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72화
72화. 한번 싸워 봅시다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
귀가 어두운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식당에서 시리우스와 안드레스는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예고장까지 보냈는데, 유르켈 전장을 습격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재물을 털었으니 상관없습니다.”
바깥에 세워 놓은 짐마차에는 상자가 잔뜩 실려 있다.
유르켈 전장은 습격에 대비해 금고의 내용물을 다른 지점으로 옮기고 있었는데, 중간에서 시리우스와 안드레스가 가로챈 것이다.
“직접 습격도 안 하고 재물을 훔쳤으니 세상에 알려지면 명성이 더 높아질 겁니다.”
“아, 괴도(怪盜)라는 것이군.”
“이제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까지 하면, 의적(義賊)도 되는 것이죠.”
괴도이자 의적.
정체불명의 흑의인에 대한 소문이 또 하나 추가되는 것이다.
“그래도 말이다. 그곳에 우리를 잡기 위해 남부 지부의 간부들이 모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을 습격하면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유르켈 전장은 도시 한복판에 있습니다.”
시리우스는 콩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허름한 식당이지만 음식 맛은 좋았다.
“그곳에서 남부 지부의 간부들과 전투를 벌이면 주위에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아, 그렇군.”
“우리끼리 일방적으로 치고 빠질 때하고는 다르니까요.”
놈들이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고화력 마법을 연발하면 인명 피해도 상당할 것이다.
그건 시리우스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여간, 남부 지부는 우리가 던진 미끼에 제대로 걸려들었습니다. 지금쯤 사태를 파악하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겠죠.”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겠군.”
“그렇게 동요하는 놈들에게 다음 수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끼익 소리와 함께 식당 문이 열렸다.
“…….”
식당 안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그는 근처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시리우스는 다시 안드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은 결혼 안 하십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안드레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하셔서 말입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동생한테 자식이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동생인 데이비드는 레티시아와 결혼해서 자식이 벌써 둘이다.
몇 달 뒤에는 셋이 될 것이다.
“결혼에 뜻이 없으십니까?”
“내 개인적인 의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 가문의 상황이 더 중요한 것이지.”
“지금까지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셨던 겁니까?”
“정략결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양쪽이 원하는 조건이 딱 들어맞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아.”
안드레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쪽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형님도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서 결혼하시죠.”
“지금까지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첫사랑도 없으셨습니까?”
“그건…… 아니, 잠깐. 왜 대낮부터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거지?”
“그럼 한밤중에 해야 합니까?”
“맨정신으로 할 얘기는 아니다. 정 지금 얘기를 하고 싶다면 자네부터 먼저 얘기하든가.”
“다른 얘기를 하죠.”
근처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군.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네.”
“괜찮습니다.”
시리우스는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붉은 머리 형씨는 아직 결혼을 안 한 것 같은데, 자네는 결혼을 한 건가?”
“몇 달 전에 했습니다.”
“그러면 아직 신혼이군. 좋을 때야.”
“어르신은 어떠셨습니까?”
“아니,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했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들처럼 잘생기지 않아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었어.”
남자는 못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눈빛이 너무 날카로웠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섭다고 느낄 만한 인상이었다.
“가끔 여자와 인연이 생겨도 표독스러운 마녀 같은 것들하고만 엮이더군. 그런 것들은 내 쪽에서도 사양이지.”
“여자들 쪽도 어르신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자네 말이 송곳처럼 내 마음을 찌르는군.”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남자가 웃었다.
“그런데 왜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건가? 자네들하고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는 저희보다 두 배 이상 나이가 많지 않으십니까?”
“…….”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젊게 사시는 이유가 뭡니까?”
“젊게 사는 게 싫은 사람도 있나?”
“질문이 적절치 못했군요. 어떤 큰 뜻이 있으신 겁니까?”
“큰 뜻?”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시려는 겁니까?”
“…….”
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동부에 사령 마법을 연구하던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체나 다름없는 몸이 되어서까지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더군요. 리치가 되겠다든가? 뭐, 그런 목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어르신은 그 정도로 추하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노화를 늦추고 있으신 것 같군요.”
천랑무제 백무랑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저 정도는 무림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허용 범위라 할 수 있었다.
“어떠십니까? 더 높은 경지를 탐구하는 과정은 잘 진행되고 계십니까?”
“글쎄, 그건…….”
남자가 말꼬리를 흐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 참, 자네하고 얘기하고 있으니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잊어버릴 것 같군.”
“식사를 하러 들어오신 것 아닙니까?”
“식사부터 하려고 했는데, 주인이 주문을 받지 않는군.”
“귀가 어두워서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계실 겁니다.”
남자가 고개를 내밀어 주방을 들여다봤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주인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네.”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불쑥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얼마 전에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이 했던 얘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연맹 남부 지부에서 경계해야 할 사람이 두 명 있는데, 현(現) 지부장과 전(前) 지부장이라더군요.”
“…….”
“그런데 은퇴한 예전 지부장이 더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 같았습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미 시리우스는 이 남자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식당에 접근하는 거대한 마력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幻王).”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내 이름이지. 본명은 잊어버렸군.”
환왕.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왕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존재다.
하지만 독왕과는 달리 파벌도 없고, 수하도 없다.
연맹 본부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남부 지역에 혼자 틀어박힌 괴짜.
하도 제멋대로여서 연맹에서도 포기하고 있다는 괴인(怪人)이 바로 이 남자였다.
“나는 현 지부장의 요청을 받아 자네들을 잡으러 왔네.”
“현재의 지부장과 사이가 좋으신가 봅니다?”
“자기들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부탁하러 오지. 물론 공짜는 아니야. 사례금을 받으니까.”
“저희를 잡으면 한몫 챙기실 수 있겠군요.”
“그래, 하지만…… 좀 아깝군.”
환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투항할 생각은 없나?”
“남부 지부에 투항하라는 겁니까?”
“아니, 나에게 투항하라는 얘기지. 지부장한테 넘겨주기 아까워서 말이야.”
환왕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남부 지부장을 그만둔 이후, 나한테는 수하가 한 명도 없었지. 원래 무리 지어 다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수하가 필요해졌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수하가 아니라 조수가 필요해졌지.”
그렇게 말하며 환왕이 두 손을 깍지 꼈다.
“내 목표는 10서클에 도달하는 것일세.”
“9서클이 최고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 최고를 넘어선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지.”
“…….”
“나뿐만이 아닐세. 염제도 그렇고, 다른 놈들도 그렇고…… 다들 10서클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어. 아마 대륙 5대 명가의 9서클 가주들도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겠지.”
전인미답의 경지, 10서클.
그것이 연맹 본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남부에 틀어박힌 환왕이 줄곧 연구하던 목표였다.
“그런데 슬슬 혼자서는 한계를 느끼고 있는 참이야. 도와줄 놈들이 필요한데…… 자네들이면 괜찮을 것 같군.”
“이것 참, 기막힌 우연이군요.”
“뭐라고?”
“사실 저도 최고를 넘어선 경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환왕이 눈을 크게 떴다.
시리우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드레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10서클을……?”
물론 시리우스가 추구하는 건 10서클이 아니다.
천랑무제 백무랑이 도달했던 현경을 넘어, 전설 속의 경지인 ‘신화경’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특히 시리우스는 무림에는 없었던 ‘마법’에서 신화경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다양한 마법사와 싸워 보려 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환왕 어르신,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자는 건가?”
“서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 중 아닙니까? 그러니 이렇게 하면 공평하겠군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환왕에게, 시리우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싸워 봅시다.”
“뭐?”
“어르신이 이기면 제가 어르신의 수하가 되겠습니다. 반대로 제가 이기면 어르신이 제 수하가 되어 주시죠.”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친놈이구나.”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서슴지 않고 욕을 하십니까? 상처받습니다.”
“…….”
뻔뻔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시리우스 앞에서 환왕이 입을 벌렸다.
결국 환왕은 옆에서 지켜보던 안드레스한테 물었다.
“원래 이런 놈이냐?”
“이 사람이 좀…… 그렇습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안드레스가 답했다.
“어이가 없군. 뭐 이런 놈이…….”
“싫으면 관두십시오.”
시리우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수하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뭐, 그런 성격이시라면 저도 어쩔 수 없지요.”
“…….”
자기가 이길 게 뻔하다는 식의 발언.
환왕의 신경을 긁는 도발이었다.
“그러면 자네는 어떤가?”
환왕도 지지 않고 물었다.
“나한테 패배하면 순순히 내 수하가 될 건가?”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시리우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수하가 되면 매일같이 제가 한마디씩 할 겁니다.”
“한마디?”
“왜 그렇게 사냐고 말입니다.”
“…….”
환왕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짧게 중얼거렸다.
“좋다.”
그 순간.
주위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수하로 삼으면 더 이상 나불대지 못하도록 그 입부터 꿰매 주마.”
“이건……!”
안드레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까지는 다들 허름한 식당 안에 있었다.
하지만 주위 풍경이 갑자기 달라졌다.
“시리우스, 이건 고유 마법이다! 그것도…… 환영 계열!”
고유 마법.
그것은 세상에 알려져 있는 보편적인 마법이 아닌, 특정 마법사가 창시한 독창적인 마법 체계를 의미한다.
평범한 마법사는 고유 마법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그 마법사가 9서클에 도달한 ‘대마도사’라는 의미다.
“환영이라고 해서 우습게 생각하지 마라.”
검붉은 용암이 곳곳에서 흐르고 있고, 화산이 연달아 폭발하면서 굉음과 연기를 발생시키고 있다.
마치 지옥 같은 화산 지대 한복판에 떨어진 상태였다.
“여기서 타 죽으면 현실에서도 타 죽으니까.”
9서클 대마도사의 목소리와 함께, 막대한 용암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