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09화
109화. 죽는 건 너일 테니까
“흑철맹의 맹주도 여기에 있나?”
풍왕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긴장한 표정의 제피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흑철맹의 제피로스다. 이제는 맹주가 아니지만…….”
“분위기를 보니 벌써 시리우스에게 패배한 모양이군.”
“윽…….”
제피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제피로스를 향해 풍왕이 말을 건넸다.
“제피로스, 연맹에 들어오면 어떻겠나?”
“뭐……?”
“수완이 제법 좋다고 하더군. 내 밑에서 몇 년 일하면서 서부 지부를 돕도록 하게. 잘하면 차기 서부 지부장이 될 수도 있을 거야.”
“……!”
제피로스는 완전히 허를 찔렸다.
그동안 흑철맹은 연맹 서부 지부와 계속 충돌했다.
결국 지부장인 카슈람까지 빼내면서 서부 지부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그런데…… 풍왕은 제피로스에게 서부 지부를 도우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동안 있었던 흑철맹과 서부 지부의 갈등은 서로 신경 쓰지 않도록 하지. 어차피 나는 이제 막 서부에 왔고, 흑철맹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건 없으니.”
통이 큰 영입 제안이었다.
이 제안만 들어도 풍왕이 제법 배포가 큰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째서지?”
“방금 전, 나는 시리우스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했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결심을 뒤집을 수는 없다.”
제피로스의 발언을 듣고, 근처에 흩어져 있던 흑철맹 조직원들이 감탄했다.
시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풍왕.”
“…….”
“제피로스는 그렇게 의리 없는 놈이 아니다.”
이런 제안에 흔들릴 놈 같았으면 애초에 포섭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산중노인회의 장로처럼 그냥 죽여 버렸을 것이다.
“제피로스를 포섭하고 싶었으면 조금 더 일찍 왔어야지.”
“하루만 일찍 올 걸 그랬군.”
풍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흑철맹은 살려 놓고 서부 지역 재편에 써먹을 생각이었지만…… 전부 다 죽이는 수밖에.”
풍왕의 발언에 흑철맹 조직원들이 겁을 먹었다.
제피로스가 입술을 깨물며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가 그들 앞에 나섰다.
“미안하지만 흑철맹은 건드리지 못할 거다.”
“음?”
“이젠 내 밑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
풍왕이 잠시 침묵했다.
한편 제피로스와 흑철맹은 숨을 삼키며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풍왕, 시리우스는 이런 놈이다.”
그때 환왕이 입을 열었다.
“부하들을 앞세워 고기 방패로 쓰는 게 아니라, 본인이 앞장서서 부하들의 방패가 되는 놈이지. 이런 놈이니까 동부나 남부의 흑회들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거다.”
“특이한 인간성을 지닌 놈이었군.”
풍왕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다. 어차피 흑철맹은 우선순위가 높지 않으니 처리할 일들을 끝마친 뒤에 생각하도록 하지.”
처리할 일.
물론 시리우스와 환왕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시리우스, 제피로스와는 달리 너는 살려 줄 생각이 없다.”
“네 측근들을 죽였기 때문인가?”
“그것보다는 동부 지부와 남부 지부를 괴멸시킨 게 더 크지.”
풍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부 지부가 괴멸되었을 때만 해도,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부 지부까지 무너뜨리니 연맹 본부에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연맹 본부에서는 지부를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지부를 괴멸시켰다고 너한테 원한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네 존재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그렇게 말한 뒤, 풍왕은 환왕에게 시선을 향했다.
“심지어 성격이 고약하기로 유명한 환왕까지 꼬드겨서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너는 정말 위험한 존재다.”
“이 자식이…….”
환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당장이라도 풍왕한테 공격을 시작할 분위기였지만 시리우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얘기는 잘 들었다, 풍왕.”
시리우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맹에서 나를 위험시해 주고 있다니 영광이군.”
“영광이라고?”
“하지만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쳐다보는 풍왕에게, 시리우스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나를 위험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검제든, 뇌제든, 염제든 다 같이 한꺼번에 달려왔어야지.”
“뭐라고?”
“고작 풍왕 하나를 보내다니 말이야. 너무 안이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풍왕만 개죽음을 당하게 됐군.”
“…….”
풍왕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환왕이 낄낄 웃었다.
“이런 도발을 당한 건 처음이겠군, 풍왕.”
“…….”
“정신이 혼미하냐? 그래도 이게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다.”
환왕까지 거들어서 조롱해 대니 결국 풍왕의 표정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환왕, 당신이 시리우스와 함께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소. 수준이 비슷하군.”
“마음대로 떠들어라, 풍왕.”
“아무래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눠 봤자 무의미할 것 같군.”
풍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우스와 함께 덤비도록 하시오, 환왕.”
“이 대 일로 싸우겠다고?”
“남부에서 노닥거리며 허송세월하였던 당신하고 일대일로 싸워서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러니 시리우스와 함께 덤비시오.”
“풍왕, 네가 감히…….”
그때였다.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풍왕의 부관 샤틸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풍왕 전하, 시리우스는 제가 상대하게 해 주십시오.”
“샤틸로스, 어째서냐.”
“시리우스는 가르발디 사형을 죽였습니다. 원수를 갚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너는 가르발디를 존경하고 있었지.”
가르발디는 풍왕 파벌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노인이었다.
상당히 강했지만 얼마 전에 시리우스한테 죽었다.
“그런 거라면 허락하겠다. 가르발디의 원수를 갚아 봐라.”
“감사합니다, 풍왕 전하.”
샤틸로스가 앞으로 나오자 흑철맹 조직원들이 긴장했다.
흑철맹의 2인자 노릇을 하던 카슈람을 처단하고, 다른 간부도 일격에 목을 날려 버린 실력자다.
그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리우스, 앞으로 나와라. 내가 숨통을 끊어 주마.”
“가르발디의 사제(師弟)인 모양인데.”
시리우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일 자신이 있는 건가?”
“가르발디 사형이 너 같은 애송이한테 당할 리 없다.”
샤틸로스가 눈을 부릅뜨면서 말했다.
“무슨 비겁한 술수를 썼겠지. 정정당당히 싸웠다면 가르발디 사형이 이겼을 거다.”
“흠, 그렇게 생각하나.”
근처에서 환왕이 피식 웃었다.
실제로는 시리우스가 더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가르발디를 이겼기 때문이다.
시리우스가 다른 놈들을 상대하느라 내공이 소모된 상태만 아니었어도 가르발디를 보다 손쉽게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정정당당하게 붙어 보지. 와라.”
“건방진 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샤틸로스가 하늘로 솟구쳤다.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조, 조심하십시오! 아까도 바람의 칼날로 사람의 목을……!”
누군가가 시리우스를 돕기 위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말을 끝까지 하는 것보다 샤틸로스의 질풍 마법이 더 빨랐다.
공중에서 바람의 칼날이 쏟아졌다. 하나가 아니라 대여섯 개였다.
만약 시리우스가 피한다고 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자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
콰르릉!
하늘은 맑은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렸다.
샤틸로스가 흠칫 놀란 순간, 시리우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땅 위에서 사라졌다.
한 줄기 푸른 번개가 되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
바람의 칼날 사이를 교묘하게 꿰뚫고, 하늘을 질주하여 샤틸로스에게 접근했다.
샤틸로스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샤틸로스에게는 바람의 힘을 사용한 비행 능력이 있다.
거리를 벌리기 위해 샤틸로스는 하늘 높이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시리우스의 속도가 한 단계 상승했다.
“……?!”
샤틸로스가 높이 날아오르는 것보다 먼저, 시리우스가 하늘을 꿰뚫었다.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시리우스를 확인하고 샤틸로스는 다급히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너무 굼뜨군.”
환왕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정확했다.
시리우스의 온몸에 전개되어 있던 푸른색 뇌기, 천랑신공의 세 번째 단계 ‘창뢰’.
그것이 순식간에 오른손에 집결했다.
뇌기가 집중된 뇌권(雷拳)의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샤틸로스가 어떤 마법을 전개하는 것보다, 시리우스의 뇌권이 샤틸로스의 가슴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게 빨랐다.
“커헉……!”
콰쾅!
폭발 같은 소리를 내면서, 뇌권이 샤틸로스의 가슴을 강타했다.
갈비뼈가 분쇄되고, 심장에 치명적인 충격을 입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먹을 휘감고 있던 뇌기가 그대로 샤틸로스의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뇌기는 안 그래도 터지기 직전이었던 샤틸로스의 심장을 뒤흔든 뒤, 그대로 전신으로 퍼졌다.
“아…….”
샤틸로스가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져 처참한 시체가 되었지만, 사실 바닥에 충돌하기 전부터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풍왕의 부관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
성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풍왕은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방금까지의 여유로웠던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철맹의 구성원들은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카슈람을 죽이고 다른 간부도 죽였던 샤틸로스를 단번에 해치웠으니 그들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세상에…….”
특히 제피로스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을 상대할 때 시리우스가 정말로 봐주면서 싸워 줬다는 걸 이해한 것이다.
만약 시리우스가 샤틸로스를 상대하듯이 제피로스와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제피로스는 1분도 못 버티고 시체로 굴러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시리우스에게 고개를 숙이길 잘했다.
그렇게 확신하면서 제피로스는 침을 삼켰다.
“정정당당하게 붙으니 이렇게 빨리 끝나는군.”
환왕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풍왕, 아직도 이 대 일로 싸울 생각이 있나?”
“…….”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시리우스는 가르발디와 싸울 때보다 한 단계 강해진 상태니까.”
그렇게 말하며 환왕은 근처에 있던 무너진 기둥 위에 걸터앉았다.
“잘 싸워 봐라, 풍왕. 오랜만에 좋은 구경 한번 하겠군.”
관전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환왕을 보면서, 풍왕이 까득 이를 갈았다.
“환왕.”
“응?”
“시리우스를 죽이면 그다음에 당신을 죽이겠소.”
그렇게 말하며 풍왕이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풍왕.”
펄럭이는 풍왕의 소맷자락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허리에 손을 댔다.
“이번에 죽는 건 너일 테니까.”
흑철맹의 성채에서 시리우스가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