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70화
70화.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굴욕에 몸을 떨면서 파사리아는 검을 고쳐 잡았다.
남부 지부의 간부가 된 이래, 이런 치욕을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너는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여 주겠다, 시리우스…….”
왼쪽 어깨에 새겨진 상처는 화염으로 지져서 지혈했다.
일일이 회복 마법을 전개하기도 귀찮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건방진……!”
파사리아는 다시금 시리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불타오르는 요철검을 휘둘러 기술을 펼쳤다.
이 화염의 마법검은 공격 범위가 넓다.
칼날에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데다가, 불꽃을 날려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파사리아는 이 넓은 공격 범위를 활용하여 시리우스를 몰아세웠다.
“하앗!”
쿠쿵!
쏟아지는 불꽃의 세례.
평범한 마법검사라면 제대로 대응 못하고 순식간에 숯덩이가 된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냉기의 방어막을 전개하여 불꽃 자체를 차단했다.
“이상한 기술을……!”
파사리아는 마법검의 화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정면으로 충돌시켜 냉기의 방어막을 깨뜨려 버렸다.
“화력이 대단하군.”
시리우스는 파사리아의 실력을 인정했다.
공격의 기세는 지난번에 싸웠던 샤히트 쪽이 더 좋아 보인다.
하지만 막상 공격의 위력은 파사리아 쪽이 한 수, 아니 서너 수 위였다.
파사리아의 마법검이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있다는 의미였다.
“샤히트에게는 정말 조금만 알려 준 건가.”
“그런 도적놈 따위에게 마법의 정수(精髓)를 알려 줄 것 같으냐!”
쿠쿵!
화염이 터져 나오면서 시리우스를 덮쳤다.
시리우스는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왔지만 옷자락 일부가 불에 탔다.
“흑의인은 깔끔한 옷차림이 생명인데…….”
혀를 차면서 시리우스도 검을 고쳐 잡았다.
파사리아는 만만치 않은 적이었다.
8서클이라 마력량이 많기 때문에 북명의 공력으로 집어삼키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백랑의 공력으로 얼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시리우스는 백랑의 공력을 칼날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치는 거냐……!”
파사리아가 검풍처럼 화염을 방출하면서 추격해 왔다.
이미 파사리아는 시리우스의 검막을 깨뜨렸다. 그래서 아까보다 움직임에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아까보다 대담해진 파사리아를 향해, 시리우스는 공중에서 검을 휘둘렀다.
백랑의 검기가 검풍이 되어 허공을 질주했다.
평범한 검풍이 아니다. 극음의 공력을 그대로 칼날로 만들어서 날렸다.
마치 얼음의 칼날을 날리는 셈이었다.
“……!”
화염을 가르고 날아오는 칼날을 감지하고 파사리아가 다급히 몸을 피했다.
시리우스는 근접전밖에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멀리 있는 상대에게도 공격을 날릴 수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공격은 파사리아의 화염을 파고들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 냉기…… 역시 빙결 마법을 마법검으로 만든 건가? 네 녀석은 대체…….”
파사리아가 당혹스러워하면서 시리우스의 공격을 분석하려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파사리아의 배후로 파고드는 칼날이 있었다.
“윽……!”
촤악!
칼날이 파사리아의 우측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정체는 시리우스가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던 비수였다.
방금 시리우스는 백랑의 공력으로 검풍을 날리면서 왼손으로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파사리아가 아니라 근처에 있던 높은 나무에 꽂혔다.
하지만 비수에는 처음부터 북명의 공력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북명 특유의 인력(引力)을 사용해 다시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렇게 비수를 원격 조종하여 파사리아의 배후를 노린 것이다.
어검술처럼 정교하게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작은 상처를 입혔을 뿐이다.
하지만 파사리아에게 빈틈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시리우스는 어느새 파사리아의 측면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흑영탈명검법의 제일식 낭교인이 펼쳐졌고, 칼날은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늑대의 송곳니가 되었다.
파사리아는 가까스로 몸을 젖혀 치명상을 피했다.
하지만 늑대의 송곳니는 파사리아의 왼쪽 어깨에 구멍을 뚫었다.
“윽……!”
파사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시리우스의 검이 아직 자신의 어깨에 박혀 있는 사이, 억지로 몸을 움직여 시리우스에게 반격하려 했다.
왼쪽 어깨가 아예 떨어져 나가도 상관없다는 듯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 자신의 검으로 시리우스를 찌르려던 순간.
시리우스의 왼손이 파사리아의 칼날을 붙잡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사리아의 칼날은 지금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이걸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시리우스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시리우스의 왼손에는 백랑의 공력이 전개된 상태였으니까.
“윽……!”
차디찬 냉기가 전개된 왼손으로 파사리아의 칼날을 쳐 냈다.
그리고 무방비한 파사리아의 가슴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자비 없는 장법(掌法)이 파사리아의 가슴 정중앙에 작렬했다.
“커억……!”
쿠웅!
파사리아가 무력하게 튕겨져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간 파사리아는 근처 나무에 충돌했다.
그리고 피를 토하면서 숲속에 추락했다.
“끄윽…….”
파사리아의 패인(敗因)은 명확했다.
그녀는 화염의 마법검에 너무 의존했다.
마법검을 더 다채롭게 활용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너무 단조로웠다.
한편 시리우스는 검에만 의존하지 않고 비수나 장법까지 활용하면서 파사리아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거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
“후회하게 될 거다…….”
시리우스가 접근하자 파사리아가 피를 토하며 말했다.
“남부 지부가 너를 가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네가 동부뿐만 아니라 남부 지부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부 전체가 나서서…….”
“알려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겠지.”
시리우스는 다시 복면을 썼다.
오늘 나인트 길드와 싱클레어 검회를 괴멸시키고 프랜시드와 파사리아를 습격한 건 정체불명의 흑의인이다.
놈들이 흑의인의 정체가 시리우스와 안드레스라는 걸 알아채려면 시간이 걸린다.
“너희가 우리를 잡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남부에서 연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거다.”
“……!”
파사리아가 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의 칼날이 그녀의 숨통을 끊었기 때문이다.
차갑게 식어 가는 파사리아에게서 등을 돌리자 복면을 쓴 흑의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잔챙이들을 처리한 안드레스였다.
“해치운 건가?”
“네, 프랜시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죽였다. 자네가 누구인지 눈치챈 것 같아서 말이다.”
“잘하셨습니다.”
“우리 얼굴을 봤던 놈들도 다 해치웠다. 놈들이 먼저 나한테 덤벼들더군.”
프랜시드의 별장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생존자가 있긴 하겠지만 흑의인의 정체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퇴장하면 되겠군요.”
“그래…….”
안드레스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복면을 쓰고 어둠 속을 질주하며 악인들을 처단하고 다니다니…….”
“오늘로 끝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셔야죠.”
“계속해도 되는 건가?”
안드레스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남부에는 악인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싹 쓸어버려야죠.”
“하지만 이렇게 자꾸 하다 보면……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걱정되는군.”
그동안 고상한 집안에서 고상하게 살아온 안드레스다.
이런 일탈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게 알려질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다.
“뭘 걱정하십니까?”
그런 안드레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리우스는 분명한 목소리로 알려 줬다.
“레티우드 가문의 귀공자가 밤이면 밤마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악인들을 사냥하고 다닌다고요?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누가 믿겠습니까?”
* * *
남부 어딘가.
보통 사람들은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은밀한 장소에 가면을 쓴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남부 흑회들을 지배하는 ‘연맹’ 남부 지부의 회합이었다.
“나인트 길드와 싱클레어 검회를 괴멸시키고 프랜시드와 파사리아를 살해한 건 2인조의 괴한으로 보입니다.”
청색 가면을 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른 간부들에게 설명했다.
“놈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색 복면까지 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검은색 두건까지 뒤집어써서 머리카락까지 감췄습니다.”
“치밀한 놈들이군…….”
“철저히 정체를 숨겼단 말이지.”
다른 간부들이 신음했다.
“성별조차 불명인가?”
“두 명 다 남자 목소리였다고 하는데, 목소리를 변조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청색 가면의 남자가 계속 설명했다.
“놈들은 아주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세 곳을 연달아 덮쳐 많은 사람을 죽인 뒤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일에 능숙한 놈들로 보입니다.”
“능숙한 놈들이라…… 대체 누구지?”
“설마 연맹에서…….”
연맹이 언급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맹은 결코 하나로 똘똘 뭉친 조직이 아니다.
남부 지부는 염제 파벌에 속하는데, 다른 파벌에서 남부 지부를 기습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놈들이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는 밝혀졌나?”
“한 놈은 마법검사인 것 같았고, 한 놈은 주로 화염 마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법검사와 화염술사의 콤비인가…….”
그때 흑색 가면을 쓴 여자가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마법검사 쪽은 시리우스 카니스루트 아닌가?”
“……!”
“그놈이 남부를 방문했다면서? 심지어 오자마자 샤히트 수적단을 괴멸시켰다던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래, 동부 지부를 멸망시킨 그놈이라면…….”
“남부 지부도 노리는 건가? 주제 파악도 못 하는군.”
“뇌제의 부하 따위를 해치웠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이군.”
하지만 청색 가면을 쓴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리우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동안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시리우스의 수하 중에 강력한 화염술사는 없습니다.”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싱클레어 검회의 연회장에 남아 있던 흔적을 분석한 결과, 화염술사는 최소 7서클 이상의 마도사입니다. 시리우스의 수하 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시리우스가 아닌 건가?”
“아니, 시리우스가 어디서 화염 마법을 잘 쓰는 마도사를 구해 왔을지도…….”
다들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녹색 가면을 쓴 여자가 손을 들었다.
“혹시…… 그 화염술사가 안드레스 레티우드라면 어떨까요?”
“뭐? 안드레스 레티우드?”
“레티우드의 귀공자 말인가?”
간부들의 시선이 녹색 가면의 여자에게 향했다.
“시리우스는 남부에 와서 레티우드 가문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스는 8서클의 마도사고 화염 마법도 잘 쓰죠…….”
“그러면…….”
“시리우스와 안드레스가 힘을 합친다면 하룻밤 사이 나인트 길드와 싱클레어 검회를 괴멸시키고 프랜시드와 파사리아를 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
“심지어 그날 안드레스가 이그레트 공방에 나타나서 나인트 길드 사람들과 다퉜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확실히 그럴듯한 얘기이긴 하다.
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적색 가면의 남자가 말했다.
“안드레스 레티우드는 예전부터 리겔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동생의 아내인 레티시아 리겔을 차기 가주로 앉히고 리겔 가문을 장악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아…….”
“안드레스 레티우드한테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은 상대란 말이지. 그러니 시리우스 카니스루트와 손을 잡을 일은 없다.”
“하, 하지만…….”
“애초에.”
적색 가면의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레티우드 가문의 귀공자가 복면을 뒤집어쓰고 밤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흑회를 습격하고 다닌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윽…….”
“심지어 방화범처럼 불까지 지르고 다닌다고?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누가 믿겠나?”
다른 간부들도 비웃는 시선을 향했다.
결국 녹색 가면의 여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파사리아까지 죽였으니 이건 우리 남부 지부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 받아들여야 한다.”
적색 가면의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부 전체를 샅샅이 뒤져라. 그 시커먼 2인조를 반드시 찾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