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13화
113화. 겨우 이 정도인가?
굳이 변장 같은 걸 할 필요는 없었다.
서쪽 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에른스트 가문이 시리우스와 환왕의 인상착의를 파악하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이은 전투 때문에 옷도 너덜너덜해져서, 마치 궁핍한 고행의 길을 걷고 있는 여행자처럼 보였다.
“이봐, 정말로 하는 거냐? 나는 영…….”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사형제라니…….”
“지난번에는 흑의인 노릇도 하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입 다물고 자네들 뒤에 서 있었을 뿐이니 별문제가 없었어.”
“그러면 이번에도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십시오. 과묵한 사형이라는 설정으로 갑시다. 사람들 응대는 제가 할 테니, 옆에서 고개만 끄덕여 주십시오.”
“돌겠군…….”
투덜거리는 환왕을 데리고 시리우스는 산길을 올라갔다.
그러자 커다란 관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관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시리우스와 환왕을 막아섰다.
“여기서부터는 에른스타 가문의 영역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른스트 가문에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가르침?”
경비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에른스트 가문은 아카데미가 아닙니다. 가르침을 원하면 다른 곳을 알아보십시오.”
“맨입으로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수업료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가져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리우스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십 년 전의 사건에서 외부로 유출되었던 마도서를 가져왔습니다.”
“네……?”
“에른스트 가문에서 좀 높으신 분을 불러 주십시오. 자세한 건 그분에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경비병이 다급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십 년 전의 골육상쟁 얘기도 나왔고, 도저히 일개 경비병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떻습니까, 사형.”
“…….”
보란 듯이 말하는 시리우스 옆에서, 환왕은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안쪽에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잠시 뒤 경비병이 돌아와서 문을 열어 줬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꽤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마을…… 아니,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규모였다.
산기슭에는 밭도 있었고, 소 떼와 양 떼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 정도면 외부와의 교류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관문 근처에 있던 커다란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으니 말쑥한 차림의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율리아 에른스트라고 합니다.”
그녀는 예의 바른 태도로 시리우스와 환왕을 대했다.
“실례지만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떤 분들인지 듣지 못해서 말입니다.”
“저희는 협객행(俠客行)을 하고 있는 사형제입니다.”
“협객행……?”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며 항상 과감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고 남의 위급함을 돌보는 사람을 협객이라 합니다. 저희는 그런 협객이 되기 위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 녀석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건가.
환왕은 시리우스를 보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막상 따져 보면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시리우스의 행동을 돌이켜보면, 저 말에서 어긋난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흐음…… 협객이라.”
율리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시리우스의 옷차림을 훑어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듣는 개념이긴 한데,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나 보군요. 보아하니…… 상당한 고행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신념에 충실히 살고 있을 뿐입니다.”
“크흑!”
환왕은 웃음을 참느라 헛기침을 했다.
시리우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 얼굴은 정말로 신념을 위해 고행을 하느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의인(義人)처럼 보였다.
“왜 그러시는지……?”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리우스가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 사형인데, 사악한 연맹 간부와 싸우다가 그만…….”
“네? 연맹 간부와 싸우셨다고요?”
“좀 안 좋은 부분을 다쳐서…… 가끔 이상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는 시리우스를 보면서, 율리아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환왕으로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얘기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면서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시리우스한테 ‘사람들 응대는 제가 할 테니, 옆에서 고개만 끄덕여 주십시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냥 입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협객행 중에 안 좋은 일을 당하셨군요.”
“끄응…….”
환왕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해명하고 싶은데, 시리우스처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연맹 간부와 싸웠다는 말씀이 사실입니까?”
“네,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부하들을 이끌고 무시무시한 마법검을 펼치면서 달려들었는데…… 여기 사형이 자신만의 고유 마법으로 쓰러뜨리셨죠.”
“네? 고유 마법을 쓰신다고요?”
기존의 마법 체계에서 벗어난 고유 마법은 9서클이나 되어야 개발할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꾀죄죄한 행색의 남자가 고유 마법을 쓴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9서클에 도달하셨다는 말씀이신지……?”
“하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
율리아가 살짝 의심하는 눈빛으로 시리우스와 환왕을 쳐다봤다.
지금 시리우스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환왕이 카슈람과 그 부하들 상대로 자신의 고유 마법을 써서 승리를 거둔 건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시리우스의 태도가 원체 요상하다 보니. 그냥 허언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실을 거짓처럼 말하고 거짓을 사실처럼 말하는 시리우스 때문에 환왕은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으음…… 알겠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신 분인 것 같군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율리아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가문에서 유출된 마도서를 가져오셨다는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실 방금 말씀드린 그 싸움에서 얻었습니다.”
“네? 연맹 간부와의 싸움 말입니까?”
“그놈, 그 마도서의 내용을 터득해서 세계를 정복할 꿈을 꾸고 있더군요.”
“세, 세계 정복?”
“네, 아주 사악한 놈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시리우스가 환왕을 손가락질했다.
“그래서 여기 사형이 확!”
“……!”
갑자기 시리우스가 소리를 지르자 환왕도 율리아도 깜짝 놀랐다.
“확, 해치워 버린 것이지요. 협객다운 행동이었습니다.”
“아, 네…….”
율리아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이 되었다.
“마도서가 참 대단한 내용이더군요. 세상에서 사라졌던 고대 마법 같던데…… 이거 빨리 에른스트 가문에 가져다줘야겠다 생각해서, 급히 달려온 겁니다.”
“아, 네…….”
“가만있자, 이름이 뭐였더라.”
“…….”
지금 사기꾼들 상대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아 앞에서, 시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마력병장?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지, 지금 마력병장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요. 그렇지요, 사형?”
“음…….”
환왕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도서 내용을 해석한 건 여기 사형입니다. 저는 사형에 비해 아직 학문적 깊이가 부족해서 마도서를 제대로 읽지 못했지요.”
“그, 그렇군요. 어쨌든 그 마도서에 마력병장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는 거지요?”
“음…….”
이번에도 환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저희 가문에서 십 년 전에 잃어버린 마도서가 맞습니다.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돌아오게 되는군요.”
율리아가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세상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마도서를 회수할 수 있게 되었군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네?”
“아직 돌려드리겠다고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
율리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지금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도 돌려드리고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협격행이니 뭐니 하더니, 결국 그건가.
시리우스를 보는 율리아의 눈빛에 살짝 경멸감이 깃들었다.
“사례금이 필요하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는 게 아닙니다.”
“네?”
“처음 왔을 때부터 말씀드렸을 텐데요.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른스트 가문에도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시리우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에른스트 가문은 뇌전 마법이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뇌전 마법을 응용한 마법검으로 유명하시다고.”
“네, 그렇습니다만…….”
“사실 저도 마법검사여서 말입니다. 에른스트 가문의 마법검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문 바깥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어서…….”
“아, 직접 가르쳐 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 번 경험하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네?”
“저희는 원래 대륙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마법사와 실력을 겨뤄 왔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죠.”
뒤늦게 이해한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에른스트 가문의 마법검사와 대련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그런 거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이쿠, 감사합니다.”
시리우스는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기 전에, 마도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품에서 마도서를 꺼냈다.
책장을 넘기면서 내용까지 보여 주니, 율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군요.”
“다 끝나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율리아가 자리를 떴다.
둘만 남게 되자 환왕이 시리우스를 노려봤다.
“이 자식…… 대체 어쩔 생각이냐?”
“뭘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에른스트 가문을 동맹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나?”
“성질이 급하시군요. 일단 지켜보십시오, 사형.”
“그놈의 사형 소리는…….”
십여 분 뒤, 율리아가 돌아와서 시리우스와 환왕을 불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련 상대를 준비했습니다.”
“…….”
율리아가 안내해 준 곳은 야외에 설치된 훈련장이었다.
에른스트 가문의 젊은이들이 훈련하고 있었는데, 율리아는 시리우스와 환왕을 그 구석으로 데려갔다.
“케인드 에른스트라고 합니다. 젊은 세대 중에서 손꼽히는 유망주죠.”
이십대로 보이는 청년이 훈련용 가검을 들고 있었다.
시리우스가 슬쩍 살펴보니…… 5서클 정도 되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케인드, 외부인을 상대하는 것이니 뇌전의 출력을 너무 올리지 마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모님.”
케인드가 시리우스와 환왕을 쳐다봤다.
“젊으신 분과 싸우는 것 맞습니까? 나이 드신 분은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끄응…….”
환왕이 입술을 깨물고 신음했다.
“많이 배워 가겠습니다, 케인드 님.”
“네, 저야말로.”
사실 케인드는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훈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허름한 옷차림의 불청객과 대련을 하게 되었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검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리우스와 케인드는 훈련장 구석에서 대치했다.
주위에서는 여전히 다른 녀석들이 훈련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시작해도 될까요?”
“네, 먼저 시작하시죠.”
“선공을 양보해 주시다니, 역시 대륙 5대 명가군요.”
“아니 뭐, 이 정도는…….”
케인드가 따분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시리우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
쿠웅!
케인드가 하늘을 날았다.
멀리 날아간 케인드는 근처 건물 벽에 처박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어……?”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주위에서 훈련하던 청년들도 깜짝 놀라 쳐다봤다.
그들 앞에서 시리우스는 냉철한 표정으로 검을 거둬들였다.
“에른스트 가문의 실력이 겨우 이 정도인가?”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