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86화
86화. 호락호락하지 않다면
출발하기 전, 레티우드 가문에서 배웅을 나왔다.
레티시아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유스티아를 배웅하러 왔다.
“유스티아, 남편하고 잘 지내도록 해. 가끔은 애교도 부리고.”
“알아서 잘할 테니까 본인 몸이나 신경 쓰세요, 언니.”
“너는 너무 태도가 딱딱해서 문제야. 가끔이라도 좋으니 남편 앞에서는 귀여운 모습도…….”
유스티아가 작은언니의 잔소리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동안 시리우스는 안드레스, 데이비드 형제와 인사를 나눴다.
“나도 현무위단에 참가하게 되었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남부 지역을 더 평화롭게 만들어 볼 생각이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형님.”
“서부에서 가서도 성과를 거두길 기도하고 있을게.”
데이비드에게서 격려의 말을 듣고 있자 안드레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리우스, 서부는 거친 지역이다. 솔직히 만만치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나도 가서 도와주면 좋겠지만…… 지금 남부 지역에서 내가 빠지면 안 될 것 같더군.”
안드레스는 남부 현무위단에서 중요한 전력이다.
만약 연맹에서 강력한 마법사를 파견해 남부 지부를 재건하려고 하면 안드레스가 나서야 한다.
게다가 안드레스는 무영각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하는 상황.
시리우스를 따라다니며 여행을 하는 건 어렵다.
“남부는 안드레스 형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시리우스…….”
“아직도 남아 있는 악인들…… 확실히 뿌리를 뽑아 주시길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하자 안드레스가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스는 평소 현무위단의 일원으로서 치안을 지키겠지만 필요할 때는 흑의인이 되어 악인들을 직접 처단할 것이다.
“그럼 슬슬 출발 시간이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리우스는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배에 올라탔다.
강물에는 다수의 화물선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랑표국의 ‘남부 지부’에서 새로 구성한 선단으로, 서부로 운반할 화물이 잔뜩 실려 있는 상태다.
이대로 강을 따라 이동하여 서부 지역에 진입할 것이다.
“알레이온, 인원 배치는 끝났나?”
“네, 사방을 제대로 경계할 수 있도록 배치해 두었습니다.”
알레이온의 대답을 듣고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천랑검단의 경비 태세를 더욱 강화했다.
이제는 수적들뿐만 아니라 풍왕의 자객들도 경계해야 하니까.
“오만육백오십일…… 오만육백오십이…….”
어디선가 벨리드가 삼재검법을 수련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리우스는 한 바퀴 돌아보면서 선단을 점검한 뒤, 선실로 향했다.
구석진 방에 들어서니 약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베르디안, 약재는 전부 정리했나?”
“네, 다 끝났어요.”
베르디안은 미리 들여놓은 약장을 활용해 모든 약재를 정리했다.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면 슬슬 시작해도 되겠군.”
시리우스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베르디안도 의자에 앉은 채 시리우스와 마주 봤다.
“영약의 기초 이론부터 설명하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르디안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시리우스가 가르쳐 주는 새로운 지식을 제대로 흡수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물론 베르디안은 아직 독왕의 세뇌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지금 당장 독왕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가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베르디안을 갱생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만약 시리우스의 진심이 통한다면…… 베르디안은 이 세상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 *
서부로 가는 여정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수상한 놈들이 기웃거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수적들도 덤벼들지 않았다.
지난번에 샤히트 수적단이 괴멸되었다는 소문이 수적들 사이에서도 퍼져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지레 겁을 먹고 직접 찾아와서 항복하는 수적들도 있었다.
“슬슬 보이는군요.”
시리우스는 유스티아와 함께 뱃머리에서 전방을 확인했다.
“저기가 서부 지역의 출입구 역할을 한다는 팔라미아 시(市)인가?”
“네, 화물도 전부 저기서 내리게 될 거예요.”
팔라미아는 꽤 큰 규모의 상업 도시다.
남부 지역의 풍부한 식량 자원은 강을 통해 팔라미아에 전달되어 서부의 각 지역으로 보내진다.
“티타니아 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
티타니아 리겔.
리겔 가문의 장녀이며 유스티아의 큰언니다.
그녀는 서부의 주요 명문가 중 하나인 그란츠 가문과 결혼한 이후, 줄곧 서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스티아, 선단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팔라미아에 들어가 봐도 될까?”
“네?”
“미리 현지 상황을 살펴보고 싶어서 말이야.”
풍왕의 암살자나 서부 현지 세력이 선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시리우스가 미리 도착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 사람한테 얘기해.”
“알겠어요.”
시리우스는 돛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돛대 위에는 환왕이 팔짱을 낀 채 걸터앉아 있었다.
자리를 비우는 사이 선단을 습격하는 놈이 있어도 환왕이 대처해 줄 것이다.
“그러면 먼저 가 있지.”
“네, 문제가 있으면 신호를 보내 주세요.”
유스티아와의 얘기를 마친 뒤, 시리우스는 경공을 사용해 도약했다.
지난번에 환왕에게 비행 마법의 원리를 들은 이후, 예전보다 경공의 체공 시간이 늘어난 상태였다.
그렇게 앞서간 시리우스는 어느새 팔라미아에 도착했다.
‘번잡한 도시군.’
팔라미아는 시리우스가 지금까지 둘러본 도시 중에서 가장 번잡한 분위기였다.
도시의 규모는 남부의 대도시들이 더 컸지만 팔라미아처럼 시끌벅적한 곳은 처음이었다.
‘상인들도 거칠어 보여. 이게 서부인가.’
서부 지역은 동부나 남부하고는 달리 지역 전체가 혼란스러운 곳이다.
여러 흑회 조직들이 끊임없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명망 높은 가문들도 이 싸움에 참가한다.
그동안 시리우스가 여러 얘기를 들어 보니…… 서부 지역은 천랑무제 백무랑이 살던 무림하고 비슷한 느낌이었다.
“…….”
시리우스는 도시를 둘러보면서 사방으로 기를 뻗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마법사가 숨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4서클 내지는 5서클 상당의 마력이 몇 군데에서 느껴졌는데…… 이 도시에서 활동하는 흑회 조직의 간부들 같았다.
실제로 접근하여 살펴보니 딱히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별로 경계할 만한 요소는 없는 것 같군.’
일단 지금은 안전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리우스는 선착장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선단이 도착할 때까지는 한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 식사를 하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음식 나왔습니다.”
가게 안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주문을 하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밀가루로 만든 면을 삶은 뒤 소스에 볶은 요리였다.
‘이런 건 젓가락으로 먹고 싶은데 말이다.’
전생에 국수를 먹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시리우스는 포크로 식사를 시작했다.
가게는 별로 깨끗하지 않았지만, 음식 맛은 훌륭한 편이었다.
‘사람이 많은 이유가 있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식당에 들어온 중년 남자가 시리우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시리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리가 부족하기도 했고, 다른 손님들도 다 합석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형씨는 어디서 오셨소? 외지인 같은데.”
“…….”
그때, 주문을 마친 그 남자가 시리우스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음식이 나오는 걸 기다리면서 잡담할 상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남부에서 왔소만.”
“아하, 남부.”
시리우스가 담담히 대꾸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가 요새 시끄러웠다는데.”
“조용하진 않았소.”
“시리우스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소? 그 사람이 연맹 지부를 괴멸시키고 남부를 평정했다던데.”
“…….”
시리우스는 잠시 포크를 멈췄다.
설마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 사람이 이제는 서부로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일 것 같소?”
“내가 알기로 거짓은 아니오.”
“어허…… 이번에는 서부에서 한바탕해 보려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혀를 찼다.
“쉽지 않을 텐데.”
“뭐가 말이오?”
“서부 흑회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남자가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지역 흑회들은 명문가들 눈치를 보는 겁쟁이들이지만, 여기 서부 흑회들은 다르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명문가의 자식이든 사위든 반드시 죽여 버리려고 하고, 그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지.”
“…….”
“연맹의 지부를 괴멸시켰다? 다른 지역 흑회들은 그 얘기만 듣고도 벌벌 떨겠지만, 여기 흑회들은 그렇지 않소. 그냥 코웃음만 칠 뿐이지.”
그렇게 떠드는 사이, 남자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남자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계속 떠들어 댔다.
“시리우스가 서부에 도착하면 일단 분위기 파악부터 해야 할 거요. 잘난 척하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그러면 며칠 안에 시체로 발견될 거요.”
“…….”
“어디서 고대의 마법을 배워서 쟁쟁한 마도사들도 다 꺾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싸운 결과 아니겠소? 서부 흑회들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죽이려 들면 끝이지.”
정말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시리우스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지만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그냥 계속 듣고 있었다.
“그러면 시리우스가 어떻게 해야 하겠소?”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남자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부터 숙여야지.”
“고개부터? 그래야 하는 것이오?”
“그렇소.”
시리우스가 자꾸 물어보자 남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나 같으면 팔라미아를 주름잡는 더스텐 일파를 먼저 찾아가 인사를 올리겠소. 앞으로 서부에서 활동해 보려고 하는데 잘 부탁한다고 말이오. 그러면 적어도 팔라미아에서는 등에 칼 맞을 일이 없겠지.”
“팔라미아를 주름잡는 건 그란츠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에이, 그래도 팔라미아 뒷골목을 주름잡는 건 우리 더스텐 일파요.”
우리 더스텐 일파.
그 말을 듣고, 시리우스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깨달았다.
“더스텐 일파 소속이셨군.”
“어이쿠, 내가 말실수를 했구만. 내가 조직원이라는 걸 드러내면 다들 겁먹는데, 하하.”
허세는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옆자리 손님들이 얘기를 엿듣고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팔라미아에도 여러 조직이 있지만, 흑철맹(黑鐵盟)에 인정받은 건 우리 더스텐 일파뿐이오.”
“흑철맹…….”
“남부 사람이어도 이름은 들어 봤을 거요.”
흑철맹.
서부에서 가장 세력이 큰 흑회 연합이다.
제피로스라는 젊은 실력자가 다른 흑회 조직들을 굴복시키고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다.
서부에서는 연맹보다 흑철맹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한다.
“시리우스가 소문대로 연맹과 싸우고 있다면 흑철맹이 힘을 빌려줄 수도 있을 거요.”
“그래서 더스텐 일파에게 잘 보이게 미리 인사를 드려야 한다?”
“그렇지. 더스텐 형님한테 잘 보이는 게 곧 흑철맹한테 잘 보이는 일이오.”
거들먹거리면서 남자가 접시에 남아 있던 면을 모조리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배를 두들기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시리우스가 서부에 도착하면 한번 지켜보시오. 그 남자가 똑똑하게 행동하는지, 어리석게 행동하는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도 마쳤으니 이제 수다도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윽?!”
바깥으로 나가려 했던 남자가 신음 소리를 냈다.
시리우스가 갑자기 남자의 팔뚝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뭐, 뭐요?”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팔을 빼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스텐 일파를 방문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안내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안내?”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면서?”
시리우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해야 똑똑한 거라고 조언을 해 줬으니 조언을 따라야지.”
“뭐……?”
남자가 시리우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자, 어서 가자.”
시리우스는 남자를 가게 바깥으로 끌고 갔다.
남자는 저항하려 했지만, 시리우스의 힘이 워낙 강해서 아무 소용 없었다.
“너희 형님한테 인사를 드리고…… 흑철맹한테도 소개를 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니까.”
서부 흑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면 그들에게 알려 주면 된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야말로, 진정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