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98화
98화. 뭘 그렇게 자신만만했나?
가르발디, 캐스퍼, 바스타리안.
풍왕의 부하 세 사람이 세 방향에서 명백한 적의를 드러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격을 시작할 듯한 분위기였다.
한편 이쪽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환왕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 웃고 있었고.
베르디안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고.
벨리드는 별생각이 없는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물론 시리우스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8서클에 도달한 풍왕의 심복 세 명이 눈앞에 있어도……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거, 어쩔 수 없겠군요.”
가르발디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교섭은 포기하지요. 정신병자를 상대로 교섭을 하려 하다니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르발디가 환왕을 쳐다봤다.
“환왕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서로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가르발디가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싸울지 정하시지요. 다 같이 싸우든, 아니면 한 명씩 나와서 싸우든, 우리는 상관없으니.”
“…….”
시리우스는 신선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리운 기분이라 하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무림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오는 자들이 많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보기 힘들었으니까.
그만큼 놈들이 자신만만하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흐음.”
환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어떻게 할까?”
“여럿이서 싸우면 주위의 피해가 커지겠죠.”
시로크의 질풍 마법을 생각하면 여러 명이 싸울수록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다.
“일대일로 싸웁시다.”
“그래, 그게 낫겠군.”
대화를 들은 가르발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나오시겠습니까?”
가르발디가 환왕을 쳐다봤다.
눈빛이 마주친 환왕이 앞으로 나오려 했지만, 시리우스가 어깨를 붙잡았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왜?”
“굳이 처음부터 서열 1위가 먼저 나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서열 1위라고 치켜세워 주니 환왕이 순순히 물러섰다.
“내가 먼저 싸우겠다, 노인장.”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왼쪽 길을 가로막고 있던 캐스퍼가 말없이 다가왔다.
그녀는 상처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캐스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질문이다, 가르발디.”
캐스퍼가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리우스는 내가 죽일 테니 너는 환왕을 상대할 준비나 하고 있어.”
“흠, 알겠습니다.”
가르발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시리우스는 환왕에게 말을 걸었다.
“환왕, 민간인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적당히 환영 마법을 전개해 주시죠.”
“하고 있는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벨리드와 베르디안이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길 한가운데에서 시리우스와 캐스퍼만 대치하게 되었다.
“…….”
캐스퍼는 허리에 여섯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소에 검을 휘두르던 근골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검을 여섯 자루나 들고 다니는 것일까.
시리우스는 그 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
길거리에 짧게 바람이 분 직후, 캐스퍼가 두 손을 움직였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으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동작은 눈속임이었다.
파파파파파팟!
여섯 자루의 검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손도 대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상대를 향해 날린 것이다.
일제히 솟구친 여섯 자루의 검이 바람을 타고 질주했다.
물론 목표는 시리우스였다.
쐐애애애애애!
여섯 자루의 검이 일제히 허공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 각기 다른 궤도를 그리면서 상대를 습격하게 하는, 경이로운 비검술(飛劍術).
마음만 먹으면 여섯 명의 상대를 동시에 죽이는 것도, 한 명의 상대에게 여섯 개의 치명상을 동시에 입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대의 실력이 평범할 경우의 얘기다.
“……?!”
콰앙!
굉음과 함께 시리우스가 땅을 박찼다.
여섯 자루의 검으로 구성된 포위망은 완벽에 가까웠으나, 시리우스는 그 포위망이 정말로 완벽해지기 전에 뛰쳐나왔다.
캐스퍼가 처음부터 이런 전법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싸웠던 시로크도 바람의 힘으로 물체를 날려서 공격했다.
평소 검을 휘두르던 근골이 아닌데 여섯 자루의 검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손에 잡고 휘두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풍 마법으로 날리기 위한 것이다.
만약 이게 제대로 된 이기어검이었다면 시리우스도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캐스퍼의 기술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고, 시리우스가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다.
“커헉!”
푸욱!
푸른색 뇌기를 전개한 검이 캐스퍼의 가슴을 꿰뚫었다.
캐스퍼가 기습적으로 날렸던 여섯 자루의 검은 시리우스의 배후에서 허공만 꿰뚫었다.
캐스퍼는 어떻게든 검을 되돌려서 시리우스를 찌르려 했지만, 시리우스는 칼날을 움직여 완전히 숨통을 끊었다.
“다음.”
쓰러지는 캐스퍼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시리우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음 상대, 나와라.”
“음……!”
가르발디가 신음 소리를 냈다.
설마 캐스퍼가 이렇게 단번에 죽을 거라고는 예상 못 한 것이다.
“바스타리안!”
가르발디의 부름에 우측에서 험상궂은 남자가 움직였다.
그는 커다란 대검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섰다.
“찍어 눌러 버려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바스타리안이 시리우스를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를 본 적이 있기에 시리우스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골고트라는 놈을 알고 있나? 동부에서 도적 떼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놈인데.”
“…….”
바스타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골고트를 어떻게 알지?”
“내가 죽였으니까.”
바스타리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같은 조(組)에 있던 녀석이다. 동부로 흘러들어 갔었군.”
골고트는 마력은 부족했으나 대검을 사용하는 검술만큼은 상당히 뛰어났다.
그런데 바스타리안의 자세는 골고트와 거의 똑같았다.
“골고트는 검제 쪽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너는 검제 밑에 있다가 풍왕 쪽으로 옮긴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검제 폐하 밑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바스타리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가 길어졌군. 골고트의 복수도 할 겸, 네 목을 가져가겠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딱히 신호도 없이, 서로 동시에 움직였다.
바스타리안은 육중한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시리우스가 요철검으로 대검을 막아낸 순간, 바스타리안이 빠르게 몸을 틀면서 시리우스의 측면을 노렸다.
쿵!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긴 했지만 놀라운 민첩성이었다.
바스타리안은 바람의 마법으로 자신의 속도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
바스타리안이 눈을 부릅뜬 채 검을 휘둘렀다.
공격 하나하나에 엄청난 힘이 실려 있는데도, 움직임 자체는 매우 경쾌했다.
쿵, 쿵! 칼날과 칼날이 부딪힐 때마다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과 속도를 겸비한 바스타리안의 맹공이 시리우스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시, 시리우스!”
그 모습을 보며 벨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시리우스가 검술 대결에서 쉽게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크, 큰형님, 괜찮은 걸까요?”
“누가 큰형님이냐.”
환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바스타리안의 실력이 내가 알던 것보다 뛰어나군. 검제의 중검술(重劍術)에 풍왕의 질풍 마법을 조합하여 힘과 속도 양쪽의 밸런스를 맞추고 있어.”
“위, 위험한 것 아닙니까? 도와줘야…….”
“시리우스가 일대일로 싸우겠다고 했는데 도와준다고? 너 같으면 그런 걸 받아들이겠냐?”
“윽…….”
입을 다무는 벨리드를 보면서 환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저 녀석, 아직 탐색전 중이니까.”
“……!”
환왕의 말대로, 시리우스는 탐색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검제의 중검술과 풍왕의 질풍 마법을 조합한 바스타리안의 전투술을 계속해서 분석하고 있었다.
캐스퍼의 비검술은 한눈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지만 바스타리안이 싸우는 방식은 시간을 들여 관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법은 육체 자체를 강화하는 게 어렵다.
무림인들한테는 내공으로 육체 능력을 끌어 올리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마력으로 그런 짓을 하면 몸이 망가진다.
하지만 바스타리안은 그런 한계를 극복한 상태였다.
질풍 마법으로 움직임을 보좌하여, 자신의 속도를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동부에서 싸웠던 칼슈타인도 비슷한 기술을 사용했지만 바스타리안이 훨씬 더 우수했다.
알레이온이나 벨리드가 이런 기술을 터득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나중에 한번 연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읍……!”
쿠웅!
근육을 부풀리며 휘두른 대검이 시리우스의 측면을 노렸다.
하지만 이 공격도 시리우스한테 막혔다.
바스타리안은 맹공을 이어 가고 있지만 시리우스한테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공격도 제대로 통하지 않자 바스타리안의 눈빛에도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공수의 주도권이 바뀌기 시작했다.
“윽……!”
쿵!
시리우스의 일격을 받아 내고 바스타리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육체 자체는 바스타리안이 더 건장할 텐데 시리우스의 공격이 더 묵직했다.
쾅, 쾅, 콰앙!
묵직한 타격음이 연달아 이어졌다.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어, 바스타리안이 시리우스의 맹공에 견디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공세를 펼칠 때는 훌륭했는데, 수세에 몰리면 좀 아쉬워지는군.”
“뭣……!”
시리우스의 혼잣말에 바스타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질풍 마법을 조합한 검술은 맹렬한 공격을 펼칠 때는 분명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공격을 안정적으로 방어할 때는 그리 도움이 안 됐다.
그 부분까지 확인하고, 시리우스는 슬슬 싸움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압……!”
바스타리안이 기합을 지르며 반격을 시도했다.
신형을 회전시키면서 넓은 범위의 공격을 펼쳤다.
시리우스를 일단 물러서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의도대로 시리우스가 한 발 물러서자 바스타리안은 혼신의 힘을 다한 돌격을 개시했다.
바람의 힘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어 깔아뭉개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이미 그 의도를 읽고 있었다.
백랑의 공력을 발아래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마치 빙판 위에 올라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되면서, 미끄러지듯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리우스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바스타리안의 돌진을 회피했다.
바람의 힘을 빌린 바스타리안의 돌격은, 냉기의 힘을 빌린 시리우스의 절묘한 움직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
바스타리안이 골격의 한계를 뛰어넘어 억지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
시리우스의 칼날이 바스타리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몸이 찢겨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바스타리안이 반격하려 했지만, 시리우스는 가차 없이 검을 대각선으로 그었다.
새빨간 피를 뿜으며 바스타리안이 쓰러졌다.
“큰형님이 나설 필요도 없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시리우스는 가르발디에게 시선을 향했다.
가르발디는 캐스퍼와 바스타리안이 연달아 당하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런 가르발디를 향해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를 던졌다.
“서열 2위한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거면서, 뭘 그렇게 자신만만했나?”
시리우스의 조롱에 가르발디가 까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