많을 테고, 혼자서 편히 쉬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동안 사용하던 숙소로 들어서려 했을 때 시리우스는 인기척을 느꼈다.
시리우스는 잠시 고민한 뒤 그냥 방으로 들어섰다.
“알레이온은 어떻게 했지?”
“잠재웠어요.”
어두운 방에 베르디안이 서 있었다.
알레이온이 지켜보고 있었을 텐데 혼자서 자유롭게 시리우스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네가 갖고 있던 약물은 전부 빼앗았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로도 수면약을 제조할 수 있어요. 장비도 없고 마법도 못 쓰는 상태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요.”
“그것까지는 몰랐군.”
시리우스는 문을 닫은 뒤,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지?”
“어디로 도망가라는 건가요?”
베르디안이 피식 웃었다.
“독왕 전하한테 돌아가 봤자 실험 재료로 사용될 뿐이라면서요?”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게다가 동부 지부까지 괴멸되었는데 저 혼자 돌아가면…… 배신자 취급을 당하게 되겠죠. 노이엔 마이우를 찾아갈 때와 동부 지부를 습격할 때 제가 당신과 함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연맹이 그것까지 다 파악했을까?”
“연맹을 얕보지 마세요. 그 정도는 이미 다 파악했을 거예요.”
예전의 베르디안이라면 그걸 알고서도 연맹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디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고민을 해 봐야죠. 어떻게 해야 제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지, 그리고 독왕 전하에게도 용서받을 수 있을지.”
“결국 독왕에게 돌아가는 걸 원하는 모양이군.”
“당신은…… 이해 못 해요.”
그렇게 말하며 베르디안이 시선을 돌렸다.
시리우스는 그 표정을 보면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베르디안에게 독왕은……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게 세뇌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부모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면 쉽게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당신이 독왕 전하와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당신을 뒤에서 찌르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글쎄, 그때 분위기에 달렸겠지.”
“후우…….”
베르디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리우스 님, 연맹은 똘똘 뭉친 조직이 아니에요.”
“그런 것 같더군.”
“독왕 전하를 적대하는 파벌도 있어요. 그런 파벌에서는 저를 생포해서 독왕 전하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겠죠.”
“뇌제의 파벌도 그런 쪽인가?”
뇌제.
아마 검제와 동격의 존재일 것이다.
동부 지부장은 뇌제에게서 뇌전 마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렇죠. 뇌제뿐만 아니라 염제(炎帝)를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염제라…….”
또 다른 인물이 언급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화염 마법의 대가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검제, 뇌제, 염제…… 이렇게 셋이 연맹의 최고 실력자인가?”
“그렇죠.”
“독왕은? 독왕과 동급인 존재들은 있나?”
“거기까지는 알려 드리고 싶지 않네요.”
베르디안은 더 이상의 정보를 알려 주는 걸 거부했다.
그래도 시리우스 입장에서는 큰 수확이었다.
검제, 뇌제, 염제라는 세 명의 실력자들이 연맹의 꼭대기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당신이 그쪽 파벌에게 당하면…… 저도 붙잡혀서 끌려가게 되겠죠.”
“그렇겠지.”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어요.”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게, 앞으로는 협력해 준다는 얘기인가?”
“그렇게는 말 안 했어요.”
시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사실 이건 처음부터 시리우스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동부 지부를 토벌하면서 베르디안을 계속 끌고 다닌다면 결국 베르디안은 연맹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진다.
그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시리우스는 느긋한 심정으로 베르디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베르디안.”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놈들에게 당하지 않는다.”
“그런 보장은…….”
“그리고, 나는 내 수하가 눈앞에서 붙잡혀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다.”
“……!”
“독왕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염려 안 해도 된다.”
베르디안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 수하가 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베르디안, 한 가지만 물어보지.”
“사람 말을 들어 줄래요?”
베르디안의 항의를 무시하면서, 시리우스는 말을 꺼냈다.
“그동안 내가 찾던 백빙화는 추운 지방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고 하더군. 혹시…… 더운 지방의 식물 중에 백빙화에 대응하는 약초가 없을까?”
“……!”
이건 시리우스가 남부 지방으로 향하는 또 다른 이유다.
천랑신공의 세 번째 단계, 창뢰의 경지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연맹의 9서클 마법사들과 대결할 걸 생각하면 천랑신공의 경지를 빠르게 끌어 올려야 한다.
하지만 창뢰의 경지에 입문하려면 극양의 내공이 필요하다.
천랑신공은 극음과 극양의 내공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을 통해 극양의 영약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시리우스 님, 당신은 대체 왜 그런걸…….”
베르디안이 시리우스의 진의를 물어보려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벨리드가 들어왔다.
“시리우스, 아직 안 자고 있지? 기뻐해라! 이 몸이 드디어 목검 수련 일만 번을 달성했으니 어서 다음 단계를…….”
신나서 떠들어 대던 벨리드가, 어두운 침실에 시리우스와 베르디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시리우스, 네 아내도 가까운 곳에 있는데, 왜 한밤중에 이 여자하고……. 내가 아무리 너하고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런 건 감싸 줄 수 없어!”
“벨리드.”
시리우스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만 번 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