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75화
75화. 모조리 때려잡는 거지요
니아스 경매장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1층 경매장에 있던 일반 이용객들은 전부 대피했지만, 지하 경매장에 있던 놈들은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전부 불타 죽었다.
놈들은 노리개로 삼을 어린애들을 낙찰받는 중이었다.
“…….”
환왕은 씁쓸한 기분으로 불타는 경매장을 지켜봤다.
이번 습격에서 환왕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냥 시커먼 옷을 뒤집어쓴 채 시리우스와 안드레스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봤을 뿐이다.
“사, 살려, 살려 줘……!”
이 경매장의 주인인 니아스가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 있었다.
경매장에서 인신매매 등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남부 지부의 간부까지 올랐지만…… 지금은 그냥 죽음을 앞둔 소인배일 뿐이었다.
“큰형님.”
니아스 앞에서 서 있던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환왕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참고로 안드레스는 지금 아이들을 탈출시키느라 혼자 바깥에 있다.
“누가 큰형님이냐.”
“그러면 어르신이라고 부를까요?”
“쯧…….”
환왕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시리우스가 니아스를 손가락질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는 사이일 텐데요.”
“……!”
니아스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 혹시 제가 아는 분입니까? 그러면 제발 살려 주십시오……!”
“쯧…….”
어차피 주위에 살아 있는 놈은 니아스 한 명밖에 없다.
환왕은 거추장스러운 복면을 벗었다.
“화, 환왕 전하?!”
“오랜만이다, 니아스.”
니아스는 환왕이 남부 지부장이었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구하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니아스한테 부탁하기도 했다.
“어, 어째서…….”
“나야말로 묻고 싶군. 어째서 인신매매에까지 손댄 거냐?”
환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에는 장물이나 도굴품을 거래하는 일은 있어도 사람은 거래하지 않았을 텐데?”
“화, 환왕 전하…….”
니아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환왕 전하가 지부장을 맡고 있던 시절하고는 다릅니다. 새로운 지부장이 오면서 상납금도 늘어났고, 요구 사항도…… 커헉!”
니아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리우스가 구둣발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지부장이 인신매매도 하라고 요구했나?”
“그, 그건…….”
“남부 지부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심 때문에 사업을 확장한 것 아닌가? 그런 주제에 변명이 많군.”
니아스는 본래 일개 경매장의 주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지부장과 독대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랐다.
그건 인신매매 등으로 막대한 검은돈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인신매매를 강요당했다면 몰라도,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화, 환왕 전하, 살려 주십시오…….”
“…….”
“4년 전에도 환왕 전하가 필요하신 물건을 찾아드리지 않았습니까? 제발…….”
과거에 도움 줬던 일을 들먹이면서 니아스가 환왕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환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때 몇 년 치 생활비를 대가로 지불했다. 거래는 그걸로 끝난 거고, 너한테 빚진 일은 없다.”
“저, 저한테 빚을 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닥쳐라.”
환왕이 오른손을 치켜든 순간.
발버둥 치던 니아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잠시 뒤 온몸을 비비 꼬기 시작하더니……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환영 마법입니까?”
“그래, 그동안 자신이 팔아넘긴 사람들이 모조리 달려들어서 칼을 꽂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정신이 나약한 놈이라면 이렇게 쉽게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시리우스 같은 놈한테는 잘 통하지 않지만 말이다.
“인신매매를 싫어하시는 모양이군요.”
“나도 어렸을 때 인신매매를 당한 몸이어서 말이다.”
“…….”
그 말을 듣고, 시리우스가 입을 다문 채 환왕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아닙니다.”
시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사람이 꽤 많은 듯해서 말입니다.”
“하긴, 베르디안도 그렇지.”
환왕은 베르디안 얘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시리우스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천랑무제 백무랑을 호위하던 십이위병 중에는 묘옹(卯翁)이라는 고수가 있었다.
그는 천마신교의 무인이었으나, 백무랑에게 패배하고 무림맹의 포로가 되었다.
백무랑은 그에게서 협(狹)의 면모를 보고 사흘 밤낮에 걸쳐 설득했고, 결국 묘옹은 백무랑의 수하가 되어 천마신교와의 싸움에 앞장섰다.
그도 어렸을 때 천마신교에 납치되어 억지로 마공을 배웠다는 과거가 있었다.
환왕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본성이 흑색 일변도가 아니라면 묘옹처럼 갱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우, 아이들은 전부 피신시켰어. 나중에 사람을 보내 거둬들일 생각이야.”
“네, 잘하셨습니다.”
바깥으로 나가자 붙잡혀 있던 어린애들을 피신시키고 온 안드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오늘 밤은 슬슬 다음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죠.”
“다음 곳?”
경매장을 뒤로하고 이동하면서 말하자 환왕이 당혹스러워했다.
“니아스 경매장 말고 다른 곳도 습격한다고?”
“우리들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큰형님.”
“아니, 자네들은 졸리지도 않아?”
“흑의인은 원래 졸음을 느끼지 않는 법입니다.”
“뭔 개소리를…….”
흑의인 노릇을 하려면 졸음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흑의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는가.
“어차피 큰형님은 계속 흑의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익숙해지시죠.”
“아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애초에 이런 짓은…….”
“조만간 연맹 남부 지부도 큰형님이 흑의인의 일원이 되었다는 걸 파악할 겁니다.”
“뭐?”
환왕이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 니아스를 환영 마법으로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시리우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영 마법은 흔적이 남지 않죠. 그러니 큰형님이 죽였다는 게 들통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동안 흑의인들은 검과 마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제3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남부 지부는 누구를 의심하게 될까.
남부 지부의 의뢰를 내팽개치고 사라진 환왕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개 같은…….”
환왕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인제 와서 경매장으로 돌아가 니아스에게 다른 흔적을 남길 수도 없다.
“포기하시죠, 큰형님.”
“큰형님 소리 그만해라!”
시리우스가 어깨에 팔을 올리자 환왕이 짜증을 냈다.
“자, 가시죠. 다음에는 아이들을 납치해서 니아스 경매장 같은 곳에 넘기는 쇼들락 연대라는 놈들입니다.”
“크윽…….”
투덜거리면서도 환왕은 계속 따라왔다.
지금이야 아직 어색하지만…… 이제 조금만 익숙해지면 훌륭한 흑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남자는 충분히 갱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확신하면서, 시리우스는 환왕을 데리고 밤길을 달렸다.
* * *
흑의인의 습격이 계속 이어지면서, 연맹 남부 지부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동부 지부와는 달리, 남부 지부는 중소 흑회 조직까지 철저히 관리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흑회 조직들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상황은 남부 지부의 존속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상납금을 바치던 조직들이 차례차례 해체되었고, 남아 있는 조직들도 연맹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부 지부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는 환왕의 배신이었다.
환왕이 흑의인들에게 붙었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했지만, 남부 지부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그래도 흑의인들은 신출귀몰한 놈들이었는데, 환왕의 환영 마법까지 더해지면서 놈들을 추적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렇게 되면 연맹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부 지부장 입장에서 이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력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남부에서 자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이……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천랑표국의 남부 진출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남부의 한 상업 도시에 마련된 천랑표국의 ‘지점’.
그곳에서 유스티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송업에 관여하던 흑회 조직들까지 움츠러든 사이, 남부의 여러 업자와 계약을 체결했어요. 특히 프랜시드 상단이 흔들리고 있는 틈을 잘 파고들었죠.”
얼마 전, 시리우스는 연맹 남부 지부의 간부와 유착 관계였던 프랜시드 상단의 우두머리를 처단했다.
프랜시드 상단은 한동안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이용해 천랑표국이 남부에서 세력을 넓혔다.
“동부처럼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는 건 어렵겠지만 이대로 계속 진행한다면 남부의 물류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하고 있는 것 같군.”
시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스티아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남부 지역을 장악하는 중이다.
시리우스가 온갖 산업에 기생하고 있는 흑회 조직들을 청소해 놓으면 유스티아가 천랑표국을 이끌고 합리적인 협업 체제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리겔 가문은 여전히 동북부의 작은 가문이지만, 시리우스와 유스티아의 협업을 통해 엄청나게 넓은 영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중이었다.
“알레이온, 천랑검단의 현재 상황은 어떻지?”
“천랑검단도 순조롭습니다, 단주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알레이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시리우스가 흑의인 노릇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이, 알레이온은 천랑검단을 이끌며 남부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숫자의 흑회 조직들을 토벌했습니다. 남부 주민들의 평가도 좋고, 저희한테 직접 의뢰가 들어오는 일도 있습니다.”
천랑검단은 천랑표국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남부에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부 상인이나 주민들을 위협하는 흑회들을 토벌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흑의인들이 한밤중에 흑회 수뇌부들을 척살하고 다닌다면 천랑검단은 대낮에 흑회 조직을 괴멸시키고 다니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천랑표국 및 천랑검단의 행보를 불만스러워하는 가문들도 있지.”
시리우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드레스가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남부 연합의 정기 회합이 다음 주에 있다. 분명 거기서 의제로 다뤄질 거다.”
“움직임이 너무 느리군요. 지금 당장 긴급회의를 소집해도 너무 늦었을 텐데.”
“원래 명문가들은 느릿느릿한 법이다. 남부 연합은 더욱 그렇지.”
남부의 여러 가문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영지 가까이에서 동부에서 온 세력이 활개 치고 다니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다.
특히 천랑검단은 매번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니…… 남부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시리우스, 남부 연합에서 천랑표국 및 천랑검단을 제재하기로 결정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렇겠죠.”
안드레스의 레티우드 가문도 남부 연합의 일원이다.
만약 남부 연합이 천랑표국과 천랑검단의 축출을 결의하면 레티우드 가문도 난처해진다.
“그렇다면…… 다음 주까지 연맹 남부 지부를 정리해야겠군요.”
“뭐, 뭐라고? 다음 주까지?”
“그래야지 남부 연합의 회합에서도 할 말이 있죠.”
“……!”
숨을 삼키는 안드레스를 내버려 둔 채 시리우스는 유스티아를 쳐다봤다.
“유스티아.”
“네, 시리우스.”
“우리가 리겔 가문 대표로서 남부 연합의 회합에 출석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줘.”
“남부 명문가들의 모임에 우리들이 출석한다고요?”
“불가능할까?”
“아니요. 이럴 때야말로 대륙 5대 명가의 간판을 써먹을 때죠. 레티우드 가문과 얘기해서 추진해 볼게요.”
“그래, 부탁하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시리우스와 유스티아의 모습을 보고, 안드레스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주 호흡이 잘 맞는군.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다 알 수 있다는 느낌이야. 아주 천생연분이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시리우스와 유스티아가 동시에 반발하자 옆에 있던 벨리드가 쿡 소리를 내며 웃음을 참았다.
“벨리드.”
“나, 나는 안 웃었어!”
한 대 얻어맞을까 봐 벨리드가 몸을 움츠렸다.
“됐으니까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나 말해.”
“아, 그, 그래.”
벨리드가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제 바로 문의가 들어왔어. 엘류스 상회(商會)라는 곳인데, 연맹 남부 지부의 하위 조직이 맞는 것 같아.”
“소문을 퍼뜨리니 바로 걸려드는군.”
“진품인지 확실치 않으니 직접 찾아와서 확인하고 바로 매입하겠다고 하더라고.”
목소리를 낮추면서 벨리드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적염초를 꼭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적염초.
불처럼 뜨거운 기운을 지닌 희귀 약초다.
연맹 남부 지부는 자신들의 상관인 ‘염제’에게 적염초를 바치기 위해 수소문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리우스는 놈들을 낚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어떤 상인이 적염초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지금 남부 지부는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야. 슬슬 본부 눈치도 봐야 하는 상황이지. 자칫하면 남부 지부장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시리우스는 환왕과 베르디안에게서 들은 얘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참고로 환왕과 베르디안은 지금 ‘가짜 적염초’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환영 마법을 쓸 수 있는 환왕과 약초 지식이 풍부한 베르디안이 협력하면 전문가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가짜 적염초를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놈들에게는 적염초가 절실해. 염제에게 적염초를 바쳐서 환심을 얻는다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도 가능해질 테니까.”
“…….”
“놈들은 이 미끼에 걸려들 수밖에 없지.”
그동안 남부 지부는 흑의인들을 잡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남부 지부는 동부 지부와 달리 특정한 본거지가 없기 때문에 수뇌부를 소탕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남부 지부를 최대한 궁지로 몰아넣은 뒤……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시리우스.”
안드레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짜 적염초만으로 남부 지부장까지 유인할 수 있을까? 하수인들만 보낼 가능성도…….”
“미끼는 가짜 적염초만이 아닙니다.”
“뭐?”
“남부 지부장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미끼가 하나 더 있지요.”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흑의인의 두 번째 예고장이 도착할 겁니다.”
“아……!”
적염초는 우리가 가져가겠다.
그렇게 예고장을 보내 놓으면 남부 지부장은 반드시 나타난다.
남부 지부의 정예 병력을 모조리 집결시킨 채.
“그렇게, 놈들을 끌어내서…… 모조리 때려잡는 거지요.”
연맹 남부 지부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