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57화
57화. 힘을 실어 주시오
“시리우스…… 밤새 곰곰이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놀리고 있던 건가?”
기껏 일만 번을 했는데, 추가 일만 번이라니.
벨리드는 아침이 되자마자 시리우스를 다시 찾아와서 항의했다.
“일만 번 연습하면 다음 단계라며? 근데 일만 번 추가라고? 그게 다음 단계야?”
“불만인가?”
“당연히 불만이지!”
원래 시리우스는 벨리드에게 최소 10만 번의 삼재검법 수련을 시킬 예정이었다.
무공은 물론이고 검술 자체를 배운 적이 없는 벨리드를 강하게 만들어 주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다만 처음부터 십만 번이라고 하면 의욕이 안 생길 테니 처음에는 일만 번만 하라고 했던 것이다.
“걱정 마라, 똑같지 않을 테니까.”
“뭐?”
“벨리드, 일단 목검을 들어 봐라.”
“…….”
벨리드가 순순히 목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나한테 휘둘러봐.”
“뭐? 너한테?”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찌르기, 멈추지 말고 실시.”
“시리우스, 그러다가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럴 리 없으니 해 봐.”
“으음…….”
시리우스의 재촉에 못 이겨, 벨리드가 목검으로 삼재검법을 펼쳤다.
하지만 모든 공격은 시리우스의 손가락 하나에 막혔다.
“아니, 어떻게 손가락 하나만으로…….”
벨리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고 있었을 때.
목검이 갑자기 퍽 하고 산산조각 나 버렸다.
“시, 시리우스,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차피 부러지기 직전이었어.”
벨리드의 일만 번에는 단순히 허공에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구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리우스가 적당한 나무를 가공해서 만들어 준 목검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용케 버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이걸로 해라.”
“뭐?”
시리우스는 천으로 둘러싸인 물건 하나를 꺼냈다.
유스티아가 엔트로빌에서 가져다준 물건이었다.
“엔트로빌 대장장이 길드의 슈미츠한테 연락해서 만들게 했던 거다.”
“이게 뭔데?”
천을 벗겨 내자 그 정체가 드러났다.
그건 지금까지 벨리드가 쓰던 목검과 같은 형태의 가검(假劍)이었다.
“훈련용 가검이다. 앞으로는 목검 대신 이걸 쓰도록 해.”
“이, 이걸로 쓰라고?”
“그래, 한번 휘둘러 봐라.”
벨리드가 시험 삼아 검을 휘둘러봤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크게 떴다.
“무거운데.”
“당연하지. 나무가 아니라 쇠로 되어 있으니까.”
시리우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일만 번 더 연습해서, 이만 번을 채워라.”
“시리우스…….”
“벨리드,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시리우스의 시선이 벨리드의 팔뚝으로 향했다.
“너는 지금 일만 번 연습한 만큼 강해진 상태다.”
“……!”
“일만 번 더 연습하면 그만큼 강해지겠지.”
이런 식으로 수련을 해서 벨리드가 어떤 경지에 오르게 될지는…… 시리우스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이렇게 스스로 노력한 경험은, 결코 벨리드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정진해라, 벨리드.”
“시리우스…….”
“아까 나한테 펼친 삼재검법…… 처음보다 훨씬 그럴듯했다.”
“……!”
숨을 삼키는 벨리드를 내버려 둔 채 시리우스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레이온에게 다가갔다.
“알레이온, 이만 일어나라.”
“단주님, 벌을 주십시오!”
알레이온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디안을 감시하라는 단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베르디안이 한 수 위였을 뿐이야. 그걸 예상하지 못한 내 책임도 있지.”
“아닙니다! 제가 정신만 똑바로 차렸어도 베르디안의 수면약에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젯밤, 베르디안은 길바닥에서 주워 모은 재료로 수면약을 만들어 알레이온을 잠재웠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피해는 없었다.
“네가 정 원한다면 벌을 내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으니 부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너는 벨리드보다 서열이 아래다.”
“…….”
알레이온이 잠시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잘 이해를 못 했습니다.”
“앞으로 벨리드를 받들어 모시라고, 형님처럼.”
“단주님……!”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알레이온을 내려다보며 시리우스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알레이온, 네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냐?”
“네?”
“베르디안한테 당했으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정신 무장을 똑바로 하는 게 우선이다. 나한테 벌을 받아서 네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건 별로 중요치 않아.”
“……!”
알레이온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깨물면서 알레이온이 생각에 잠겨 있자 벨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역시 쇳덩이라서 휘두르니까 바로 땀이 나네. 어이, 알레이온. 물 좀 떠와.”
“크윽……!”
방금 전의 대화를 엿듣고 깝죽대기 시작한 벨리드를 보며 알레이온이 굴욕에 몸을 떨었다.
“평소 이러면서 지내는 건가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건,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디안이었다.
“남 일이 아니다, 베르디안.”
“네?”
“네가 막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
베르디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쩌면 벨리드에게 갈굼 당한 알레이온이 베르디안을 갈구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죠?”
바로 그때.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유스티아가 나타났다.
“시리우스, 방금 레티시아 언니하고 얘기했어요. 남부 연합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니 주선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다행이군.”
레티시아는 남부의 명문가 레티우드 가문에 시집을 갔다.
레티우드 가문도 남부 연합의 일원이니 그쪽을 통해 남부 연합을 소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레티시아 언니가 요구한 사항이 있어요.”
“뭐지?”
“부부 동반으로 오라던데요.”
“…….”
부부 동반.
즉, 유스티아와 함께 오라는 소리다.
“일단 우리 둘이 레티우드 가문에 함께 찾아와 줘야 주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언니는 그냥 순수하게 우리 두 사람을 초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레티우드 가문은 어떨지 모르죠.”
사실 레티우드 가문도 리겔 가문을 노리던 세력 중 하나다.
레티시아를 차기 가주로 세워서 리겔 가문을 장악하는 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시리우스가 리겔 가문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유스티아의 입지까지 급상승한 상황이다.
레티우드 가문 입장에서는 시리우스와 유스티아가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닐 것이다.
“시리우스, 어떻게 할까요?”
“초대에는 응해야지.”
레티시아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하지만 레티우드 가문 쪽은 미리 정리해야 했다.
둘째 사위 가문이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리겔 가문에 영향력을 행세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
시리우스의 행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관계를 확실히 해 둬야 한다.
“얘기해서 날짜를 잡아 줘. 우리 쪽도 준비를 진행해 두지.”
“알겠어요. 사실 저도 남부에 가고 싶었거든요.”
“그런가?”
“네, 천랑표국도 슬슬 사업을 확장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유스티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베르디안이 중얼거렸다.
“의외네요.”
“뭐가?”
“소문만 들었을 때는 서로 정열적인 부부인 줄 알았는데…… 얼굴을 마주 쳐도 그냥 서로 냉랭하네요. 너무 사무적인 분위기라서 조금 놀랐어요.”
“…….”
시리우스가 입을 다물고 있자 알레이온이 벨리드에게 물컵을 가져다주면서 입을 열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실 분들이 아니다. 두 분 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분이시니까.”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는 다르다는 건가요?”
“글쎄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마도…… 윽!”
아까 산산조각 났던 목검 파편을 탄지공으로 날려서 입을 다물게 했다.
물을 마시던 벨리드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베르디안, 내가 한 가지 알려 줄까?”
“뭐죠?”
“지금까지 내가 관찰한 결과, 시리우스는 은근히 쑥스러움이 많다. 부부 관계를 화제로 삼으면 매번 버럭 하면서 더 이상 얘기를 못 하게 만드는…… 아윽!”
목검 파편을 얻어맞은 벨리드가 알레이온 옆에서 비명을 질렀다.
* * *
동부 지역 전체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문이 병력을 지원한 부대…… 현무위단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름에 현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무림맹의 오단(五團)도 사신수에서 이름을 따온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네 개 단이 존재했다. 나머지 하나의 단은 시대에 따라 황룡일 때도 있었고 기린일 때도 있었고 봉황일 때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쪽 세계에서는 천랑의 이름을 붙인 천랑검단이 먼저 생겼지만 말이다.
“솔직히 많이 놀랐소.”
여섯 개의 대(隊)와 스물네 개의 조(組)로 구성된 현무위단 편제를 확인하면서, 카이엔 아그타스가 감탄했다.
“매우 합리적이군. 이렇게 각지에 배치하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하게 하면 동부 전체의 치안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소.”
현무위단의 편제는 전부 시리우스가 결정했다.
시리우스 말고는 동부 지역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동부 지역은 하나로 뭉친 적이 없었다.
여러 가문이 함께 움직일 때가 있어도 매번 주먹구구식으로 병력이 운용되었다.
아무도 이런 조직을 운용해 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리우스에게는 무림맹주로서 여러 문파의 병력을 조율하고 통솔한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무림맹주가 되기 전에 단주(團主)나 대주(隊主)의 자리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매우 훌륭하군. 시리우스에게는 장군으로서의 재능도 있는 것 같소.”
알브라임 가문의 가주…… 클린드 알브라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동안 알브라임 가문은 오로지 자기 영지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했으나, 시리우스가 두각을 드러내자 벨리드를 통해 물밑 지원을 했다.
시리우스가 소속된 리겔 가문이 동부의 맹주 역할을 하게 된 지금, 클린드는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아주 대단한 막냇사위를 맞이하셨소이다, 루트베인.”
부러움이 담긴 클린드의 한마디에…… 루트베인 리겔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루트베인은 리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소규모 흑회들을 토벌하고 다녔다.
온화한 학자 같은 성품을 지닌 루트베인에게는 적성이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현무위단이 발족하면 루트베인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이제부터 루트베인은……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인 리겔 가문의 가주로서, 시리우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에 전력할 수 있다.
“카이엔, 클린드…… 지금 내가 리겔 가문의 가주로서 이 자리에 있지만, 솔직히 지금 리겔 가문의 대표는 시리우스라 할 수 있소.”
“…….”
“나는 시리우스라면 흑과 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이 대륙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루트베인은 예전에 시리우스에게 흑과 백의 조화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음양이 어우러진 태극의 문양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날 이후 루트베인은 시리우스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시리우스라면 대륙 5대 명가의 본래 사명을…… 대륙을 바른 방향으로 이끈다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루트베인은 리겔 가문의 미래를 시리우스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러니 부탁하겠소.”
“…….”
“시리우스에게 힘을 실어 주시오.”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루트베인 앞에서, 카이엔과 클린드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무림맹을 만들기 위한 시리우스의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었다.
* * *
현무위단도 정식으로 출범했고, 슬슬 남부로 떠날 때가 되었다.
강을 따라 이동하기로 했기 때문에 시리우스는 엔트로빌 선착장에서 배를 타게 되었다.
“시리우스 님.”
“무슨 일이지?”
배에 오르기 전, 엔트로빌 6인회의 일인자였던 로디우스가 말을 걸어왔다.
엔트로빌 6인회가 해체된 뒤, 그는 천랑표국의 일원이 되어 수상 운송 사업의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저희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건데…… 혹시 시리우스 님은 다르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려 합니다.”
“서론이 길군. 본론부터 말해 봐.”
“그동안 남부 지역으로 진입할 때마다 보호비를 냈습니다.”
“보호비?”
시리우스는 귀를 의심했다.
“너희들이 물건을 보호해 주는 입장 아니었나? 보호비는 너희들이 받았을 텐데?”
“좀 위험한 구간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만 현지 세력에게 경호를 부탁하는 거죠.”
로디우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동부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만, 남부 지역으로 들어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위험한 구간이라니 어떤 거지?”
“수적(水賊)들이 우글대는 곳이죠. 놈들이 습격하면 골치 아프니 미리 현지 세력에게 경호를 요청해 두는 겁니다. 그러면 수적들도 접근하지 못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시리우스는 혀를 찼다.
“그 현지 세력과 수적 놈들은 서로 결탁해 있을 거다. 보호비를 안 내면 수적들이 습격해서 탈탈 털어 가는 거고, 보호비를 내면 현지 세력과 수적들이 그 돈을 나눠 갖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