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58화
58화. 두 사람은 그런 부부였다
무림에서도 이런 공생 관계가 흔했다.
예를 들어…… 화물을 보호하는 표국은 화물을 노리는 산적들과 친하게 지내곤 한다.
산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적절한 통행료를 지불하고 통과한다.
표국에게 화물 운송을 부탁한 의뢰자 입장에서는 황당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표국도 먹고살아야 하고, 산적도 먹고살아야 한다.
양쪽 사이에 이런 공생 관계가 없다면 매번 화물을 두고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표국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 없이 무사히 화물을 운송할 수 있어서 좋고, 산적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 없이 수입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산적을 완전히 토벌해 버리면 통행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표국의 수입도 줄어든다.
산적이 없어졌으니 의뢰자에게서 돈을 더 많이 뜯어내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적들이 사라진 뒤 그 일대에 새로운 세력이 흘러들어 오면서 예측 불가능한 위험 요소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선을 지키면서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이런 공생 관계가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을 경우지.’
시리우스도 이런 식의 관계를 모조리 적발하여 뿌리 뽑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전부 다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 눈에 들어올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군.’
이미 로디우스에게는 충분한 설명을 들었지만, 현지에서도 확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상황을 봐서…… 놈들을 토벌하게 될 것이다.
“시리우스.”
배에 올라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시리우스에게 유스티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 여행, 천랑표국의 선단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그편이 훨씬 좋아.”
사실 시리우스와 유스티아만 레티우드 가문으로 가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랑표국의 화물선들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우리 쪽 전력도 함께 움직일 수 있고 말이지.”
“…….”
화물선에 타고 있는 사람 중 절반은 천랑검단 소속의 검사였다.
시리우스가 병력을 이끌고 남부로 쳐들어왔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화물선의 선원으로 위장한 것이다.
사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천랑표국의 운송업을 돕고 있었으니 별일 없으면 그냥 화물선을 타고 동부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유사시에는 검을 뽑아 들고 싸움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이게 더 편하겠지.”
유스티아는 천랑표국의 남부 진출을 노리고 있다.
천랑표국은 시리우스의 자금줄이기도 하기 때문에 유스티아의 사업이 잘 진행되어야 시리우스한테도 좋다.
“사업 관련으로는 당신이 알아서 해.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고.”
“네, 알겠어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 뒤에서 레티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도 사무적인 얘기만 하고 있는 거야? 너희는 정말…….”
“언니…….”
유스티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원래 그런 사이라니까요. 참견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레티시아가 팔짱을 끼면서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제부, 지금 이게 무슨 여행인 줄 알고 있어?”
“레티우드 가문에 방문하는 여행 아닙니까?”
“그게 아니잖아.”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시리우스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자 레티시아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신혼여행이잖아.”
“…….”
“아니야? 좀 늦긴 했어도, 이게 너희의 신혼여행이라고.”
신혼여행.
시리우스도 유스티아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로맨틱한 분위기도 연출하고, 추억도 만들고 하라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게 다 쌓이고 쌓여서 훗날의 결혼 생활을 원활하게 만드는 거야.”
“…….”
“결혼 생활 선배로서 하는 조언이니까, 기억해 두라고.”
그렇게 말하고, 레티시아는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자리를 비켜 줄 테니 이제부터 둘이서 알아서 잘해 보라는 듯이.
시리우스와 유스티아는 잠시 서로를 쳐다본 뒤,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시하자.”
“무시하죠.”
두 사람은 그런 부부였다.
* * *
전생에 살던 세계와 비교하자면…… 동부 지역은 사천 지방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형이 험난하기 때문에 지도에서 보이는 넓이와는 달리 실제로 사람이 살 만한 땅은 좁다.
또한 지형적인 문제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사천 지방은 땅이 비옥하여 농업 생산력이 높았지만, 이쪽 세계의 동부 지역은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수로 운송을 더 활성화하면 동부 지역은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넓은 강에 시선을 향하면서 유스티아가 말했다.
“특히 남부 지역과의 교역이 중요하죠. 거기는 물자가 풍부하니까.”
“그렇겠군.”
“그동안 엔트로빌 6인회는 이 부분에 그리 힘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앞으로는 달라져야죠.”
시리우스가 보기에도, 강을 통한 수송에 투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시리우스 일행이 강을 통해 레티우드 가문으로 향하는 것도 그게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이기 때문이었으니까.
“단주님.”
그때 알레이온이 시리우스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말씀 나누시는 도중에…….”
“아니, 괜찮아. 왜 그러지?”
“전방에 루펠치아 자경단의 배가 보인다고 합니다.”
“…….”
루펠치아 자경단.
남부 지역의 상업 도시인 루펠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세력이다.
로디우스가 말하던 현지 세력이 바로 루펠치아 자경단이었다.
“루펠치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을 텐데 일찍도 나타났군.”
“베테랑 선원들이 말하길, 저희 배에 올라오려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올라오라고 해라. 내가 응대하지.”
* * *
“반갑습니다. 루펠치아 자경단의 던디우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군.”
선실에 들어온 남자가 시리우스에게 인사를 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긴 했지만, 복장이 말쑥해서 흑회보다는 상인 같은 인상이었다.
“선단 규모가 나날이 커지는군요. 엔트로빌 6인회 시절하고는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뭐, 그렇지. 오늘은 무슨 용건이지?”
시리우스가 빨리 본론부터 말하라고 재촉하자 던디우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들어서 샤히트 수적단의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샤히트 수적단?”
“잘 모르시는가 보군요. 여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서 활동하는 수적들입니다.”
물론 시리우스도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그동안 로디우스 등이 루펠치아 자경단의 도움을 받은 건 샤히트 수적단 때문이었다.
“아주 흉악한 놈들입니다. 거리낌 없이 선단을 습격해서 사람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아 가죠.”
“그런 놈들을 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거지?”
“강을 따라 쭉 내려가다 보면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구간이 있습니다. 경치는 좋지만 그런 곳에 수적들이 숨어 있으면 손을 대기 어렵죠.”
언뜻 듣기에는 일리 있는 얘기였다.
“그동안 여러 가문이 토벌대를 보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그냥 방치하게 되었죠.”
“…….”
“그래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루펠치아에서 자경단을 조직했습니다. 쟁쟁한 명문가들도 도움이 안 되니 우리들 스스로 샤히트 수적단에게서 배를 지키자고 말입니다.”
얘기만 들어서는 아주 훌륭한 집단 같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처음 뵙는 얼굴인 것 같은데…… 새로 오셨습니까?”
“그래, 수로 운송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군.”
“하하, 그런 거라면 저희 루펠치아 자경단이 도와드려야죠.”
던디우드가 슬쩍 시리우스를 위아래로 살폈다.
시리우스에게서 얼마나 뜯어 먹을 수 있을지 계산하는 중이었다.
“놈들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루펠치아 자경단이 여러분을 일찌감치 보호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우리를 찾아온 거군.”
“샤히트 수적단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 드릴 생각입니다.”
“수고비는 어느 정도면 될까? 선단의 규모가 크니 배도 사람도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시리우스가 먼저 얘기를 꺼내 주자 던디우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반적인 경우를 적용한다면…….”
던디우드가 펜을 꺼내 종이에다가 숫자를 잔뜩 적기 시작했다.
항목은 여러 가지인데 일일이 합산하지 않아 전부 얼마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 부담해 주시면 저희의 자경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가만있자.”
시리우스에게 견적서를 넘긴 던디우드는 금방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리우스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뒤에서 지켜보던 여자에게 견적서를 넘겨줬기 때문이다.
“바가지네요.”
“……!”
그리고,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종이를 돌려줬다.
“이 금액의 4분의 1이라면 받아들이죠.”
“4분의 1이요? 말도 안 됩니다! 그 정도로는 저희들 밥값도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면서……!”
바로 그때.
지켜보던 시리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를 리가 없지, 던디우드.”
“네?”
“이 여자가 이 선단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데, 모를 리가.”
던디우드가 흠칫 놀랐다.
“당신이 책임자였던 게 아닙니까?”
“나는 아무 직책 없는 말단.”
시리우스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 사람은 가장 높은 표국주.”
“표국주라면…….”
천랑표국의 대표, 유스티아 리겔.
순식간에 동부 지역의 모든 물류 흐름을 장악한 재녀(材女)가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닫고, 던디우드가 눈을 크게 떴다.
“던디우드 씨, 방금 4분의 1 갖고는 밥값도 안 된다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죠.”
모든 계산을 끝마친 유스티아가 던디우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샤히트 수적단과 돈을 나눠 갖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
루펠치아 자경단과 샤히트 수적단의 유착 관계를 이미 꿰뚫어 본 상태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던디우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더 이상 얘기를 진행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던디우드는 판단이 빨랐다.
굳이 변명해 봤자 시간 낭비가 될 거라 깨달은 것이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루펠치아 자경단은 여러분을 지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샤히트 수적단한테 탈탈 털리고 있어도, 저희는 그냥 강가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겁니다.”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던디우드는 자리를 뜨려 했다.
“여러분 모두,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던디우드는 선실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일만사백구십구…… 일만오백!”
육중해 보이는 쇠몽둥이. 아니, 가검을 혼자서 휘두르고 있는 미친놈이 있었다.
던디우드가 주춤하면서 뒷걸음치자 시리우스가 던디우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네? 그야 배에서 내리려고…….”
“올라오는 건 허락했지만 내려가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쿵!
던디우드가 선실 바닥을 굴렀다.
멀쩡히 서 있던 성인 남자가, 시리우스의 손짓 한 번에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서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으윽, 이게 무슨……!”
몸이 박살 나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던디우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리우스와 유스티아의 모습을 목격했다.
“유스티아, 루펠치아 자경단이 천랑표국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남부에서 사업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 보지. 아무 직책 없는 말단이지만 밥값은 해야 하니까.”
“부탁하죠, 시리우스.”
사무적인 말투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던디우드는 정체불명의 공포심을 느꼈다.
두 사람은 그런 부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