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10화
110화. 왕국이 출현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내가 죽게 될 거라고?”
풍왕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리우스, 너무 허세를 부리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나중에 죽음을 맞이할 때 자신의 발언을 돌이키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풍왕.”
시리우스의 냉담한 말을 들으면서, 풍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고만장하구나, 시리우스…….”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환왕은 풍왕이 아직도 시리우스를 얕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샤틸로스가 눈앞에서 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풍왕은 시리우스를 한 수 아래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리우스를 빨리 해치워 버리고 환왕과의 대결을 시작하자…… 풍왕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가르발디 등 많은 수하를 잃었는데, 어째서 풍왕은 시리우스를 얕보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환왕의 존재다.
그동안 시리우스가 계속 환왕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환왕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풍왕은 환왕이 시리우스와 싸웠다가 패배했다는 사실도 모른다.
결국 환왕은 의도치 않게 풍왕을 착각에 빠뜨렸다.
시리우스의 진짜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상태라면 풍왕도 이렇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시리우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환왕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얼마 전에 새로운 경지에 진입한 이후로는 시리우스가 전력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시리우스의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환왕은 눈을 똑똑히 뜨고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
“…….”
시리우스와 풍왕이 말없이 대치했다.
주위에 있던 흑철맹 사람들이 자진해서 뒷걸음쳤다.
이 싸움에 말려들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 건 시리우스였다.
“……!”
선공을 양보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는 9서클 대마도사인 풍왕이다.
샤디엔 스트라우스처럼 직접적인 전투에 약한 마법사도 아니고, 그동안 시리우스를 덮쳐 온 실력자들의 스승이다.
양보를 하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흥……!”
시리우스가 접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풍왕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엄청난 돌풍이 불어닥쳤다.
주위 건물들이 무참히 파괴될 정도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가르발디와 싸울 때처럼 창뢰의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경공만 사용해서 풍왕과의 거리를 좁혔다.
“……!”
쿵!
시리우스가 휘두른 검이 공중에서 틀어막혔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방패가 전개되어 있었다.
질풍 마법을 응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시리우스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저 공기로 만들어진 방패일 뿐인데, 시리우스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아니……!”
“뭐, 뭐야!”
관전하던 흑철맹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들의 눈에는 시리우스가 허공에다가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풍왕이 전개한 고도의 방어 마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멍청한 놈들, 그냥 기다려라.”
환왕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직 탐색전이니까.”
그 직후.
시리우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몸을 옆으로 기울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풍왕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방어 마법으로 보호되지 않는 곳을 노려 검을 찔러 넣은 순간.
휘이익!
돌풍과 함께 풍왕이 날아올랐다.
시리우스는 몸을 틀어 다시 한번 풍왕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이번에도 틀어막혔다.
어느새 풍왕은 전후좌우 모든 방향을 보이지 않는 방패로 보호하고 있었다.
“슬슬 나도 공격을 하도록 하지.”
주위에 불어닥치던 돌풍이 멎었다.
그 대신 풍왕에게서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샤틸로스의 마법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샤틸로스는 고작 대여섯 개의 칼날을 동시에 만들었을 뿐이지만 풍왕이 만든 바람의 칼날은 서른 개가 넘었다.
어디로 도망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칼날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 공격을 확인하면서 시리우스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천랑신공의 세 번째 단계, 창뢰의 공력을 전신에 둘렀다.
한 줄기 푸른 번개가 되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바람의 칼날을 모조리 뚫고 상승하는 모습에 주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샤틸로스를 쓰러뜨린 기술인가.”
풍왕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직선적인 돌파력은 확실히 뛰어나군. 하지만…….”
콰릉!
푸른 번개가 된 시리우스가 풍왕을 꿰뚫으려 했다.
하지만 풍왕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허공을 가로질렀을 뿐인 시리우스의 배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느리다.”
콰앙!
풍왕의 손에서 전개된 마법이 시리우스를 덮쳤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질풍 마법의 힘을 극한까지 압축한 ‘바람의 탄환’이었다.
보이지 않는 탄환이 시리우스의 무방비한 등을 덮쳤다.
시리우스는 그대로 추락하여 건물 잔해 위로 떨어졌다.
“앗……!”
그 모습을 보며 제피로스가 비명을 질렀다.
“타, 탐색전이라면서요?”
“끄응…….”
환왕이 팔짱을 낀 채 신음했다.
그동안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풍왕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설마 푸른 번개의 힘을 사용한 시리우스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줄이야.
“원래 질풍 마법은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니 속도 면에서 풍왕이 앞서는 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을 때.
건물 잔해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군. 대충 알겠다.”
“……!”
그곳엔 시리우스가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확실히 빠르군. 정말로 바람 같은 움직임이다.”
“네놈…….”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은 시리우스를 내려다보며 풍왕이 눈썹을 찌푸렸다.
“풍왕, 그게 최선인가?”
“뭐라고?”
“더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냐는 얘기다.”
“…….”
풍왕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건방진 놈.”
그 순간.
풍왕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상까지 내려와, 시리우스의 배후를 잡았다.
풍왕의 손에는 바람의 칼날이 들려 있었다.
스스로 배후에서 시리우스의 목을 날리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파앙!
바람의 칼날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시리우스가 몸을 돌리면서 휘두른 검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 분명 풍왕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럼에도 시리우스가 풍왕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
공격을 읽혔다.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예상하고 움직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풍왕은 눈을 치켜떴다.
“네놈……!”
풍왕은 시리우스에게 연속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바람의 칼날과 바람의 탄환을 섞으면서 맹공을 퍼부었다.
건물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시리우스는 냉정한 표정으로 그 공격에 대처했다.
푸른 잔영(殘影)을 만들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쿠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전신을 움직여 풍왕의 맹공을 철저히 파훼했다.
어떤 공격은 피하고, 어떤 공격은 검을 휘둘러 상쇄시켰다. 어떤 공격은 아예 호신강기로 받아 내기도 했다.
엄청난 공방이 이어졌다.
공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풍왕의 공격은 더욱 빠르고 복잡해졌다.
시리우스가 예측하지 못하도록, 예측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도록, 초고속의 질풍 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래, 이 정도 속도가 최선이었군.”
“뭣…….”
시리우스의 혼잣말이 들린 직후.
풍왕의 눈앞에서 시리우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시리우스의 우장(右掌)이 풍왕의 측면을 때렸다.
쿵!
바람의 방어막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풍왕의 몸이 밀려났다.
“……!”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어느새 시리우스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방금 전 같은 공격을 예상하고 풍왕은 신속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이미 하늘에 있었다.
“윽……!”
콰쾅!
번개 같은 참격이 풍왕을 향해 쏟아졌다.
풍왕은 일단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시리우스는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쿠르릉!
벽력같은 소리를 발생시키면서 시리우스가 솟구쳤다.
전신에서 터져 나온 푸른색 뇌기에 금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시리우스의 두 눈조차 금색으로 물들었다.
금색 천년초에서 획득한 태양의 정기를 본격적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파직, 파직, 뇌기의 기파가 터져 나가면서 온몸의 터럭이 솟구쳤다.
그 상태로 시리우스는 하늘을 질주하며 풍왕을 몰아세웠다.
“아니……!”
풍왕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리우스를 따돌릴 수 없었다.
지금 시리우스는 풍왕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속도만으로…….
“그럴 리가 없다!”
풍왕이 소리쳤다.
초고속의 공중전은 풍왕의 최대 무기다.
연맹의 검제, 뇌제, 염제조차 공중전에서는 풍왕을 따라올 수 없다.
그런데, 공중전에서 시리우스가 더 빠르다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콰콰쾅!
풍왕은 속도를 더 끌어 올렸다.
폭음을 발생시키며 하늘을 질주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시리우스를 따돌릴 수 없었다.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지?”
“……!”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풍왕은 허를 찔렸다.
도망친다?
지금 내가 도망치고 있단 말인가?
연맹의 다섯 왕 중 한 명인 내가, 저런 애송이한테서 도망치고 있다고?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태세를 바로잡기 위해 거리를 벌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접근전에 특화된 저 녀석에게 굳이 접근전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풍왕이 합리화를 하고 있었을 때.
“잡생각이 많군, 풍왕.”
“……!”
쿠웅!
시리우스가 풍왕의 측면을 스쳐 지나갔고, 커다란 충격이 풍왕을 덮쳤다.
완전히 추월당했다.
그 사실에 경악하면서 풍왕은 추락했다.
“와……!”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숨 막히는 공중 추격전 끝에 시리우스가 풍왕을 격추해 낸 것이다.
“세, 세상에…….”
제피로스가 또다시 몸을 떨었다.
아까 샤틸로스를 쓰러뜨릴 때도 감탄했는데, 이번은 정말 차원이 다른 싸움이었다.
“내가 저런 사람을 무릎 꿇리려 했었다고? 하하…….”
정말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제피로스는 흥분을 느꼈다.
저 대단한 사람한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시리우스 녀석…… 공중전에서 풍왕을 속도로 꺾다니.”
환왕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풍왕이 훨씬 빨라서 놀라고 있었는데, 시리우스는 그것보다 더 빨랐다.
“저런 속도면 검제나 뇌제 같은 놈들도…….”
환왕이 움찔했다.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젠장, 다들 도망쳐라!”
“네?”
“성채 바깥으로 도망쳐! 최대한 멀리 달아나!”
다급히 방어 마법을 전개하면서 환왕이 소리를 질러 댔다.
“풍왕 녀석이 제대로 열 받았다! 여기 있으면 전부 다 죽는단 말이다……!”
“……!”
건물의 잔해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풍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 직후, 풍왕 주위에 무수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몰아쳐라.”
짧게 중얼거린 순간.
풍왕을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이 갑자기 출현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지난번 가르발디가 사용한 마법과 비슷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 규모도 위력도 차원이 달랐다.
주위 건물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흑철맹의 본거지는 이미 많이 부서진 상태였지만 이대로 가면 아예 가루가 될 것 같았다.
태풍의 중심에 위치하는 풍왕 본인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바람의 결계.
오로지 바람만이 존재하는 풍왕의 영토.
“풍왕 영역(領域).”
흑철맹의 본거지 위에 풍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출현했다.
초고속 공중전으로 시리우스를 누르는 것을 포기하고, 9서클 대마도사의 압도적인 마력으로 모조리 쓸어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풍왕은 이 마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시리우스를 쓰러뜨린 다음에는 환왕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역을 생성하는 고유 마법은 막대한 마력을 사용하므로, 환왕과의 싸움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중에서의 속도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굴욕감이 풍왕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당장 시리우스를 죽여야 했다.
“…….”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태풍을 응시하면서, 시리우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무 어마어마한 폭풍이다.
이래서는 창뢰의 공력으로도 뚫을 수 없다.
호신강기를 펼친다고 해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시리우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후우…….”
시리우스는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막대한 내공이 전신 혈도를 질주했다. 태양의 정기에서 비롯된 극양의 기운이 격하게 꿈틀거리면서 그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랑신공의 네 번째 단계, 화천의 불꽃이 거칠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