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99화
99화. 이런 약초는 없을까요?
“시리우스, 그러면 가르발디는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2연전을 치른 시리우스를 대신하여 환왕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가르발디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피곤하지도 않나? 한 놈은 나한테 넘기는 게 좋을 텐데.”
“큰형님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큰형님 소리는…… 뭐? 내가 패배한다고?”
환왕이 눈을 치켜떴다.
9서클의 대마도사인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하다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자네, 나를 너무 얕보는 것 아닌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면 뭔데?”
“저 늙은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리한테 덤벼들었을 것 같습니까?”
시리우스는 가르발디를 노려봤다.
“아까 보니 큰형님이 앞으로 나서는 걸 은근히 바라는 눈치더군요. 무슨 대비가 되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대비라고?”
“환영 마법을 방해할 수 있는 모종의 수단이라든가…… 뭐, 그런 거겠죠. 남부에서도 보지 않았습니까?”
“……!”
환왕은 9서클의 대마도사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환영을 보이는 게 주특기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투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
만약 환영 마법이 봉인 당하면 8서클에서도 상위권인 가르발디를 상대할 수단이 없어진다.
“내 말이 틀렸나, 가르발디?”
“…….”
가르발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리우스의 추측이 정확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너희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가르발디.”
시리우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환왕 큰형님도 그리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시니 말이다.”
“……!”
“너희들이 무슨 대책을 세워 봤자 금방 그걸 뛰어넘는 새로운 힘을 개발하시겠지.”
시리우스의 말에 환왕이 숨을 삼켰다.
이건 시리우스 나름의 격려였다.
환왕이 새로운 힘을 개발하면 결국 시리우스한테도 도움이 된다.
시리우스는 환왕이 무공의 개념을 참고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내가 너희를 짓뭉개 주마.”
“…….”
가르발디가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만만하군요. 캐스퍼와 바스타리안을 쓰러뜨렸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것 아닙니까? 제가 캐스퍼나 바스타리안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가르발디가 커다란 지팡이로 땅바닥을 두드렸다.
“시리우스, 제가 보기에 당신은 8서클의 마도사 같습니다.”
“…….”
“하지만 육체를 강화하는 고대 마법을 손에 넣어 8서클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지요. 그건 확실히 대단합니다.”
육체를 강화하는 힘이라는 건 정확히 꿰뚫어 봤지만, 나머지는 전부 잘못된 추리였다.
하지만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시리우스는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다 파악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가르발디가 금속 지팡이로 땅바닥을 다시 한번 두드린 순간.
돌개바람이 불면서 가르발디의 전신을 휘감았다.
“당신은 저한테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쿠쿠쿠쿵!
폭풍이 불어닥쳤다.
시로크가 만들었던 바람하고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바람에 휘말린 순간, 시리우스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시리우스……!’
다른 사람들이 다급히 시리우스를 불러 댔다.
하지만 시리우스에게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바람에 휘말린 채 공중에서 제대로 자세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가르발디는 엄청난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디 한번 그 잘난 검술로 막아 보십시오, 시리우스.”
쐐애액!
폭풍 속에서 무언가가 시리우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르발디의 금속제 지팡이에 달려 있던 둥근 고리였다.
그것이 윤보(輪寶)처럼 회전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막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휘리릭!
사방에서 고리가 시리우스를 덮쳤다.
고리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워, 자칫하면 일격에 팔다리가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폭풍에 휘말린 채 제대로 자세를 취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
누가 봐도 위태로운 모양새였다.
“시리우스, 위험해……!”
지상에서 벨리드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을 때.
갑자기 괴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콰르릉!
엄청난 천둥소리가 폭풍 속에서 들려왔다.
이 폭풍이 평범한 기상 현상이었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폭풍은 가르발디의 질풍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천둥이나 벼락이 발생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
가르발디가 인상을 찡그리며 폭풍 내부를 확인하려 한순간.
푸른색 번개가 폭풍 사이를 질주했다.
“……!”
콰직!
가르발디가 날렸던 고리가 폭풍 속에서 연달아 쪼개졌다.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휘날리던 시리우스가…… 푸른색 번개가 되어 폭풍 속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쿠쿵!
시리우스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3갑자 내공을 모조리 끌어내서 전신을 뇌기(雷氣)로 감싸고 있었다.
천랑신공의 세 번째 단계인 창뢰의 힘을 사용해, 스스로를 한 줄기 번개처럼 만든 것이었다.
물론 내공 소모가 막심하다.
안 그래도 뇌기를 사용하는 무공은 내공을 많이 소모하는 편이다. 창뢰의 공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날이 아니라 전신에 뇌기를 전개한 거라, 내공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시리우스는 한 줄기 번개가 되어 폭풍을 꿰뚫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가르발디가 폭풍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시리우스가 내공을 모조리 쏟아부으며 뇌기를 전개하고 있듯이, 가르발디도 마력을 최대한 방출하며 바람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폭풍이 거세더라도, 번개가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날리는 일은 없으니까.
“……!”
자신을 공격하는 고리를 모조리 파괴한 뒤, 시리우스는 마침내 가르발디의 위치를 포착했다.
남아 있는 내공을 모조리 쥐어짜면서, 폭풍 속을 질주했다.
바람 때문에 가르발디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하면서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묵직한 금속제 지팡이다.
제대로 휘두르면 근접 무기로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리우스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었다.
콰직!
찌그러진 금속제 지팡이가 하늘 어딘가로 날아갔다.
가르발디는 다급히 바람을 일으켜 후퇴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푸른색 뇌기로 뒤덮인 칼날이 가르발디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욱……!”
울컥.
피를 토하면서 가르발디가 사지를 발버둥 쳤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한 줄기 번개처럼, 가르발디의 몸을 꿰뚫은 채 끝없이 공중을 질주했다.
가르발디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 보려고 온몸을 비틀어 봤지만, 초고속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늘을 가로지르던 번개가…… 마침내 땅에 꽂혔다.
“커헉!”
쿠웅!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어딘가 외곽의 땅바닥에 추락한 가르발디의 몸뚱이 위에서 시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끄으으…….”
놀랍게도 가르발디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배에 구멍이 뚫렸고 전신의 뼈가 다 으스러졌을 텐데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시, 시리우스, 너는, 대체…….”
가르발디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 이건, 마법이 아니다. 마법일 리가 없다. 대체 무슨 힘을…… 커억!”
가르발디의 입에서 새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리우스가 북명의 기운을 전개한 우장(右掌)을 가슴에 꽂았기 때문이다.
시커먼 기운이 침투하면서 가르발디의 서클을 파괴했고, 남아 있던 마력까지 모조리 빨아들였다.
“끄으으으…….”
창뢰의 힘을 한계까지 사용하느라 소모된 내공을 회복한 뒤, 시리우스는 오른손을 거둬들였다.
가르발디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시리우스!”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리드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 무사한 거야?”
“그래, 보다시피.”
환왕과 베르디안도 뒤이어 도착해 가르발디의 시체를 확인했다.
“해치웠군. 잘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다들 시리우스의 승리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자네도 꽤 고생한 것 같군.”
“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가르발디는 확실히 강했다.
시리우스 앞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것도 허세가 아니었다.
같은 8서클의 질풍술사라도 시로크나 캐스퍼, 바스타리안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덕분에 내공도 많이 소비했습니다.”
만약 시리우스의 내공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폭풍에서 탈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가르발디의 질풍 마법은 위력적이었다.
“풍왕의 부하인 가르발디가 이 정도이니…… 풍왕은 이것보다 더 강하다고 봐야겠군요.”
“뭐…… 그렇지.”
그렇다면 지금 상태로 풍왕과 직접 대결은 위험하다.
풍왕을 만나기 전에 다음 단계로 넘어서야 한다.
“빨리 레스파다 가문을 방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염초를 제공해 줬던 레스파다 가문.
그곳에서라면 새로운 영약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 * *
풍왕의 부하들을 격퇴한 뒤, 일행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레스파다 가문은 서부에서도 남쪽에 치우친 위치에 자리 잡은 가문으로, 꽤 역사가 길다.
하지만 가주인 피에트 레스파다가 약초에만 관심이 많아서 가세가 점점 기울고 있다는 것 같았다.
“유스티아 리겔의 소개장입니다.”
“오오, 유스티아 님의…….”
레스파다 가문을 방문하자 피에트는 반갑게 맞이해 줬다.
피에트는 나이가 많았지만, 눈빛이나 피부색이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몸에 좋은 약초를 계속 찾아서 복용한 덕분인 것 같았다.
“유스티아 님에게는 꽤 신세를 졌습니다. 후원을 많이 해 주셨거든요.”
“그랬습니까?”
“덕분에 연구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피에트는 웃으면서 시리우스 일행을 자신의 연구실로 데려가 줬다.
그곳에는 정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약장이 있었다.
“대단하네요.”
독왕 밑에서 약물 공부를 했던 베르디안까지 감탄했을 정도였다.
“필요한 약재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베르디안이 개발하고 있는 영약의 재료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시리우스한테는 그것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게 있었다.
“적염초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적염초……라고 하셨습니까?”
“네, 서남쪽 섬에서 몇 뿌리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뿌리를 유스티아에게 보내 주셨다고.”
시리우스의 말을 듣고 피에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적염초를 뭐에 쓰시려는 겁니까? 너무 성질이 강해서 평범한 사람은 복용하자마자 죽게 되는데 말입니다. 설마 독약으로 쓰려고 하시는 건지?”
“그건…….”
“혹시 새로운 가공 방법이 밝혀진 거라면 공유 좀 해 주십시오. 지난번 사람들은 한사코 알려 주지 않아서 말입니다.”
“네?”
피에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남아 있던 적염초는 보름 전에 전부 처분했습니다. 거액을 주고 사 간 사람이 있어서…….”
“누가 사 갔습니까?”
“그냥 이 주변에서 활동하는 상인이었는데……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온 것 같았습니다.”
“…….”
시리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세계에서 적염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시리우스를 제외하면 딱 한 사람뿐이다.
“염제 녀석이군…….”
옆에서 환왕이 중얼거렸다.
연맹의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인 9서클의 화염술사…… 염제는 예전부터 적염초를 찾고 있었다.
10서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생각이라는데, 어떻게 활용하려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남부 지역에서 적염초가 씨가 마르는 바람에 그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마침내 놈이 적염초를 손에 넣은 것이다.
“시리우스, 좀 곤란하게 된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적염초는 매우 뜨거운 기운을 지닌 약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조금만 섭취해도 사망하지만, 시리우스는 적염초의 기운을 받아들여 극양의 내공을 획득할 수 있다.
적염초를 한 번 더 복용하여 천랑신공의 네 번째 단계에 진입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염제가 선수를 쳤을 줄이야.
“염제가 적염초를 확보하면 금방 10서클에 도달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약초 하나 입수했다고 가능할 리가 없지. 아마 지금쯤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겠지.”
“그렇군요.”
피에트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저기,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닙니다, 피에트 님.”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혹시 적염초처럼 뜨거운 성질을 지닌 약초가 또 없을까요?”
“글쎄요. 적염초가 워낙 특이한 약초라…….”
피에트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몸에서 열이 나게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적염초 수준으로 뜨거운 약초는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런 약초는 없을까요?”
“네?”
“평범한 약초와는 달리 금색으로 빛나는 약초를 보신 적 없으십니까? 태양 빛을 많이 받은 약초가 그렇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원래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
그런데 어떤 약초들은 태양의 빛을 따로 저장해 두는 경우가 있다.
그런 약초들은 크게 자라지는 못하지만, 태양의 정기를 계속 축적하면서 금색으로 물들게 된다.
그리고 조건이 잘 맞아떨어져서 수백 년씩 태양의 정기를 축적하면…… 극양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이 된다.
이쪽 세계에는 무림에서 보던 약재들이 없지만, 이렇게 태양의 정기가 응축된 약초가 있을지도 모른다.
“금색으로 빛나는……?”
피에트가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 있습니다, 있어요!”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남쪽 야산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천년초(千年草) 한 뿌리를 입수한 적이 있습니다!”
천년초.
그 이름을 듣고 베르디안이 탄성을 질렀다.
“천년초요? 수명이 매우 길어서 천년초라 불리는 그 풀인가요?”
“네, 그런데 이상하게 금색이어서 복용하지는 않고 따로 보관해 놨죠. 돌연변이 같았거든요.”
피에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시리우스 님, 보여 드릴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약 시리우스의 예상이 맞다면…… 적염초 이상으로 효과적인 영약을 입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