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63화
63화. 기선 제압을 하고 싶으시다고?
샤히트 수적단을 정리한 뒤, 선단은 강을 따라 전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암절벽이 사라지고 평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축복받은 땅, 남부 평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선단의 목적지는 강가에 위치한 상업 도시 알랜스터였다.
“확실히 엔트로빌보다 큰 도시군.”
“남부 사람들이 동부를 촌구석이라고 떠들어 대는 것도 이해가 되네요.”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와 대화를 나누며 배에서 내렸다.
오늘 이곳에서 화물을 내린 뒤, 육로를 통해 레티우드 가문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유스티아, 화물을 다 내릴 때까지 이 근방을 좀 둘러보고 오지.”
“이 근방은 레티우드 가문이 관리하고 있어요. 당신이 나설 일은 없을 텐데요.”
“그냥 둘러보고 올 뿐이야.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천랑표국이 화물을 내리는 동안, 시리우스는 알랜스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혹시 연맹 관계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맹에서 시리우스나 베르디안을 노리고 있다면 최소 7서클 이상의 마도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 정도의 마력을 지녔다면 시리우스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여기 정도면 괜찮겠군.”
시리우스는 높은 건물 위에 올랐다.
그리고 사방으로 기를 뻗어 탐색을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부분 3서클 이하의 마력을 지닌 평범한 마법사들이다.
선착장 쪽에서는 제법 강한 마력이 느껴졌지만 알레이온이나 벨리드 등 아는 사람들의 마력이었다.
“가만있자…….”
도시 외곽에서 반응이 있었다.
제법 큰 마력이다. 이 정도면 6서클이다.
뿐만 아니라 4서클이나 5서클쯤 되는 마법사들도 여러 명 있었다.
시리우스는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
경공을 사용해 금방 도착하자 도시의 입구에서 검문을 받는 집단이 보였다.
다들 진홍색 무늬가 있는 제복(制服) 차림이었는데, 겉모습이 전부 단정했다.
그들 사이에서 6서클의 마력을 지닌 인물을 찾아냈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붉은색 머리카락의 남자다.
얼굴에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이지적인 분위기였다.
시리우스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데이비드 님, 이 서류를 작성해 주십시오.”
“절차가 복잡하군. 한시가 급한데 말이다.”
“치안 유지를 위해 레티우드 가문에서 결정한 사항 아닙니까. 데이비드 님도 따라 주셔야죠.”
검문 담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남자야말로…… 레티우드 가문의 차남인 데이비드 레티우드였다.
그러니까, 레티시아의 남편이다.
“아내가 위험한 상황이다.”
갑자기 절박한 목소리가 튀어나와서.
시리우스는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샤히트 수적단의 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빨리 가서 확인해야 해.”
“샤히트 수적단? 통행료만 제대로 지불하면 별문제 없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지 않다.”
급하게 서류를 작성하면서 데이비드가 화를 냈다.
“이게 다 시리우스라는 놈 때문이다. 빌어먹을 자식.”
갑자기 왜 저래?
난데없이 욕을 먹으니 시리우스도 당혹스러웠다.
“그 녀석이 루펠치아 자경단을 뒤집어엎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치는 줄 알았다.”
“루펠치아 자경단이라면…… 샤히트 수적단과 유착 관계인 놈들이죠?”
“그래, 루펠치아 자경단과 문제가 생겼다면 샤히트 수적단이 장악한 구역을 무사히 통과하기 힘들다.”
데이비드의 목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레티시아가 타고 있는 배가 샤히트 수적단의 습격을 받았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 정신 나간 녀석 때문에……!”
“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통행료를 지불하고 통과했겠죠.”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다! 본보기로 배 몇 척은 가라앉혔을 거라고!”
“아, 알겠습니다. 서류는 이걸로 충분하니 빨리 선착장으로 가 보시죠.”
데이비드는 천랑표국의 선단이 무사히 선착장에 도착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보다 못한 시리우스가 나서서 데이비드에게 말을 걸었다.
“천랑표국의 선단은 무사히 도착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뭐라고?”
데이비드가 놀란 표정으로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지?”
“다들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레티시아 님도 멀쩡하십니다.”
몸에 큰 변화가 있긴 했지만……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
“무, 무슨 소리지? 샤히트 수적단이 가로막았을 텐데?”
“샤히트 수적단이 가로막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없었습니다.”
“문제가 없었다고?”
“샤히트 수적단은 이미 괴멸되었습니다.”
“……!”
데이비드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부하들도 대경실색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샤히트는 그동안 우리 가문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던…….”
“샤히트는 제가 죽였습니다.”
“뭣……!”
데이비드가 눈을 크게 뜨고 시리우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잠깐, 설마 너는…….”
“인사가 늦었군요.”
아내의 언니의 남편이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
“유스티아의 남편인 시리우스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데이비드 형님.”
“……!”
형님.
그렇게 부르며 고개를 숙이는 시리우스 앞에서, 데이비드가 숨을 삼켰다.
* * *
“레티시아, 정말로 무사했군……!”
선착장에 내려선 레티시아를 얼싸안으면서 데이비드가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와 대화를 나눴다.
“사이가 좋으시군.”
“그러게 말이에요.”
냉랭한 계약 부부인 두 사람과는 달리, 레티시아와 데이비드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인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까 벌써 셋째가 생긴 거겠지만…….
“데이비드 님, 잠깐 괜찮으실까요?”
“아, 유스티아.”
데이비드가 레티시아를 놓아주고 헛기침을 했다.
“어려운 길을 오느라 수고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가문에서 미리 호위대를 보내 줄 걸 그랬는데.”
“괜찮습니다. 시리우스가 있었으니까요.”
“시리우스…….”
데이비드의 시선이 시리우스를 향했다.
불편한 감정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루펠치아 자경단을 제압하고, 샤히트 수적단도 쓰러뜨렸다고?”
“네, 사실입니다.”
“이것참…….”
데이비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레티시아를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건 고맙지만 불필요한 싸움을 일으킨 건 좀 문제가 있어.”
“데이비드 님, 불필요한 싸움이라는 건…….”
“싸움을 일으키지 않고 통과할 수도 있었잖아. 레티시아까지 있는데…….”
“…….”
데이비드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 된 입장에서는 아내가 싸움에 휘말릴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희 동부 세력이 남부에서 이렇게 피바람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도 문제 소지가 있어. 남부 연합 차원에서 항의하게 될지도 몰라.”
“데이비드 님, 저희는 어디까지나 저희를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반격했을 뿐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남부의 여러 가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런 얘기를 듣고, 시리우스는 입을 열었다.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형님.”
“시리우스……?”
“저희는 딱히 남부의 어떤 가문의 권리도 침해한 적이 없습니다.”
시리우스는 담담히 말했다.
“루펠치아는 남부의 어떤 가문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도시였습니다. 샤히트 수적단이 점거하고 있던 구역도 마찬가지였죠.”
“그건…….”
“남부의 어떤 가문도 제대로 관리를 안 하는 곳이어서, 저희가 지나가는 김에 정리했을 뿐입니다. 저희는 어떤 가문에도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으음…….”
데이비드가 당혹스러워했다.
“시리우스, 그 말도 맞지만…… 여러 가지 측면이 있어. 다른 가문들이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고.”
“실제로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으니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문제를 제기하는 가문이 있다면 제가 직접 나서서 설명하도록 하지요.”
“…….”
시리우스의 당당한 태도에 데이비드가 할 말을 잃었다.
“데이비드,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피곤해서 빨리 가고 싶은데.”
“아, 알겠어. 마차에 올라타, 레티시아.”
그때 마침 레티시아가 피로를 호소했기 때문에 데이비드가 허둥지둥 레티시아한테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유스티아가 시리우스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무 형부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시리우스.”
“딱히 괴롭히지는 않았는데.”
“보다시피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에요. 큰 야심도 없고.”
“나하고는 정반대군.”
“그렇죠.”
유스티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형부가 아니에요. 레티우드 가문의 장남…… 안드레스 레티우드죠.”
안드레스 레티우드.
가주였던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뒤, 레티우드 가문의 실권을 잡고 있는 인물.
어렸을 때부터 ‘레티우드의 귀공자’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던 실력자.
삼십 대의 나이로 8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남부의 천재 마법사다.
“리겔 가문을 장악할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던 사람이죠.”
유스티아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섞였다.
* * *
레티우드 가문의 본성(本城).
리겔 가문 일행을 데리고 도착한 데이비드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화려한 외모를 지닌 미남자가 펜을 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바로 ‘레티우드의 귀공자’ 안드레스였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 대신 가주 역할을 맡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을 설명해라.”
“그게…….”
데이비드는 시리우스가 루펠치아 자경단뿐만 아니라 샤히트 수적단까지 제압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얘기를 들으면서 안드레스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동부에서 들려오던 얘기가 헛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형님,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시리우스는 그냥 나약한 학자였을 텐데…….”
“아마 리겔 가문에 특별한 마도서가 숨겨져 있었을 거다.”
안드레스가 붉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인 리겔 가문이라면 그런 마도서를 보유하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루트베인 리겔이 시리우스에게 고대 마법을 전수한 거겠지.”
“아……!”
그렇게 추측한 뒤, 안드레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덕분에 우리들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형님…….”
“가장 알맞은 시점에서 동부로 진출해, 네 아내를 리겔 가문의 가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레티우드 가문은 예전부터 리겔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현재의 가주인 루트베인 리겔이 사망한다면 세 명의 딸 중 누군가가 가주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
레티시아를 차기 가주로 만들고, 남편인 데이비드가 리겔 가문의 실권을 잡게 만든다면…… 리겔 가문은 사실상 레티우드 가문에게 흡수되는 꼴이 된다.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인 리겔 가문과 일체화되는 것으로, 레티우드 가문의 격(格)을 크게 끌어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리우스가 나타나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희를 미리 동부로 보내 둘걸 그랬군.”
“남부 연합의 일에 차출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적당한 시점에서 너희를 보내 유테루스 가문을 몰아내고 리겔 가문을 장악할 계획이었는데…… 때를 놓쳐 버렸다.”
“…….”
데이비드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데이비드는 리겔 가문을 장악한다는 안드레스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리겔 가문을 손아귀에 넣지 않아도 레티우드 가문은 남부의 명문가로서 충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게다가 안드레스의 계획대로라면 데이비드도 레티시아와 함께 동북부 리겔 가문으로 향해야 한다.
정든 고향을 떠나 척박한 동북부에서 생활해야 한다니…… 내키지 않았다.
“형님, 그냥 잘 지내보면 어떻겠습니까?”
“뭐라고?”
“장인어른이 시리우스한테 고대 마법을 전수해 준 게 사실이라면 이미 차기 가주를 내정해 놓은 상태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닙니까?”
“…….”
“유스티아 부부가 리겔 가문을 잘 이끌어가도록 지원해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양가가 잘 지내면서…….”
“데이비드.”
안드레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데이비드의 말을 끊었다.
“벌써부터 주눅이 들었군. 시리우스한테 기선 제압이라도 당했나?”
“혀, 형님…….”
“너는 그 유약한 태도가 문제다. 결혼을 하더니 더 심해진 것 같군.”
“…….”
데이비드가 입을 다물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우리가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놈은 우리를 발판 삼아 남부를 야금야금 집어삼킬 거다.”
“형님, 그런 건…….”
“이미 놈은 루펠치아를 쓸어버리고 샤히트 수적단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다. 더 이상 남부에서 활개 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돼.”
“…….”
솔직히 데이비드는 형의 이런 태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은 평상시에는 냉정한 성격인데, 리겔 가문 문제가 되면 지나치게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어떻게든 기선 제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예…….”
“아예, 어쩌겠다는 말씀이시죠?”
바로 그때.
문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안드레스도, 데이비드도 깜짝 놀랐다.
중후한 나무 문 너머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바깥까지 목소리가 들려서 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방음이 잘되는 집무실이라, 바깥까지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다.
저 남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또렷하게 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목소리에 이상한 힘이라도 실려 있는 걸까?
“들어가겠습니다.”
끼익.
두꺼운 문이 열리면서, 장발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마침 제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
숨을 삼키는 형제 앞에서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성큼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내객용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기선 제압을 하고 싶으시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쏘아붙이는 듯한 시리우스의 눈빛 앞에서, 두 형제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