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05화
105화. 맹주를 자처하다니
“크윽……!”
산중노인회의 장로가 공중을 날아 근처 나무에 충돌했다.
얼굴을 얻어맞아 코가 부러지고 앞니가 떨어져 내렸지만, 딱히 핏물을 토해 내지는 않았다.
육체가 상당히 단련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시리우스……!”
장로가 목소리를 높인 순간, 숲속에서 새로운 흑의인들이 솟구쳤다.
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놈들과는 별도로 더 많은 부하들을 숨겨 놓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주위에 있던 놈들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 보였다.
“벨리드, 베르디안, 저놈들은 너희가 해치워라.”
“알았어!”
“한번 해 보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환왕은 대기하게 한 뒤, 시리우스는 장로를 향해 움직였다.
장로는 부러진 이빨을 뱉어 내면서 양손으로 단검을 들었다.
“큭……!”
마력이 부여된 단검이 바람을 가르고 시리우스에게 날아왔다.
시리우스는 양손에 백랑의 공력을 실어 단검을 모조리 튕겨 냈다.
하지만 장로는 어느새 새로운 단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애송이가!”
접근전이 시작되었다.
장로는 마력을 전개한 단검 두 자루를 현란하게 놀리며 시리우스를 노렸다.
필요할 때는 바람의 마법을 사용해 움직임을 보조하기도 했다.
암살자 단체의 수장답게 장로의 기술은 상당히 뛰어났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었는데, 적재적소에 속임수를 섞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조금도 밀리지 않으며 맨손으로 단검을 상대했다.
“애송이 하나도 제압하지 못하나, 장로?”
“크윽……!”
수십 차례의 공방이 이어졌다.
아무리 공격을 펼쳐도 시리우스의 빈틈을 찌르지 못하자 장로의 눈빛에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장로가 전법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시리우스는 장로의 반격을 허용해 줄 생각이 없었다.
“윽……!”
빠르게 뻗어 나간 시리우스의 오른발이 장로의 하반신을 걷어찼다.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장로가 주춤하는 사이, 시리우스는 화천의 공력을 펼쳤다.
화르르!
시리우스의 오른손이 불꽃에 휩싸이는 걸 보면서 장로가 경악했다.
“헉……!”
장로가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화천장법이 장로의 가슴에 작렬하는 게 더 빨랐다.
“크아악……!”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장로의 몸에 불이 붙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장로를 보면서, 시리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네 밑에서 훈련받았던 암살자들은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느꼈을 거다.”
시리우스는 장로가 떨어뜨린 단검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몸부림치는 장로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악……!”
짧은 비명을 끝으로, 장로는 조용해졌다.
시체가 된 장로를 뒤로한 채 시리우스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벨리드와 베르디안도 싸움을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시리우스, 이놈들은 어떻게 할까?”
처음에 사방을 포위했던 암살자들만 멀쩡히 남아 있었다.
“일단 환영 마법을 풀어 주십시오.”
“그래도 될까?”
“명령을 내리던 장로가 죽었습니다. 환영에서 풀려나도 아무것도 못할 겁니다.”
“흠, 알겠다.”
환왕이 환영 마법을 해제하자 암살자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리우스가 장로의 시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희를 부려 먹던 장로는 이미 죽었다.”
“……!”
암살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장로뿐만 아니라 상급 암살자들까지 시체가 되어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말단 암살자인 것 같군. 다들 복면을 벗어라.”
“…….”
“어서.”
시리우스가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압박감을 주자 암살자들이 차례차례 복면을 벗었다.
“다들 어리군.”
얼굴을 확인한 시리우스는 혀를 찼다.
대부분 베르디안보다 어려 보였다.
“장로나 선배들의 복수를 하고 싶은 놈들은 앞으로 나와라.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
다들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알만 굴려 댔다.
“너희는 어떻게 하고 싶지? 도망가고 싶나? 아니면 너희의 본거지로 돌아갈 거냐?”
“…….”
대답 없는 암살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군.”
누군가의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들.
그들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다들 들어라.”
시리우스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장로는 내 손에 죽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
“앞으로는 내 명령을 따르도록 해라. 알겠나?”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내려 줄 주인이 없어졌으니 새로운 주인의 등장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지금부터 팔라미아 방면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란츠 가문에 있는 티타니아 리겔에게 몸을 의탁해라.”
유스티아의 큰언니인 티타니아는 포용력이 큰 인격자다.
그녀라면 이 녀석들도 보살펴 줄 수 있을 것이다.
“벨리드, 베르디안, 너희가 이 녀석들을 인솔해. 특히 베르디안은 풍왕이나 독왕의 자객에게 걸리지 않도록 변장을 잘하고.”
“우리가 인솔하라고?”
“시리우스 님은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베르디안의 질문에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더 신속히 움직여야겠어.”
“신속히요?”
“산중노인회의 장로까지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놈들도 슬슬 이번 싸움에서 발을 빼고 싶어질 거야. 흑철맹을 배신하는 놈들이 자꾸 나오면 서부는 더 혼란스러워지겠지.”
흑철맹이 흔들리기 전에 제대로 결판을 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서부 지역의 흑회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
이미 정보는 충분히 수집했고, 흑철맹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결정했다.
그러니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흑철맹 본부로 직행해…… 제피로스를 잡는 거다.”
* * *
흑철맹 본부.
제피로스는 홀로 복도를 걸어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간다.
“이봐, 들어간다.”
방 안은 조용했다.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가 수하들과 함께 앉아 말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카슈람, 진척이 좀 있나?”
“물론이다, 제피로스.”
남자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정말로 귀한 마도서다. 이런 걸 손에 넣다니,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남자다.”
“연맹을 배신하고 나한테 붙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냉철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남자야말로, 얼마 전에 연맹을 배신한 서부 지부장이었다.
“이 마도서만 터득한다면 연맹에도 대항할 수 있을 거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겠지.”
“당연한 얘기지.”
제피로스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도 이 마도서 때문이다.
이 마도서의 내용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그냥 서부 흑회의 우두머리로 만족했을 것이다.
“연맹 상층부는 이루지도 못할 목표에 집착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내 스승이었던 검제도 마찬가지지.”
“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우리한테는 이 마도서가 있으니까.”
서부 지부장 카슈람은 연맹 상층부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지부에 힘을 제대로 실어 주지 않으면서 허황된 목표에만 집착한다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카슈람은 제피로스가 특별한 마도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결국 연맹을 배신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연맹을 대신해서 우리가 패권을 손에 넣는 거다, 제피로스.”
“그래,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시리우스 카니스루트, 너도 들어 봤겠지.”
“…….”
카슈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놈이 흑철맹을 노리고 있어.”
“시리우스…… 동부 지부장과 남부 지부장을 연달아 죽인 놈 말인가.”
“그래, 산중노인회를 보내긴 했는데, 그리 안심이 되지 않아.”
제피로스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직접 놈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나?”
“산중노인회의 장로가 실패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나머지 5인회도 상대가 안 될 테니까.”
“어쩔 수 없군. 마도서의 내용을 빨리 터득해야겠어.”
이미 제피로스는 마도서의 내용을 대부분 터득했다.
하지만 카슈람은 아직 입문 단계다.
마도서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카슈람까지 마도서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어떨까.
제피로스와 카슈람이 함께 대처한다면 시리우스 정도는 완벽히 깔아뭉갤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풍왕의 부하들까지 서부에 얼쩡거린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알고 있다. 하지만 풍왕 본인이 오는 거라면 모를까, 풍왕의 부하들이면 별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만약 풍왕 본인이 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새 지부장으로 풍왕이 직접 올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카슈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되면 이 마도서의 힘으로 대처해야지.”
“흠, 9서클의 대마도사를 상대로 마도서의 힘을 시험해 보는 건가.”
“어차피 9서클을 꺾을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이 마도서를 공부하는 것 아닌가?”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갑자기 바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살짝 흔들렸는데…….”
제피로스가 문을 열고 바깥을 살피려 했다.
그러자 측근이 복도를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매, 맹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나타났습니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가 나타났다.
그 얘기를 듣고 제피로스는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시리우스는 지금쯤 산중노인회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시리우스가 나타나서 성채 위로 올라왔습니다! 지금 수비 병력과 전투 중입니다!”
카슈람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군. 다들 준비해라.”
그러자 주위에 있던 부하들도 일어나면서 무기를 챙겼다.
그들은 카슈람이 연맹을 배신할 때 함께 따라온 심복들이었다.
“제피로스, 너도 남아 있는 5인회를 통솔해서 싸울 준비를 해라.”
“알겠다……!”
제피로스도 냉정함을 되찾았다.
나이는 젊지만, 서부 흑회를 대부분 장악했을 정도의 수완을 지닌 남자다.
이런 상황에서 허둥지둥할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았다.
“이봐, 상대는 시리우스 한 명인가? 아니면 4인조가 다 같이 왔나?”
“아닙니다. 시리우스를 포함해서 남자 두 명입니다.”
“남자 두 명?”
“성벽을 지키던 놈들이 연달아 잠들어 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독을 쓰는 놈일 수도 있고, 환영 마법을 쓰는 놈일 수도 있습니다.”
“……!”
카슈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독왕의 제자가 시리우스에게 붙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환영 마법이라면…….”
“짐작 가는 바라도 있나?”
제피로스가 질문을 던진 순간.
갑자기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억……!”
제피로스와 카슈람은 다급히 마법을 사용해 빠져나왔다.
가까스로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두 남자가 지붕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중 한 명은 시리우스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그랑제나, 폴테인, 소피아, 리포이드……!”
유흥가의 대모, 그랑제나.
용병단의 단장, 폴테인.
명가 출신의 마법사, 소피아.
암시장의 거상, 리포이드.
흑철맹을 뒷받침하는 5인회의 구성원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카슈람은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시리우스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거기 있었군.”
날카로운 외모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카슈람. 서부 지부장을 때려치우고 흑철맹의 2인자 노릇을 하니 기분이 어떠냐?”
“환왕……!”
환왕.
그 이름을 듣고 제피로스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연맹의 최고 간부인 9서클의 대마도사가 왜 시리우스와 함께 있단 말인가.
“제피로스가 너냐?”
“……!”
바로 그때 시리우스의 시선이 제피로스에게로 향했다.
“흑철맹이라는 조직의 우두머리라고 하더군. 나를 죽이라고 지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시리우스…….”
제피로스는 까득 이를 갈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피로스도 서부 흑회의 남자다.
여기서 주눅 든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명령했다. 네 녀석의 존재가 방해될 것 같았으니까.”
“방해?”
“너는 내가 흑철맹의 맹주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존재다.”
“그렇군.”
시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견해다. 나는 네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어쩔 생각이지?”
“일단 지금 있는 위치에서 끌어내려야지.”
“뭐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
뭐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인가.
귀를 기울이는 제피로스 앞에서, 시리우스가 냉소를 머금었다.
“너 정도밖에 안 되는 그릇으로 ‘맹주’를 자처하다니 가소로워서 말이다, 애송이.”
“……!”
알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제피로스는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