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08화
108화. 서부는 내가 접수하기로
“끝난 건가?”
시리우스가 제피로스와 함께 서 있자 환왕이 다가왔다.
그는 서부 지부장이었던 카슈람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있었다.
“주, 죽은 겁니까?”
“안 죽었다, 걱정 마라.”
제피로스의 질문에 보고, 환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해 줬다.
카슈람은 축 늘어진 상태였지만 육체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환왕의 환영 마법에 제압당했다는 증거였다.
카슈람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법검사라고는 해도, 역시 9서클 대마도사는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일 필요가 없지. 이 녀석한테서 연맹의 현재 상황을 들어야 하니까.”
“아…….”
카슈람은 검제의 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검제 파벌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환왕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제피로스는 환왕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했다.
“환왕이라면 연맹의 최상위 간부일 텐데 어째서…….”
“자네와 마찬가지지.”
“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려면 이 녀석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제피로스가 숨을 삼키며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9서클 대마도사인 환왕까지 저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시리우스는 얼마나 대단한 걸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제피로스는 시리우스한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시리우스 님은 대체 어떻게 그런 힘을 갖게 된 겁니까? 제가 사용하는 고대 마법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던데.”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줄 거다.”
여기서 무공에 대해 설명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천천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네?”
“너는 어디서 그런 마법을 손에 넣게 된 거지?”
시리우스의 질문에 환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나도 궁금하군. 카슈람도 그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자네한테 붙은 모양이던데.”
“아, 그건…….”
“대량의 마력으로 전신을 감싸서 육체를 강화하다니, 연맹 수뇌부들도 탐낼 만한 마법이야. 대체 어디서 그런 마법을 입수했지?”
베르디안도 마력으로 육체 능력을 끌어 올릴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근력이나 민첩성을 향상시키는 정도였다.
제피로스처럼 대량의 마력으로 전신을 감싸고 공방 일체의 전투를 하도록 만드는 마법은 아니었다.
“후우…….”
갑자기 제피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원래 에른스트 가문 사람입니다.”
“뭐라고? 에른스트?”
이 얘기에는 시리우스도 놀랐다.
완전히 처음 접하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에른스트 가문이라면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 아닌가?”
“네, 서부를 대표하는 명문가죠. 지금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만.”
현재 봉문 중인 에른스트 가문이야말로, 원래 서부 지역 전체를 관리하던 서부 최고의 명가였다.
“에른스트 가문이 지금처럼 은둔하게 된 건, 십 년 전에 가문 내부에서 벌어진 골육상쟁 때문입니다.”
“…….”
“저는 그 싸움에 휘말리는 바람에 가문에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도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죠.”
처참했던 소년 시절을 얘기하면서 제피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부모님이 에른스트 가문에서 몰래 챙겨 준 보물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에 마도서 사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네, 그 내용을 연구해서 이 ‘마력병장(魔力兵裝)’을 터득한 겁니다.”
마력병장.
그것이 제피로스가 사용한 강화 마법의 정식 명칭이었다.
“한번 구경 좀 해 봤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환왕님이라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도 몇 년에 걸쳐서 겨우…….”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냐.”
환왕이 코웃음을 쳤다.
“고만고만한 마법사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괜한 걱정 하지 말고 보여 주기나 해.”
“아, 알겠습니다.”
시리우스도 환왕한테 확인시키는 게 가장 적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해한 내용의 마도서라면 9서클 대마도사인 환왕에게 해석시키는 게 더 빠를 테니까.
“그렇다면 에른스트 가문에도 한 번 방문해 봐야 할 것 같군.”
“네?”
“마도서 사본이라면서? 그러면 원본이 에른스트 가문에 남아 있을지도 몰라.”
“그건…….”
에른스트 가문이 마력병장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된 것인지 직접 찾아가서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에른스트 가문이 서부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묻고 싶으니 말이다.”
“아…….”
“10년 넘게 봉문을 했으면 충분하지. 슬슬 문을 열게 해야 해.”
그동안 에른스트 가문은 대륙 5대 명가로서의 의무를 내던진 상태였다.
에른스트 가문이 본분을 다하지 못했기에 서부 지역은 흑회들이 날뛰는 무법 지대가 되어 있었다.
이미 그란츠 가문 등을 포섭한 상태고, 흑철맹도 굴복시켰지만…… 서부 전체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면 에른스트 가문의 협력이 필요하다.
“제피로스, 불만인가?”
“아닙니다.”
제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에른스트 가문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에른스트 가문에 쳐들어가든 어쩌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가문에 복수할 생각도 없고?”
“없습니다.”
“다행이군.”
만약 제피로스가 에른스트 가문에 아직 원한을 갖고 있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좋아, 그러면…….”
시리우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는 아까 시리우스한테 제압했던 흑철맹의 간부들이 있었다.
“다들 이쪽으로 집합.”
“……!”
다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그들은 시리우스의 막강한 힘을 직접 경험했다.
게다가 흑철맹의 우두머리였던 제피로스까지 제압당했기 때문에 저항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너희가 흑철맹의 5인회인가?”
“네, 맞습니다…….”
“너희는 운이 좋다.”
“……?”
“너희 동료였던 산중노인회의 장로는 며칠 전에 내 손에 죽었으니까.”
5인회의 생존자들이 숨을 삼켰다.
“아까 들었겠지만, 이제부터 흑철맹은 내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니 너희 네 명도 협조를 해 주면 좋겠군.”
“아…….”
“조만간 제피로스가 천랑표국 사람들과 함께 서부 흑회 전체를 갱생시키기 위한 계획을 만들 거다. 그때까지 너희는 그동안 해 오던 사업을 정리해라.”
사업을 정리해라.
그 발언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어떤 부분을 정리하라는 건지는 내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겠지.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 먹는 짓,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짓…… 그런 것들, 최대한 정리해라.”
“…….”
“이건 너희들에게 마지막 기회다. 나중에 내가 문득 생각나서 서부의 현황을 다시 확인해 봤을 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면…… 너희는 산중노인회 장로를 따라가게 될 거다.”
네 사람 모두 두려움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 봐라.”
남부 연합이 건재했던 남부 지역과는 달리, 서부 지역에서는 흑회 조직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시리우스는 서부의 흑회 조직들이 스스로 흑회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 * *
제피로스와 간부들이 구체적인 부분을 논의하는 동안, 시리우스는 환왕과 함께 마도서를 살펴보기로 했다.
“이게 그 마도서란 말이지…….”
무너진 서재에서 꺼내 온 고서를 뒤적이면서 환왕이 중얼거렸다.
“어떤 것 같습니까?”
“좀 기다려라. 아직 제대로 훑어보지도 못했어.”
시리우스는 팔짱을 낀 채 환왕이 마도서를 독파하는 걸 기다렸다.
하지만 환왕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이거, 반쪽짜리군.”
“반쪽짜리?”
“제피로스는 눈치 못 챈 모양인데, 중요한 부분들이 빠져 있어.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마도서로 성립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환왕은 마도서를 다시 훑어봤다.
“그러니까 이건 사본이 아니라 발췌본이라고 해야 하겠지.”
“발췌본…….”
“원본을 얻으면 더 강력한 마력병장을 전개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렇다면 제피로스가 사용한 마력병장도 반쪽짜리였다는 얘기다.
완벽한 마력병장은 과연 어느 정도 성능일까?
“에른스트 가문에는 원본이 있을까요?”
“그야 알 수 없지. 제피로스도 모르는데.”
환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이 발췌본만으로도 충분히 혁신적이야. 만약 마법검사가 이걸 읽고 마력병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전투력을 두 배 이상 끌어 올릴 수 있게 되겠지.”
“카슈람도 그걸 기대하고 제피로스에게 붙은 거겠군요.”
“그래, 마력병장을 활용하면 검제에게서 절기를 전수받지 못해도 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카슈람이 마력병장을 쓰면 검제도 이길 수 있을까요?”
“글쎄다. 검제가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일지 모르니.”
검제, 뇌제, 염제.
독왕, 풍왕, 빙왕, 사왕, 환왕.
연맹에는 이렇게 세 명의 제(帝)와 다섯 명의 왕(王)이 있었다.
시리우스는 이들 중에서 환왕하고만 싸워 봤기 때문에…… 다들 어느 정도 강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검제가 큰형님보다는 강하겠죠?”
“누가 큰형님이냐.”
환왕이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별로 싸우고 싶지는 않은 상대다.”
“역시 검제가 더 강한 모양이군요.”
“시끄럽다. 검제가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면 카슈람한테 물어봐.”
“그래야겠습니다.”
슬슬 카슈람도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연맹 내부 상황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시리우스는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슬슬 포로를 신문할 시간입니다.”
“그래, 나도 카슈람 녀석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환왕도 마도서 사본을 옆구리에 끼고 시리우스를 따라왔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바로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
“…….”
환왕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시리우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봐, 무슨 일인데?!”
환왕에게 대꾸하지 않고, 시리우스는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목격하게 되었다.
“…….”
성벽 위에 서 있는 남자가, 카슈람의 목을 들고 있었다.
“시, 시리우스 님! 저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카슈람을……!”
카슈람을 맡겼던 흑철맹 간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소리쳤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질풍 마법을 쓰는 것 같…….”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성벽 위에서 바람의 칼날이 날아와 목을 쳤기 때문이다.
“저놈은……!”
뒤늦게 쫓아온 환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풍왕의 부관, 샤틸로스다! 저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건……!”
성벽 위에 있던 남자가 새처럼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주인’에게 카슈람의 머리를 바쳤다.
“풍왕 전하, 배신자의 목입니다.”
“음, 수고했다, 샤틸로스.”
푸른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였다.
품이 넓고 펄럭이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하늘 위에 서 있었다.
마치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나머지 표적의 목도 가져올까요?”
“기다려라.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
푸른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하늘을 걷기 시작했다.
마치 계단을 내려오듯이 한 걸음씩 내려와, 성벽 위에 올라섰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환왕이 까득 이를 갈았다.
“네 녀석…….”
“오랜만이오, 환왕.”
남자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내가 본부에서 처리해 둘 일이 많아서 서부에 오는 게 늦어졌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
“하지만 내가 참 적절한 시기에 서부로 들어온 것 같소.”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서부에서 내가 처리해야 될 사람이 세 명 있었소. 그런데 내가 서부에 들어와 보니 마침 세 명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 아니오? 그래서 내가 급하게 날아온 것이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샤틸로스를 쳐다봤다.
샤틸로스는 여전히 카슈람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연맹을 배신하고 서부 지부장 자리를 내던진 카슈람은 이미 해치웠고…… 이제 두 사람 남았구려.”
“두 사람이라.”
“그렇소, 당신과…….”
남자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시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 이렇게 둘이지.”
“…….”
“만나서 반갑군, 시리우스.”
시리우스를 확인한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내가 연맹의 풍왕이다. 앞으로 서부는 내가 관리하도록 하지.”
“미안하게 됐군. 방금 전에 서부는 내가 접수하기로 흑철맹과 얘기가 끝난 참이야.”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풍왕 상대로, 시리우스는 차갑게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