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77화
77화. 결혼을 잘했군
울창한 숲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8서클의 마도사 안드레스의 화염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혼란에 빠진 놈들을 사방에서 습격한 건 미리 매복하고 있던 천랑검단의 검사들이었다.
환왕이 환영 마법으로 위장해 놨기 때문에 놈들이 미리 전방을 확인했어도 들키지 않았다.
검사들은 다들 새카만 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놈들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놈들은 흑의인들을 경계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흑의인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씩 뛰쳐나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둘째, 화염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지금 그들이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이그레트 공방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방화복(防火服)이었다.
염제의 부하들이 사용하는 화염 마법에 대비하기 위해 개발시킨 건데, 이런 상황에서도 쓸모가 있었다.
“이 자식들……!”
“크악……!”
적염초 수송대는 남부 지부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타는 숲속에서 흑의인들에게 습격을 받으니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머릿수는 놈들이 더 많았지만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쓰러졌다.
“하압……!”
알레이온이 마법검을 펼치며 남부 지부의 간부인 올터스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뒤, 시리우스는 다시 지부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무래도 네놈인 것 같구나.”
지부장이 시리우스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초기부터 활동했던 2인조 중 한 명…… 정체불명의 마법검사가 네놈이냐?”
“알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
“닥쳐라!”
“본인이 먼저 질문해 놓고 닥치라고 하다니, 너무하는군.”
시리우스의 말을 듣고 지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안드레스가 다가와서 시리우스 곁에 섰다.
“이 정도 불을 지르면 충분할 것 같군.”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가벼운 말투로 대화하는 두 흑의인들을 보면서 지부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길래…….”
“너희가 알 필요는 없…….”
“형님, 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아, 그래?”
안드레스는 살짝 실망한 목소리였다.
“이봐, 지부장. 우리가 누구일 것 같아?”
“무슨…….”
“연맹의 다른 파벌에서 보낸 방해꾼이라 생각했나? 아니면 어떤 정의로운 명문가에서 보낸 자객?”
“…….”
입을 다문 지부장을 쳐다보면서, 시리우스는 안드레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님, 얼굴을 보여 주시죠.”
“그래도 되는 건가?”
“원래 흑의인은 충격적인 본모습을 드러낼 때가 가장 멋진 법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안드레스가 복면을 벗었다.
그 정체를 확인한 지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형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보여 준 보람이 있군.”
다시 복면을 쓰는 안드레스를 보면서, 지부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지부장은 미칠 것 같았다.
흑의인의 정체가 안드레스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간부도 있었다.
하지만 레티우드 가문의 귀공자가 밤이면 밤마다 복면을 쓰고 악인들을 습격하며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는 얘기였다.
그래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미쳐 버린 건가?! 명문가의 장남이 어떻게 그런 짓을……!”
“나쁜 친구가 꼬드겼기 때문이지.”
안드레스가 담담히 말하는 걸 듣고, 지부장이 눈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네놈은…….”
진실을 깨달은 지부장이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경공을 사용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지부장을 향해 백랑의 검기를 펼쳤다.
“윽!”
쿵!
지부장도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방어했다.
순식간에 화염의 마법검을 전개하면서 시리우스에게 맞섰다.
“이제 보니 전부 네놈의 설계였군! 남부 지부 전체를 농락한 건가……!”
지부장은 8서클의 마법검사이자 화염술사다.
염제의 직속 제자였기 때문에 화염을 다루는 솜씨는 샤히트나 파사리아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타오르는 불꽃을 완벽하게 제어하면서, 시리우스한테 덤벼들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네가 남부 지부를 너무 잘 꾸려 놨기 때문이지.”
“뭐라고?!”
“잘 생각해 봐라.”
검을 부딪치면서 시리우스가 말했다.
“남부 지부는 구조를 아주 잘 짜 놨더군. 꼭대기에 있는 놈이 명령을 내리면 1단계 서열에 있는 놈들이 2단계 서열에 있는 놈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2단계 서열에 있는 놈은 3단계 서열에 있는 놈에게, 3단계는 4단계에…… 뭐 이런 식으로 구조가 짜여 있더구나.”
“…….”
“그 덕택에 꼭대기에 도달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심지어 아래 단계에 있는 놈들은 위 단계에 있는 놈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더군. 아무리 들쑤시고 다녀도 평소에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동부 지부와는 달리 정해진 본거지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직접 습격해서 단번에 승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너희가 만들어 놓은 체제를 모조리 뒤집어엎기로 했다.”
촤악!
백랑의 공력이 실린 칼날이 지부장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지부장이 이를 악물고 물러서면서 화염을 뿜어 댔지만, 시리우스는 냉기의 검풍으로 가볍게 대응했다.
“남부 흑회의 구성원을 모조리 죽일 필요는 없지. 연맹의 지배 체제만 무너뜨리면 되니까. 정체불명의 흑의인 2인조에게 쩔쩔매는 연맹이라니…… 그런 체제에 무슨 권위가 있을까?”
“윽……!”
“그렇게 하면 남부 흑회 조직들은 그냥 오합지졸이 된다. 더 이상 남부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지.”
푸욱!
화염을 뚫고 달려든 시리우스의 칼날이 지부장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다.
피가 솟구치지는 않았다. 차디찬 냉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상처를 얼어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꼭대기인 너를 유인해서 해치우면…… 다 끝나는 거다.”
“네놈……!”
검을 떨어뜨린 지부장의 몸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화염이 칼날뿐만 아니라 지부장의 전신에 깃들었다.
훗날을 대비해 수련한 비장의 절기(絶技)였다.
전신에서 화염을 무차별적으로 뿜어 대면서 시리우스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순순히 당해 주지 않았다.
견고한 냉기의 검막을 펼쳐 화염을 모조리 차단했다.
그리고 검풍을 연속해서 날려 지부장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그 상처로 화기(火氣)가 침투하면서, 지부장은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는 꼴이 되었다.
“오오오……!”
그럼에도, 지부장은 계속해서 발악했다.
마치 야수처럼 포효하면서 시리우스를 덮치려 했다.
거대한 불덩이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시리우스는 냉정했다.
차디찬 검기를 전개한 채 땅을 박찼다.
흑영탈명검법 제일식, 낭교인이 펼쳐졌다.
지부장은 불꽃의 야수였지만 시리우스의 칼날은 그런 야수조차 사냥감으로 삼아 목덜미를 물어뜯는 늑대였다.
“컥……!”
측면에서 파고든 칼날이 지부장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승부를 결정짓는 일격이었다.
“끝났군.”
“크, 윽…….”
지부장이 비틀거렸다.
그 몸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인 상태였지만 시리우스에게 덤벼들 여력은 없었다.
“네, 네놈…….”
마지막 힘을 쥐어짜면서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남부에서 연맹을 몰아낸다고, 네놈이 남부를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지부장의 입에서 저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부 지부를 무너뜨려 봤자 남부의 지배자는 남부 연합이다…… 리겔 가문이 나대는 것을 결코 용납할 리가 없어……!”
스트라우스 가문.
남부 연합의 수장을 맡고 있는,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
그 수장인 샤디엔 스트라우스는…… 9서클에 도달한 대마도사라고 한다.
“대체 어떻게 할 거냐?! 샤디엔 스트라우스에게도 이렇게 싸움을 걸 거냐……!”
“지부장.”
시리우스는 지부장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가 알 필요는 없다.”
“……!”
“그동안 지은 죄를 참회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쓸데없는 것에 관심 갖지 마라.”
지부장의 눈빛이 굴욕감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활활 타오르는 지부장의 시체를 응시하고 있자 뒤에서 알레이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님.”
알레이온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흑의가 피로 젖어 있었지만 알레이온 본인의 피는 없었다.
“전부 정리된 것 같습니다.”
“수고했다. 그러면 슬슬 가자.”
불길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방화복을 입고 있어도 오래 있으면 버티기 힘들다.
“이걸로 연맹 남부 지부는 괴멸된 거군.”
숲에서 빠져나오면서 안드레스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로 흑의인 노릇도 끝인가…….”
“세상에 악인은 많으니 다시 또 흑의인으로서 나설 기회가 있을 겁니다. 뭣하면 개인적으로 활동하셔도 되고요.”
“그, 그런가?”
안드레스가 살짝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지.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뭐, 그렇죠.”
더 중요한 일.
그건 지부장도 언급했던 남부 연합과의 일을 의미한다.
“이제 곧 남부 연합의 회합이 열린다. 자네는 유스티아와 함께 리겔 가문 대표로 출석하게 될 거야.”
남부 연합은 이름대로 남부 명문가들의 모임이다.
하지만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인 리겔 가문의 딸이라면 ‘초청객’의 자격으로 회합에 참석할 수 있다.
시리우스는 ‘부부 동반’으로 함께 얼굴을 내밀면 되는 거고 말이다.
“시리우스, 평소 남부 연합은 회합을 가져도 그냥 친목만 다지고 끝이다. 평상시는 그냥 사교 모임인 거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현재 리겔 가문은 천랑표국과 천랑검단을 앞세워 남부에 진출하고 있다.
남부 연합의 명문가들은 리겔 가문에 한마디 하고 싶을 것이다.
게다가 흑의인들의 난동과 남부 지부의 붕괴도 화제가 될 것이라…… 평범한 사교 모임으로 끝날 리 없다.
“흑회 놈들을 상대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싸움이 될 거다. 그러니 아무 자네라고는 해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냉정했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익숙하니까요.”
“……?”
안드레스는 모를 것이다.
시리우스가 전생에서 수많은 명문 세가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왔다는 것을.
물론 전생에서는 그 명문 세가들에 뒤통수를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 * *
남부 지부와의 싸움을 마친 뒤, 시리우스는 레티우드 가문으로 돌아왔다.
남부 지부의 눈을 속일 필요도 없어진 이상, 이제 레티우드 가문과도 본격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부 연합과의 회합이 시작되기 전에 안드레스와 구체적인 논의를 할 예정이었다.
“오셨군요.”
“유스티아?”
별채로 들어서니 유스티아가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랑표국 업무로 나가 있던 거 아닌가?”
“일찍 끝내고 돌아왔어요. 당신이야말로 이번 일은 잘 끝냈나요?”
“잘 끝났으니까 돌아왔지.”
“잘됐네요.”
유스티아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시리우스가 그녀의 업무에 관해, 일일이 캐묻지 않듯이 말이다.
서로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상대방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런 관계였다.
“이거나 가져가요.”
유스티아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뭐지?”
“보면 알아요.”
시리우스는 상자를 열어 봤다.
상자 안에는 습기 조절을 위한 깃털 이끼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붉은색 약초가 보였다.
“적염초……?”
“네, 필요하면 쓰세요.”
할 말을 잃고 유스티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당신이 한동안 백빙화를 찾아 달라고 난리를 피웠잖아요. 그래서 천랑표국은 대륙 곳곳의 약초 전문가하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어요.”
“…….”
“이번에는 적염초를 찾기 시작한 것 같아서, 그동안 연락하던 전문가들한테 다시 한번 연락을 취해 봤죠.”
유스티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며칠 전, 동부의 명문가인 레스파다 가문에서 답변이 왔더군요. 동남부 섬에서 적염초를 몇 포기 찾았는데, 하나 나눠 주겠다고 말이에요.”
“아…….”
원래 적염초는 더운 날씨의 남부 지역에서만 발견되던 풀이다.
그래서 연맹에서도 남부 지역만 이 잡듯이 탐색했다.
하지만 유스티아는 대륙 전체의 약초 전문가들에게 연락을 취해 적염초를 찾았다.
게다가 유스티아는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인 리겔 가문의 딸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부의 명문가인 레스파다 가문에서 약초를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어째서 미리 얘기를 안 해 준 거지?”
지난번에 다 같이 만나서 근황을 교환할 때도, 유스티아는 이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당신이 가짜 적염초로 연맹을 함정에 빠뜨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굳이 그 얘기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누군가의 입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일이 꼬일 테고.”
“…….”
“당신하고 단둘이서 얘기할 기회도 없었고 말이죠.”
그렇게 말한 뒤, 유스티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필요 없어졌으면 돌려줘요. 알아서 처분할 테니.”
“아니, 그렇진 않아.”
시리우스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뭐랄까…….”
헛기침을 한 뒤, 시리우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결혼을 잘했군.”
“뭔가요, 그게.”
유스티아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