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85화
85화. 더 의미 있는 인생
시리우스와 환왕이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풍왕의 암살자는 이미 자결한 상태였지만 베르디안과 벨리드의 얘기를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
“잘했다, 벨리드.”
“이 정도야 뭐.”
위험한 상황이었다.
유스티아 곁에 호위 담당이 있긴 했지만, 인파 속에 숨어든 풍왕의 암살자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베르디안은 마력을 잃어 전투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벨리드가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공부한 벨리드는 근처에서 누군가가 몰래 질풍 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는 걸 감지했다.
그렇기에 손에 들고 있던 가검으로 그 배후를 급습했다.
벨리드는 이미 삼재검법을 오만 번 수련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아무런 살기도 없었기에 암살자도 전혀 눈치챌 수 없던 것이다.
“오만 번을 채웠다고?”
“그래, 다음에는 십만 번인가?”
벨리드의 표정은 밝았다.
자신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벨리드.”
“응?”
“앞으로는 나하고 대련도 하자.”
“……!”
벨리드가 눈을 반짝였다.
지금까지 알레이온하고 종종 대련을 했지만 시리우스하고는 한 번도 붙어 본 적이 없다.
“나도 삼재검법으로 할 테니까.”
“조, 좋아! 내 실력을 보여 주지!”
시리우스는 벨리드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을 거둬들이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유스티아하고도 대화를 나눈 뒤,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을 찾아갔다.
베르디안은 환왕과 함께 암살자의 시체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운이 좋았다.”
환왕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마력을 잃은 베르디안 한 사람만 죽이기 위한 거라, 암살자를 한 명밖에 보내지 않았지. 만약 암살자가 여러 명이었으면 무사히 넘어가기 힘들었을 거다.”
“그랬겠죠.”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명의 암살자가 동시에 질풍 마법을 사용했다면 피해가 컸을 것이다.
“얘기를 듣고 현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니 베르디안이 몸을 피하려 했으면 자네 아내가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더군.”
“그랬습니까?”
“그래서 베르디안도 대응이 늦어졌던 모양이야. 벨리드가 바르게 달려들어서 살았던 거지.”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을 쳐다봤다.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딱히, 당신의 아내를 지키려 했던 건 아니에요.”
“…….”
“순간적으로 판단이 느려졌을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베르디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잃지만 않았어도 풍왕의 암살자 앞에서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텐데 스스로가 한심하네요.”
“안타까운 일이군.”
“누구 탓에 이렇게 되었는데…….”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베르디안 옆에서, 환왕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도망치기가 더 어려워졌군.”
“큭…….”
“지금까지는 남부 지역을 장악한 염제의 부하들만 경계하면 됐지만 이제는 대륙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풍왕의 암살자들까지 경계해야 해. 그러니 계속 시리우스를 따라다니는 편이 그나마 안전할 거다.”
환왕의 말을 듣고, 베르디안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왕 전하는…… 시리우스 님을 따라다니기로 이미 결심하신 모양이군요.”
“이제 와서 연맹 본부에 복귀하기도 뭣하고 말이다.”
“좋으시겠네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실 수 있어서.”
“그렇지. 자네처럼 세뇌당한 몸이 아니니까.”
베르디안이 환왕을 노려봤다.
하지만 환왕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슬슬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다, 베르디안.”
“환왕 전하…….”
“자네는 독왕을 어머니처럼 여기면서 충성을 바치고 있지. 하지만 독왕에게 자네는 그냥 실험 대상 중 하나일 뿐이야. 독왕이 자네를 진정으로 아낀다면 이미 심복을 보내 자네를 구출하려 했겠지.”
“…….”
“정신 차려. 독왕은 자네를 납치해서 온갖 약물을 처먹이면서 인체 실험을 한 마녀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쏘아붙인 뒤, 환왕은 베르디안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리우스, 그러면 나는 바깥을 한 번 더 둘러보겠다. 풍왕의 수하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환왕이 밖으로 나가자 시리우스는 베르디안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베르디안.”
“네…….”
“유스티아를 지켜 줘서 고맙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베르디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얘기는 뭐죠?”
“그 얘기라니?”
“유스티아 님에게 들었어요. 저를 데리고 무슨 약을 조합한다면서요?”
“그러고 보니 아직 너한테 얘기를 못 했군.”
그동안 시리우스는 남부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팔테온과 함께 여러 가문을 방문하며 협조 요청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르디안과 차분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베르디안, 조만간 나는 성제각(聖濟閣)이라는 기관을 만들 생각이다.”
“성제각이요?”
성제각은 무림맹에 있던 사각(四閣) 중 하나다.
무림맹에서 의료를 담당하던 곳으로, 부상을 입은 맹원들을 치료하고 금창약 등을 생산하여 배급했다.
또한…… 영약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영약’이라 불리는 약을 만들 거다.”
“영약이요?”
“아주 먼 옛날에 사용되던 특수한 약이야. 아마 너는 들어 본 적도 없겠지.”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지금과 같은 힘을 얻은 건, 그 영약을 복용했기 때문이다.”
“……!”
베르디안이 눈을 크게 떴다.
“영약을 복용하면 ‘내공’이라는 기운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힘은 전부 그 내공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지.”
“자, 잠깐만요. 그러면 당신이 백빙화나 적염초를 찾던 것도…….”
“그래, 그 약초들이 내 몸에서 영약으로 작용해 막강한 내공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야.”
“아……!”
이런 개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평범한 사람이 백빙화나 적염초를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영약을 개발해야 해.”
그래서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에게 부탁하여 다양한 약재를 모았다.
이쪽 세계의 약재를 조합하여, 보다 안정적인 영약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영약을 만들어 낸다면 내공을 지닌 무인들을 육성할 수 있다.
영약을 복용한 무인들에게 무림의 무공을 전수하면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시리우스 혼자서는 영약 개발이 불가능하다.
이쪽 세계의 약재들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다, 베르디안.”
“당신하고 힘을 합쳐서…… 영약이라는 걸 개발하라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시리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완성된 영약은, 네가 가장 먼저 복용하게 될 거다.”
“……!”
“놀랄 필요 없다. 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
베르디안을 거둬들였을 때부터, 시리우스는 이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베르디안, 너는 마력을 잃었다. 서클이 파괴되어서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지. 하지만…… 내공을 쌓는 건 가능할 거다.”
“……!”
“내공을 사용해서 싸우는 법을 배워라. 내가 직접 지도해 줄 테니까.”
그동안 시리우스는 알레이온이나 벨리드 등에게 검술을 가르쳐 왔다.
하지만 내공을 사용하는 무공은 가르쳐 주지 못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인해 본 결과, 마력과 내공을 동시에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디안은 마력을 잃은 상태다.
그러니 영약을 복용하면 단전에 내공을 축적할 수 있다.
시리우스가 제대로 지도해 준다면 베르디안은 이 세계에서 최초로 내공을 사용하는 무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리우스 님, 어째서죠? 저는 연맹 출신이고, 줄곧 시리우스 님에게 반항적인 태도로…….”
“그동안 여러 번 말했을 텐데.”
말을 더듬는 베르디안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말했다.
“나는 네가 갱생하기를 바랄 뿐이다.”
“……!”
갱생이란 무엇인가.
풀이하면 ‘다시 산다’라는 뜻이다.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이 다시 살기를 바랐다.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난 자신처럼.
“베르디안, 너는 지금까지 독왕의 노예로서 살아왔다. 그 삶을 끝내라.”
“…….”
“그리고 내가 만들 새로운 맹(盟)의 일원으로서, 밝은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는 거다.”
천랑무제 백무랑이 죽고,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로서 다시 살기 시작했듯이.
베르디안도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너는 성제각의 책임자인 성제각주(聖濟閣主)가 될 거다. 대륙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만들어 주마.”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독왕을 따르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해 주마.”
더 의미 있는 인생.
그 말을 듣고, 베르디안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 *
시리우스가 바깥으로 나가자 환왕이 근처 건물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얘기는 다 끝났나?”
“네, 끝났습니다.”
“그래.”
환왕이 북쪽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왕은 마녀 같은 여자다.”
“…….”
“어린아이들을 끌고 와서 강제로 독약을 공부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가 독에 중독되어 죽어 버리지. 심지어 독을 사용해 서로를 죽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놈들을 자기 심복으로 삼지.”
고독(蠱毒)을 떠올리게 하는 얘기였다.
“그런 짓을 하는데도 아이들은 독왕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독왕을 어머니처럼 느끼도록 세뇌해 뒀기 때문이지.”
“…….”
“그러니 베르디안을 진심으로 구제하려면…… 독왕을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환왕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하여간…… 주위에 딱히 수상한 놈들은 없더군.”
헛기침을 하면서 환왕이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 조만간 새로운 놈들이 나타나서 우리 목숨을 노릴 테니까.”
“풍왕 밑에 실력 있는 암살자들이 많습니까?”
“많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더 강한 놈들을 보낼 거다. 이번에 나타난 놈들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까.”
“지금쯤 누구를 보낼지 고민 중이겠군요.”
“그래, 우리가 서부로 들어갈 무렵에는 새로운 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겠지.”
환왕이 피식 웃었다.
“시리우스, 내가 장담하지만, 서부 여행은 상당히 고달플 거다. 안 그래도 서부는 동부나 남부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지역이니까.”
예전에 유스티아한테도 들었다.
서부에 진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지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그렇기에 유스티아는 큰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라고 한다.
리겔 가문의 장녀, 티타니아 리겔은 지금 서부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연맹도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다. 현재 서부 흑회들을 주름잡는 건…… 흑철맹(黑鐵盟)이라는 세력을 이끄는 제피로스라는 놈이다.”
“제피로스…….”
“많은 흑회들을 굴복시키고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남자지. 언젠가 연맹을 꺾고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고 환왕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랑 비슷하군. 그놈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지?”
“뭘 어떻게 합니까.”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갱생이 가능할 것 같은 놈이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패고, 갱생이 불가능할 것 같은 놈이면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