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59화
59화. 갱생을 위하여
던디우드가 타고 온 배도 바깥에 있었지만 알레이온이 천랑검단의 검사들을 데려가서 순식간에 제압했다.
하지만 주위에 다른 배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루펠치아 자경단에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유스티아, 루펠치아에 도착하면 내가 천랑검단과 함께 먼저 내릴 거야.”
“알겠어요. 그러면 저희는 배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죠.”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했다.
참고로 레티시아는…… 뱃멀미 때문에 계속 선실에서 누워 있는 중이었다.
* * *
루펠치아는 강을 끼고 발달한 상업 도시다.
이 일대에는 배를 댈 만한 곳이 루펠치아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루펠치아를 지배하는 세력은 여러 번 바뀌었는데, 현재는 슐레인이라는 인물이 자경단장 역할을 하면서 위세를 부리고 있다.
“천랑표국이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소식을 들은 슐레인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지금 슐레인은 루펠치아 뒷골목의 술집에서 부하들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던디우드가 붙잡힌 것 같은데.”
“그냥 내버려 둬라.”
“네?”
슐레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부하들이 눈을 크게 떴다.
“던디우드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돈을 많이 뜯어 오긴 했지만, 그놈을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아…….”
“어차피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샤히트 수적단이 천랑표국을 혼내 줄 거다.”
그렇게 말한 뒤, 슐레인은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우리는 느긋하게 현장에 찾아가서 천랑표국 놈들을 물에서 건져 주고 사례비를 뜯어내면 되는 거지.”
“그, 그렇군요.”
“그러면 천랑표국도 슬슬 깨닫게 될 거다. 루펠치아 자경단한테 돈을 바치고 지나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말이다.”
옆에 앉아 있던 접대부에게 술잔을 채우게 하면서, 슐레인이 미소를 지었다.
“천랑표국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리는 천랑표국한테서 돈을 벌어서 좋고, 샤히트 수적단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돈을 나눠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이게 바로 상생이라는 거지.”
슐레인은 샤히트 수적단과 오래전부터 연결되어 있었다.
애초에 슐레인이 루펠치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샤히트 수적단의 협력 덕분이었다.
샤히트 수적단은 루펠치아 자경단이 호위하는 배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 대신 루펠치아 자경단이 받는 돈을 나눠 갖는다.
만약 루펠치아 자경단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샤히트 수적단이 도와주기로 되어 있고, 반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단장님.”
그때 부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랑표국은 리겔 가문에서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더군.”
“최근 리겔 가문이 다른 세력들을 모조리 굴복시키고 동부의 맹주가 되었다는데…… 괜찮을까요?”
“흥, 그런 건 의미 없는 거다.”
술잔을 기울이며 슐레인이 말했다.
“얼마 전에 들었다. 아그타스 가문도, 알브라임 가문도 그냥 건재하다고 하더군. 리겔 가문은 여전히 동북부 촌구석에서 소소하게 지내는 중이라고 한다.”
“네? 그러면 어떻게 동부의 맹주 노릇을…….”
“그냥 동부 놈들이 리겔 가문을 대표로 내세웠을 뿐이다. 몰락했다고는 해도 대륙 5대 명가라는 이름값이 있으니까.”
슐레인은 피식 웃었다.
“동부 지역은 워낙 힘이 약하니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야겠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 봤자 남부의 스트라우스 가문 하나도 당해 내지 못할 거다. 어쩌면 레티우드 가문보다 못할 가능성도 있고.”
“아…….”
“놈들이 이쪽으로 병력을 끌고 와서 보복을 한다든가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다. 남부 연합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동부에서 어떻게 병력을 이끌고 와?”
그렇게 말하고 슐레인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물론…… 시리우스라는 놈이 남부로 쳐들어온다면 우리도 조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 시리우스…….”
“동부의 주요 흑회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다녔다는 미친놈이다. 그놈이 루펠치아에 상륙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부리나케 짐을 싸서 도망쳐야겠지.”
슐레인의 농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차피 그런 건 지금 걱정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걱정해야 할 건 샤히트 수적단에서 요구하는 금액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지.”
“아…… 맞습니다.”
“루펠치아 상인들한테서 뜯어낼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어. 결국 지나다니는 배에서 보호비를 뜯어야 하는데 말이지.”
이번에 던디우드가 평소보다 일찍 천랑표국에 접근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일찍부터 호위를 시작하면 더 많은 보호비를 청구할 수 있으니까.
“샤히트 수적단은 요새 왜 그런답니까?”
“연맹에 인정받으려고 하는 거겠지.”
“네? 설마 샤히트 님은 연맹하고 인맥이 있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야. 뭐, 샤히트가 연맹에 들어가면 우리한테도 떨어지는 게 있겠지. 일단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도와주자고.”
그렇게 말하며 슐레인은 다시 채워진 술잔을 치켜들었다.
“상생을 위하여.”
“갱생을 위하여.”
바로 그때.
근처에서 생뚱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 끼어들어?”
슐레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근처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걸 확인했다.
“너냐? 방금 이상한 소리로 끼어든 게?”
“술맛이 별로군. 싸구려 술을 시킨 건 아니었는데.”
슐레인에게 대꾸하지 않고 술잔을 들여다본 건…… 홀로 이 술집에 들어온 시리우스였다.
“술병은 제대로인데…… 술을 바꿔치기한 건가? 이렇게 장사하면 안 되지.”
“이봐!”
슐레인의 부하들이 일어서서 시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던 순간.
“윽……!”
쿵, 쿵!
부하들이 연달아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부하들도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도 곧바로 이마를 감싸 쥐고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시리우스가 안주로 나온 콩알을 탄지공으로 튕겨서 명중시켰기 때문이다.
“뭐 하는 놈이냐……!”
결국 슐레인이 벌떡 일어섰다.
술자리여서 무기를 들고 오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술병을 집어 들었지만, 곧바로 와장창 깨져 버렸다.
“……!”
비수를 날려 술병을 깨뜨린 시리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황하고 있는 슐레인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뭐 하는 놈인지 알아서 어쩌려고?”
“으윽……!”
슐레인은 굴하지 않고 다른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탁자를 밟고 뛰어올라, 시리우스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가 슐레인의 뺨을 후려치는 게 더 빨랐다.
“커헉……!”
슐레인은 공중에서 두 바퀴 회전한 뒤 술집 바닥에 추락했다.
그 모습을 보며 주위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이, 이 자식들아, 뭐 해! 저놈 죽여!”
슐레인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부하 중에서 슐레인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펠치아에서 가장 무력이 뛰어난 사람이 슐레인이었는데, 그 슐레인을 일방적으로 제압한 사람한테 어떻게 덤벼들겠는가.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몰래 뒷걸음치던 부하들이 몸을 움찔했다.
“이 술집은 이미 천랑검단이 포위했으니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다.”
“……!”
술집에 들어오기 전, 시리우스는 알레이온에게 지시를 내려놨다.
지금 천랑검단은 물 샐 틈 하나 없이 술집을 포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 저기 말입니다.”
그때 아까 슐레인의 술 시중을 들던 접대부가 덜덜 떨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저희는…… 나가 봐도 될까요?”
다른 점원들도 간절한 눈빛으로 시리우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들은 슐레인이나 루펠치아 자경단한테 당하고 사는 입장이니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짜 술을 팔던 놈들이 뭘 잘했다고? 너희들도 남아 있어라.”
“……!”
시리우스의 냉정한 답변에 술집 점원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 이봐!”
그때 슐레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설마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이야!?”
슐레인이 헐떡이면서 소리쳤다.
“너, 남부 사람 아니지? 천랑표국인 것 같은데, 실수하고 있는 거야. 동부 놈들이 남부에 와서 학살을 저지르면 남부 연합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루펠치아 같은 도시 한복판에서 피바람이 불면…….”
“별걸 다 걱정해 주는군.”
“욱!”
시리우스는 머리를 찍어 눌렀다.
“이미 조사는 다 끝났다. 남부 연합도 루펠치아에서 사람 한두 명 죽어 나가는 것 정도는 신경 안 쓰더군. 실제로 너희 루펠치아 자경단도 루펠치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예전 실세들을 몇 명 죽였고.”
“그, 그건…….”
“그리고, 슐레인…… 네가 수적단과 작당해서 강물에 빠뜨려 죽인 사람 숫자는 그것보다 훨씬 많을 거다.”
“젠장, 그게 뭐가 잘못이라고……!”
슐레인이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려 반론하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리우스가 백랑의 공력을 슐레인에게 주입했기 때문이다.
결국, 슐레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시체가 되었다.
“상생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갱생을 못 하면 이렇게 되는 거다.”
“……!”
시리우스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주위에서 지켜보던 놈들이 몸을 떨었다.
“거기, 점원들.”
“네, 네.”
“나중에 대충 강에다가 던져 버려라. 그동안 많은 사람을 고기밥으로 만들었을 테니 본인도 그렇게 되어야지.”
슐레인을 얼려서 죽인 건 시리우스 나름의 배려였다.
안 그래도 술병이 깨져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피바다가 되면 청소하기가 더 어려워질 테니까.
무림에서는 객잔 등에서 싸움이 벌어져서 가게가 다 박살 나는 경우가 흔했지만…… 천랑무제 백무랑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부하들이 객잔에서 시비가 붙어도, 웬만하면 나가서 싸우라고 타일렀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사과의 의미로 돈을 넉넉히 두고 갔다.
물론 이곳은 가짜 술을 팔아서 시리우스를 등쳐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돈을 추가로 건네줄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너희는 들어라.”
시리우스는 주위에 있던 슐레인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루펠치아 자경단은 이제부터 이름에 걸맞은 활동을 하도록 한다.”
“……?”
다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녀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시리우스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니다. 지나가는 배들이 수적 놈들한테 습격받지 않도록 보호해 줘라.”
“아…….”
“뒷골목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끼어들어서 말리고, 술집에서 가짜 술을 팔고 있으면 그러지 말라고 잘 타이르고…… 뭐, 그런 일들을 하면 된다.”
이건 그들이 지금까지 했던 것과 비슷하다.
다만 결코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무보수 봉사 활동이다. 밥값과 술값 이상의 수고비를 받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
“나는 갈 길이 바빠서 금방 떠날 거지만 조만간 내가 사람을 보내서 루펠치아를 점검할 거다. 루펠치아라는 도시가 예전과 달라졌으면 별일 없겠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등쳐 먹고살고 있다면 그땐 너희 모두가 슐레인처럼 물고기 밥이 될 거다.”
그렇게 말한 뒤, 시리우스가 덧붙였다.
“루펠치아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사람들을 등쳐 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너희는 지옥 끝까지 추적당해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미 동부 지역에는 그런 체제가 갖춰지고 있다.
머지않아 남부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남부는 물자도 풍부하고 사람들도 활기찬 곳이다. 날씨도 따뜻하고 좋은 동네인데, 언제까지 사람들 등쳐 먹으면서 어두침침한 인생을 살 거냐?”
“아…….”
“여기 술집에서 일하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자경단한테 상납금을 뜯기는 피해자 입장이라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가짜 술로 손님들을 등쳐 먹는 너희도 가해자다.”
“…….”
다들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들 등쳐 먹지 않고는 밥 벌어먹기 힘들다면 언제든지 지나가는 천랑표국 배에 올라타라. 일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까.”
“…….”
“정신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라.”
시리우스는 아까 먹다 남긴 술잔을 치켜들었다.
“갱생을 위하여.”
“개, 갱생을 위하여…….”
자경단원들과 점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시리우스의 말을 복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