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84화
84화. 나름 보람이 있거든
사방에서 시커먼 옷을 입은 살수들이 날아올랐다.
그 속에서 시리우스는 중얼거렸다.
“기분이 묘하군요.”
“뭐가 말이냐?”
“한동안 흑의인으로 남들을 습격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흑의인들에게 습격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그렇게 태평할 소리를 할 때냐?!”
샤아악!
바람을 가르고 칼날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바람의 칼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동부의 오블레아 용병단이 비슷한 마법을 사용했던 게 떠올렸다.
“질풍 마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조심해라!”
“괜찮습니다.”
파직!
시리우스는 뇌기를 전개하면서 날아올랐다.
창뢰의 공력이 실린 요철검을 휘둘러 바람의 칼날을 요격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전혀 문제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는 눈 감고도 받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컥……!”
하늘로 날아오른 시리우스의 검이 놈 중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순간을 노린 것인지 시리우스의 배후에 바람의 칼날이 쏟아졌다.
하지만 시리우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가슴에서 칼을 뽑는 것보다 먼저 왼손을 움직였다.
콰릉!
왼손에서 뇌기가 방출되면서 바람의 칼날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놈들이 움찔하는 사이, 시리우스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천둥소리와 함께 날아간 검이, 하늘을 날아 도망치려던 놈의 복부를 관통했다.
“포위해!”
누군가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바람의 칼날을 난사하면서 시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결사의 돌격.
자기 중 누군가가 죽더라도 그사이 다른 동료가 표적을 죽여 줄 거라 믿고 있는 움직임이다.
“개죽음이다.”
파직!
시리우스의 양손에서 뇌전이 번뜩였다.
우측에서 달려드는 놈에게 뇌권(雷拳)을 꽂아 넣었다.
주먹이 꽂히는 순간 뇌기가 파고들어 상대를 감전시켰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왼손의 뇌장(雷掌)을 뻗었다.
근접하여 바람의 칼날을 꽂아 넣으려던 놈의 손목을 휘어잡은 뒤 뇌기를 주입했다.
비명을 지르는 놈을 잡아끌며 땅바닥에 착지했다.
그 위로 바람의 칼날이 쏟아져 내렸지만, 놈을 방패로 삼아 모조리 막아냈다.
피투성이가 되어 절명한 놈을 집어 던지면서 다시 비수를 날렸다.
창뢰의 공격이 실린 비수가 한 줄기 뇌전이 되어 한 녀석의 목에 꽂혔다.
문득 시선을 움직여 보니 근처에서 환왕이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 적들에게 맞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은 신경 안 써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시리우스는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급격히 상승하는 시리우스를 보고 놈들이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양력을 사용해 장거리를 직선으로 비행할 때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시리우스의 경공이 더 유리하다.
“컥……!”
“으윽!”
단말마의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북명이나 백랑처럼 다양하게 응용하기는 어렵지만, 창뢰는 빠르게 공격을 퍼붓기 좋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작렬하는 뇌기에 놈들이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하압……!”
마지막으로 남은 놈이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바람의 칼날을 양손의 뇌기로 깨부순 뒤, 그 뇌기를 곧바로 놈에게 쏟아부었다.
감전되어 몸을 비트는 놈에게 뇌각(雷脚)을 꽂아 넣자 놈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지상에 추락했다.
“…….”
시선을 움직이니 팔짱을 낀 채 주위를 둘러보는 환왕의 모습이 보였다.
환왕도 자신에게 달려든 놈들을 전부 제압한 모습이었다.
“다 해치운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주위에 기를 뻗어도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습격자들은 이걸로 끝인 모양이었다.
“이놈들이 풍왕의 수하입니까?”
“그래, 풍왕 직속의 암살자들이지. 연맹에서 가장 민첩한 놈들이다.”
9서클 대마도사인 환왕의 비행 마법을 쫓아온 놈들이다.
바람을 다루는 능력만큼은 매우 우수하다는 얘기였다.
“혹시 양력을 활용한 비행 마법을 개발한 게 풍왕입니까?”
“그래, 나도 풍왕에게서 기본 개념을 듣고 내 비행 마법에 적용했다.”
환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그 자식이 왜 우리한테 암살자를 보낸 거지?”
“연맹을 배신했으니 당연히 암살자를 보내겠죠.”
“그게 누구 탓인데…….”
시리우스를 노려보면서 환왕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자네를 노린 걸 수도 있어.”
“그럴 가능성도 있겠죠.”
시리우스는 동부 지부에 이어 남부 지부까지 괴멸시켰다.
슬슬 본격적인 척살령이 내려져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왜 염제의 부하들이 아니라 풍왕의 부하들이 오는 걸까요? 남부 지부는 염제 파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염제와 풍왕이 서로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어. 오히려…….”
환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내가 모르는 사이 서로 가까워졌을 수도 있겠군. 그동안 나는 연맹 본부하고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도움이 안 되는군요.”
“이 자식이…….”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환왕을 뒤로하고, 시리우스는 다시 북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면 서두릅시다. 빨리 가는 편이 좋겠군요.”
“뭐?”
“만약 풍왕의 부하들이 배신자 처단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표적이 한 사람 더 있을 겁니다.”
시리우스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아까 들었던 양력의 개념을 적용해서 경공을 개량하면 더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디안도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서 움직이죠.”
* * *
“사만구천구백구십구…… 오만!”
선착장에 벨리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오만 번의 삼재검법 훈련을 마친 것이다.
“대단한 근성이군요, 벨리드 님.”
“하하, 별것 아니지.”
근처에 앉아 있던 베르디안이 한마디 하자 벨리드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어라……?”
“오늘 너무 무리했어요. 오만 번은 내일 달성하는 게 나았을 것 같네요.”
“젠장…… 아직도 체력이 부족한가?”
사실 벨리드의 육체 능력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무거운 쇳덩어리인 가검을 수백 번 휘둘러도 육체의 균형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단련을 시작한 지 몇 달 안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벨리드는 지금 상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는커녕 알레이온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대련을 신청했다가 온몸에 타박상만 입었다.
물론…… 알레이온의 기습 한 방에 말에서 낙마하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나아진 상태지만 말이다.
“이제 시리우스 님이 십만 번을 채우라고 하겠네요.”
베르디안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벨리드는 피식 웃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그래, 예전에는 의구심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나름 보람이 있거든.”
오만 번의 가로 베기를 한 만큼.
오만 번의 세로 베기를 한 만큼.
오만 번의 찌르기를 한 만큼.
벨리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난세병자일 때보다 성장했다.
십만 번의 가로 베기와 십만 번의 세로 베기와 십만 번의 찌르기를 완수했을 때 자신은 지금보다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벨리드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좋겠네요.”
베르디안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주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서 말이죠.”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뭐라고요?”
포로로 잡힌 뒤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강제로 일을 돕고 있는 중이다.
뭐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는 말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것 아니었어? 그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닌 것 같던데?”
“……!”
벨리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 베르디안을 동요시켰다.
“연맹으로 돌아갈지, 이대로 시리우스를 도울지,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을 걸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건 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그동안 베르디안이 도망치지 않았던 건, 연맹 남부 지부에 붙잡히면 안 됐기 때문이다.
남부 지부는 염제 파벌이기 때문에 베르디안을 붙잡아 독왕을 몰아세우기 위한 카드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남부 지부는 괴멸되었다.
베르디안이 홀로 도망친다고 해도, 남부 지부 관계자한테 붙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 걸까?
마음대로 도망치면 반드시 추적해서 다시 붙잡아 오겠다고 시리우스가 협박했기 때문에?
“…….”
자신은 연맹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걸까.
베르디안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르디안, 여기 있었군요.”
“유스티아 님.”
그때 유스티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모습을 나타냈다.
“잠깐 괜찮을까요?”
“왜 그러시죠?”
“시리우스가 부탁한 약재들을 감정해야 해서요. 일단 천랑표국에서 살펴보긴 했는데, 역시 당신이 직접 감정하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아서요.”
“약재……?”
“아, 아직 얘기를 못 들은 모양이군요.”
유스티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리우스가 십여 가지 약재들을 적어 주면서 구해 달라고 했어요. 그것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약을 만들고 싶다면서.”
“새로운 약이요?”
“동부로 가는 동안 배 위에서 당신과 의논하면서 실험을 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베르디안은 조금 허를 찔렸다.
시리우스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시리우스가 예전에 말하더군요. 옛 기록에만 남아 있는 ‘영약’이라는 걸 만들어 보고 싶은데,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영약……?”
“솔직히 저는 당신을 천랑표국에 초빙해서 전문 감정사로 고용하고 싶은데…… 시리우스가 절대로 놔주지 않을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면서, 베르디안이 뭐라 말하려 했을 때.
갑자기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
베르디안은 전투력을 잃은 상태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만큼은 여전했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선착장에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특징 없는 얼굴의 남자다.
하지만 연맹에서 자라난 베르디안은 알 수 있었다.
저건 암살자, 그것도 풍왕 직속의 질풍술사다.
그는 맨손이었다.
하지만 풍왕 직속의 암살자라면 이 거리에서도 바람의 칼날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말이다.
베르디안은 다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베르디안이 피하면 유스티아가 바람의 칼날을 정통으로 맞게 된다.
유스티아는 마법사가 아니다. 몸집도 작고, 연약한 편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베르디안은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을 포로로 잡은 남자의 아내가 죽을까 봐 몸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암살자가 베르디안을 향해 손을 움직이며 바람의 칼날을…….
“……!”
콰직!
쇳덩이가 골격을 박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암살자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땅을 굴렀고, 바람의 칼날은 제대로 사출되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졌다.
“이런 곳에서 몰래 질풍 마법을 전개해?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운 엘리트이면서, 시리우스가 직접 전수한 삼재검법을 오만 번 수련한 남자.
벨리드의 일격이 풍왕의 암살자를 침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