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67화
67화. 흑의인들의 밤
“젠장, 일단 죽여!”
“다들 불러와!”
남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흥분에 휩싸여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우두머리였던,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탓도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그리 똑똑한 놈들이 아니다.
그냥 나인트 길드의 명령을 받으면서 이그레트 공방을 감시하던 놈들이니까.
그 나인트 길드도 결국 연맹 남부 지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라…… 결국 잔챙이 중의 잔챙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커헉!”
“윽……!”
시리우스가 요철검을 휘두르자 다들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다들 제대로 칼을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
“단주님, 저런 잔챙이들은 제가 처리해도 됐을 텐데요.”
“검을 뽑았으면 잔챙이라도 베어야지.”
알레이온에게 그렇게 대꾸한 뒤, 시리우스는 응접실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는 이그레트 공방의 대장장이들이 병장기를 들고 모여 있었다.
“다들 들어라.”
시리우스는 피로 물든 요철검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
“오늘부로 이그레트 공방은 연맹과 인연을 끊는다.”
“……!”
“불만 있는 놈들은 전부 뛰쳐나와라. 내가 상대해 줄 테니.”
하지만 그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하고는 반응이 다른 데, 어떻게 된 거지?”
뒤에서 벨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잠시만요!”
바로 그때 응접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사내가 뛰쳐나왔다.
그는 시리우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검을 거둬 주십시오!”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한번 얘기를 들어 보면 어떨까?”
안드레스의 얘기를 듣고, 시리우스는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기 전에.”
쐐액!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비수가, 뒷문으로 도망치려던 남자의 등에 꽂혔다.
“도망치려는 놈이 있으면 바로 제압해라.”
“네, 맡겨 주십시오.”
“걱정 말라고.”
연맹과 인연을 끊는다고 했는데 도망치는 놈이라면 1순위로 죽여야 할 놈이다.
바깥에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라고 지시해 둔 뒤, 시리우스는 다시 응접실로 들어갔다.
* * *
이그레트 공방의 본래 주인인 아틸란 이그레트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멋모르고 연맹 관계자를 죽여 버렸다가 대장장이 중 절반이 죽고 연맹의 노예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희는 딱히 연맹에 찬동하는 건 아니었다는 얘기군.”
“네, 제대로 값을 못 받고 무기를 만들어 넘겨야 하고, 때로는 금고에서 돈까지 꺼내 가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아틸란을 보고, 안드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레트 공방이 연맹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놀랐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거군.”
“네, 그래서 저희는 연맹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면 오히려 환영입니다. 나인트 길드에서 넘어온 놈들 몇 명은 반대하겠지만…….”
“그놈들은 따로 색출해야겠군.”
아까 몰래 도망치려 했던 놈도 나인트 길드 출신이었을 것이다.
“아틸란, 그 나인트 길드라는 곳은 큰 조직인가?”
“솔직히 저희 이그레트 공방의 힘만으로도 맞설 수 있는 조직입니다. 이 근처 유흥가에서 으스대는 건달 집단이니까요.”
시리우스의 질문에 아틸란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저희는 나인트 길드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인트 길드의 배후에는 더 무서운 조직이 있거든요.”
“더 무서운 조직?”
“싱클레어 검회(劍會)라는 조직입니다. 나인트 길드는 싱클레어 검회의 명령을 받고 저희 공방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 싱클레어 검회가 연맹 남부 지부와 직접 연결되어 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한 단계 더 거쳐야 될지도 모릅니다.”
“…….”
시리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구조가 복잡하군. 계단식이야.”
“네…….”
일단 연맹 남부 지부가 있고.
남부 지부 소속의 간부가 있고.
간부의 명령을 받는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의 명령을 받는 싱클레어 검회가 있고.
싱클레어 검회의 명령을 받는 나인트 길드가 있고.
나인트 길드의 명령을 받는 이그레트 공방이 있고…….
“베르디안, 남부 지부는 원래 이런 식인가?”
“말했을 텐데요. 남부 쪽 사정은 잘 모른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베르디안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있을 법 하기는 하네요.”
“흠…….”
이런 식이라면 나인트 길드 같은 잔챙이들한테도 제대로 맞서기 힘들다.
원래 이그레트 공방은 나인트 길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상위 조직이 두려워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군.”
안드레스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협력해 주실 겁니까?”
“그래야지.”
원래 안드레스는 이그레트 공방을 치는 걸 도와주기로 했었다.
이그레트 공방은 이미 해방되었지만, 안드레스는 계속해서 시리우스와 함께 싸울 생각이었다.
이미 안드레스는 시리우스와 뜻을 함께하는 한 사람의 맹원(盟員)이었다.
“놈들이 계단식 구조이니,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야 할 것 같군요.”
“무슨 소리지?”
“일단 나인트 길드를 치는 겁니다.”
근처 유흥가를 거점으로 하는 놈들이니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인트 길드에서 정보를 얻은 뒤 싱클레어 검회로 갑시다. 싱클레어 검회를 치면 상위 조직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겠고, 그 조직을 치면 그 위에 있는 놈의 정보도 얻을 수 있겠죠.”
“……!”
“어차피 다 쓸어버려야 할 놈들입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전부 밟아 버리도록 하죠.”
시리우스의 말에 안드레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이 필요하겠군. 레티우드 가문의 병력을 소집하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뭐?”
“잔챙이들까지 일일이 소탕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렇게 되면 놈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생깁니다.”
“아……!”
“수장과 간부들 위주로 해치우면서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야 합니다.”
어차피 지금 우선해야 하는 건 흑회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부수는 것이다.
상위 조직의 위세를 등에 업을 수 없게 되면, 나인트 길드 같은 놈들은 그냥 동네 건달로 전락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또 지금 이 멤버들만으로 움직이는 건가?”
“아닙니다.”
이번 일은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놈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소수 정예일수록 좋다.
“우리 둘만 가도록 하죠.”
“…….”
안드레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농담하는 건가?”
“진담입니다.”
“…….”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시리우스의 앞에서, 안드레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 * *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안드레스를 데리고 근처의 도시로 향했다.
그곳의 유흥가가 나인트 길드의 본거지였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죠.”
“갈아입다니?”
“그런 화려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면 안드레스 님이 나타났다는 걸 다들 알아챌 겁니다.”
“…….”
솔직히 안드레스는 외모 자체도 화려한 편이었다.
가문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도 눈에 잘 들어오고, 이목구비도 남자답게 잘생겼다.
여기에 레티우드 가문의 진홍색 예복까지 걸치고 있으면…… 안드레스 레티우드 님이 행차하셨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예전에 벨리드하고 함께 입었던 옷이 있습니다.”
“벨리드하고……?”
벨리드하고 처음 만났을 때 도적들의 본거지를 기습하기 위해 입었던 옷이다.
시리우스 혼자라면 굳이 이런 걸 걸치지 않아도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지만 벨리드나 안드레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게 필요하다.
“흑의인(黑衣人)이 되시는 겁니다.”
“흑의인……?”
“저기 수풀에서 갈아입으시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드레스에게 옷을 건네준 뒤, 시리우스도 다른 수풀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새카만 옷을 입고, 새카만 두건을 뒤집어쓰고, 새카만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니…… 완벽한 흑의인이 탄생했다.
“시리우스, 이게 맞나……?”
잠시 뒤, 수풀에서 안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드레스도 온통 새까만 흑의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옷맵시가 그게 뭡니까.”
“……!”
“좀 보기 안 좋군요.”
안드레스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크게 충격을 받은 눈빛이었다.
“아니, 평소 입던 옷은 내 체형에 맞춘 거였는데, 이건 그런 것도 아니고…….”
레티우드의 귀공자로서 나름 외모에 자부심이 있었던 남자다.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해명을 하려 했다.
“안드레스 님, 원래 흑의인은 멋이 있어야 합니다.”
시리우스는 안드레스의 옷맵시를 교정해 주면서 말했다.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서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는데,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이면 되겠습니까? 검은색 바지 아래로 흰 양말이 보이면 어쩌라는 겁니까?”
“아니, 바지가 너무 짧아서…….”
비수로 바지 밑단을 뜯어서 길이를 늘였다.
두건이나 복면의 각도까지 조정해 주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이제는 좀 흑의인의 멋을 갖추셨군요.”
“그런가……?”
“네, 멋있습니다.”
“고맙군. 자네도 멋있네.”
시리우스와 안드레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자리에 유스티아가 있으면 ‘역시 남자들은 나이를 먹어도 항상…….’ 운운하며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자, 안드레스 님, 이제 우리는 흑의인이 되어 나인트 길드를 습격합니다. 그리고 놈들을 박살 낸 뒤, 바로 싱클레어 검회로 달려갑니다.”
“그다음에는 그 상위 조직으로 쳐들어가는 거고?”
“그렇죠. 그런 식으로 쉬지 않고 달리면서 싹 쓸어버리는 겁니다.”
놈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차례차례 격파당할 것이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와 안드레스 레티우드의 짓이라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흑의인이 리겔 가문의 막냇사위와 레티우드 가문의 귀공자일 거라고 대체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음, 아무도 상상할 수 없지.”
안드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말이야.”
“마치 제가 미친놈이라는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런 측면도 있는 것 같군.”
“동생인 데이비드 님도 솔직하시던데, 형인 안드레스 님도 솔직하시군요.”
“서로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맨 처음에 제안한 건 자네야.”
“뭐, 좋습니다.”
시리우스는 다시 얘기를 되돌렸다.
“나중에 정체불명의 흑의인이 흑회들을 쳐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흑회들도 위축될 겁니다.”
“그런 파급 효과도 있겠군.”
“한편 어떤 놈들은 정체불명의 흑의인을 잡겠다고 여기저기 엉뚱한 곳을 들쑤시고 다니겠죠. 우리는 그런 놈들이 헛수고하는 걸 지켜보다가 하나씩 때려잡으면 됩니다.”
그런 식으로 남부의 흑회들을 뒤집어엎다 보면…… 남부 지부를 책임지는 ‘지부장’이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맹의 최고 실력자 중 하나인 염제의 직속 제자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오늘 밤은 그런 복잡한 건 잊어버리고 흑의인으로서 한바탕 날뛰어 봅시다.”
“흠, 그렇게 하지.”
“대체 누구냐고 물어보는 놈들이 많을 텐데 ‘너희가 알 필요는 없다.’라고만 말해 주십시오.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덧붙여 주면 더 그럴듯합니다.”
시리우스는 안드레스와 함께 도시로 숨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지붕을 뛰어넘으면서 유흥가로 향했다.
안드레스는 8서클의 마도사이기 때문에 비행 마법을 사용하면 시리우스의 경공을 쫓아올 수 있었다.
“얼굴에 흉터 있는 놈이 토해 낸 정보에 의하면 저 건물이 나인트 길드의 본거지입니다.”
“천박한 분위기의 건물이군. 어떻게 들어갈 건가?”
“3층 창문이 열려 있으니 저기로 들어가죠.”
시리우스는 경공으로, 안드레스는 비행 마법으로.
어둠 속에 녹아들어 창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뭐, 뭐야!?”
마침 뚱뚱한 남자가 침대 위에서 젊은 여자와 뒹굴고 있던 중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흑의인 두 사람을 보고 기겁했다.
여자랑 뒹굴고 있는데 갑자기 방 안에 시커먼 놈들이 나타나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너희 누구야?”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묻자 안드레스가 팔짱을 낀 자세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알 필요는 없다, 후후…….”
백 점짜리 흑의인이었다.
아까 시리우스가 가르쳐 준 대사를 정확히 읊었고, 뒤에 덧붙인 웃음소리도 분위기가 있었다.
어쩌면 안드레스는 그동안 이런 일탈의 기회를 기다려 왔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레티우드 가문의 장남이 언제 이런 짓을 해 보겠는가?
“무슨…… 꿰엑!”
시리우스가 휘두른 칼날에 남자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그 비명 소리에 나인트 길드의 조직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도 두 흑의인의 칼날과 마법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남부 흑회 조직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흑의인들의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