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17화
117화. 소용없는 짓이다
“마력병장에 대해서는, 우리 에른스트 가문도 아는 게 별로 없네.”
마력병장 얘기를 꺼내자, 모리츠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가져다준 마도서에 적혀 있는 내용…… 그 이상은 알지 못하네.”
“그게 정말인가?”
시리우스 옆에 있던 환왕이 물었다.
“혹시 에른스트 가문에도 마도서 원본이 없는 건가?”
“그렇다네, 환왕.”
모리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미 마도서의 내용을 다 파악한 모양이군.”
“그래, 오늘 우리가 가져온 마도서는 사본…… 아니, 발췌본이었어.”
제피로스와 카슈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환왕은 알 수 있었다.
마력병장의 마도서는 중요한 부분이 많이 빠져 있는 발췌본이었다.
“발췌본만으로도 마력병장을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솔직히 결함투성이야. 특히 다른 마법과 조합할 때 위험한 요소가 많더군.”
“그렇지. 우리 가문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네. 뇌전의 마법검과 조합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실제로는 어려웠지.”
제피로스는 마력병장만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단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검사인 카슈람은 마력병장과 마법검을 조합하는 걸 기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위험한 부분이 많아서, 에른스트 가문에서는 그 마도서를 봉인해 두고 있었네. 십 년 전에 도둑맞아 버렸지만.”
“…….”
말하자면…… 마력병장은 결함이 많은 마공(魔功)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봉인해 두고 있던 것이다.
“모리츠 님.”
“왜 그러지?”
“만약 마도서 원본을 입수한다면 마력병장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
시리우스가 질문을 던지자, 모리츠가 생각에 잠겼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우리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발췌본에는 기초적인 내용만 실려 있었으니…… 원본을 연구하면 다를지도 모르네.”
“그렇군요.”
제피로스는 발췌본만 공부하고도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만약 마도서 원본을 입수해서 마력병장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다면…… 큰 성취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마력병장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네, 맞습니다.”
“자네는 마력병장 없이도 비슷한 힘을 발휘하던 것 같던데?”
“제가 직접 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한테 전수해 줄 수 있으니까요.”
마력병장을 사용하면 내공 없이도 육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걸 잘 연구하면 ‘마력을 사용하는 무공’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른스트 가문의 마법검에 마력병장을 조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흐음…… 그게 가능하다면 재미있겠군.”
모리츠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북쪽으로 가보는 게 좋을 걸세.”
“북부 지역 말입니까?”
“그렇지. 북쪽의 테르나크 가문이라면 뭔가 아는 게 있을 테니까.”
테르나크 가문.
그 이름에 환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인 ‘북부의 패자(覇者)’ 말이군.”
“그렇지.”
테르나크 가문은 에른스트 가문과 마찬가지로 대륙 5대 명가 중 하나다.
북부 지역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가문으로, 남부의 스트라우스 가문 이상의 힘을 지녔다.
“이 발췌본 자체가 테르나크 가문에서 작성한 것이네. 옛날에 테르나크 가문에서 마력병장을 연구했었거든.”
“그랬습니까?”
“그래, 테르나크 가문은…… 대륙 5대 명가 중에서 가장 무력(武力)을 중시하는 가문이었으니까.”
“…….”
“테르나크 가문이 마력병장을 실전에서 활용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한 뒤, 모리츠는 시리우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리우스, 어차피 자네는 이제 북부로 향할 것 아닌가?”
“맞습니다.”
동부와 남부에 이어 서부를 평정했다.
이제는 북부에 진출할 차례다.
대륙의 ‘중앙 지역’에 진출하는 건 북부를 평정한 다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테르나크 가문에도 방문해 보게. 내가 소개장을 써 주지.”
“소개장을 써 주신다고요?”
“테르나크 가문의 가주하고는 친분이 있네. 루트베인 리겔이 이미 편지를 보냈겠지만, 내 소개장을 들고 가는 편이 더 수월할 걸세.”
그렇게 말한 뒤 모리츠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 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테르나크 가문에도 쳐들어가면 큰일 나네. 그러니 최대한 온건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을 걸세.”
“…….”
“테르나크 가문은…… 대륙 5대 명가 중에서도 가장 거친 가문이니까 말일세.”
북부의 패자, 테르나크 가문.
척박한 북부 지역을 지배하는 그 가문은, 다른 5대 명가와는 명백히 다른 가풍을 지닌 곳이었다.
* * *
에른스트 가문에서는 조만간 루카스를 중심으로 한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서부의 여러 명가와 함께 정천맹에 참가하기로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일이 잘 풀렸군, 시리우스.”
에른스트 가문을 뒤로하며, 풍왕이 시리우스에게 말을 걸었다.
“흑철맹도 굴복시켰고, 연맹의 풍왕도 쓰러뜨렸고, 에른스트 가문도 아군으로 만들었으니…… 서부는 이제 완전히 평정된 건가.”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긴 합니다.”
서부에서 시리우스에게 대항할 세력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 대신, 이제부터는 여러 세력 사이의 조율이 중요하다.
“서부 지역의 여러 명문가들은 흑회 출신들과 어울리는 걸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 부분들도 잘 조율해야죠.”
“쉽지 않을 텐데.”
“에른스트 가문과 그란츠 가문이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면 가능할 겁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산에서 내려갔다.
“그러면 슬슬 팔라미아 방면으로 출발할까?”
환왕이 비행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가 제지했다.
“식사나 하고 갑시다.”
“식사? 아까 에른스트 가문에서 대접받았잖아?”
“너무 정갈해서 입맛에 안 맞더군요. 양도 적고.”
“흠, 그건 그렇더군.”
깊은 산속에서 자급자족하고 있는 가문이라, 식사가 별로 푸짐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절밥을 먹는 느낌이랄까?
“저 아래에 여관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서 배 좀 채우고 출발합시다.”
“저런 곳이 있었나?”
두 사람은 산기슭에 자리 잡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쪽 세계의 여관이 대부분 그렇듯이, 1층은 식당으로 되어 있었다.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없군.”
환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부스스한 얼굴을 한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식사만 하고 가겠네. 알아서 잘 차려 줘.”
그렇게 주문을 한 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삐걱대는 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중년 여성이 커다란 그릇 하나를 들고 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나 더 갖다 드릴게요.”
그녀는 연장자인 환왕 앞에 그릇을 내려놓은 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릇의 내용물은 온갖 야채와 고기가 잔뜩 들어 있는 스튜였다.
“꽤 괜찮아 보이는군. 먼저 먹겠네.”
환왕이 입맛을 다시면서 식사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서 환왕의 그릇을 빼앗았다.
“뭐야?”
어리둥절한 환왕 앞에서, 시리우스는 숟가락을 들고 스튜를 퍼먹기 시작했다.
가장 커다란 고깃덩어리부터 먹는 시리우스의 모습에 환왕은 눈을 치켜떴다.
“이 자식아, 정신 나갔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시리우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깃덩어리에 있던 뼛조각을 뱉어 낸 뒤,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여기…….”
“아, 이쪽에 놔주게.”
그때 여성이 두 번째 그릇을 들고 왔다.
환왕이 자기한테 주라고 손을 치켜든 순간.
시리우스가 자기 앞에 있던 그릇을 집어 던졌다.
“뭐야?!”
요리가 마음에 안 들었나?
환왕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숨을 삼켰다.
시리우스가 갑자기 그릇을 집어 던졌는데, 그걸 중년 여성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
환왕도 상황을 파악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뒤, 신속히 거리를 벌렸다.
“독이냐?”
“네, 맞습니다.”
시리우스의 대답을 듣고 환왕이 까득 이를 갈았다.
시리우스가 미리 눈치채고 그릇을 빼앗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독이 든 요리를 먹을 뻔했다.
“우리가 처음 이 산에 도착했을 때, 이런 위치에는 여관이 없었습니다.”
“그래, 왠지 낯설더라고.”
누군가가 이곳에 급하게 여관을 만들었다.
시리우스와 환왕을 노리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할 만한 놈은…….”
환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부엌 쪽을 노려봤다.
중년 여성이 그쪽에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슈레흐트, 네놈이냐?”
그 직후, 부엌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한 미남자였는데, 얼굴의 반쪽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어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환왕 전하.”
미남자가 절반만 드러낸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독왕 전하가 소식을 궁금해하시던데,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흥,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코웃음을 치면서 환왕이 말했다.
“시리우스, 저놈은 삼두사(三頭蛇)의 한 사람인 슈레흐트라는 놈이다.”
“삼두사?”
“독왕의 최측근이다. 독왕 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놈들이지.”
환왕의 목소리에는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독한 놈들이라는 얘기다. 조심해라.”
“너무하시는군요, 환왕 전하.”
슈레흐트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제가 독왕 전하와의 밀회를 도와드렸던 것, 벌써 잊으셨습니까?”
“개소리하지 마라! 그런 적 없어!”
환왕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은 항상 그렇게 허황된 소리를……!”
“흥분하지 마십시오, 환왕 전하. 소소한 농담일 뿐입니다.”
“이 자식이……!”
연맹 관계자를 상대로 환왕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 슈레흐트라는 남자…… 보통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음식에 독약을 탄 것도 소소한 농담이었나?”
“흠, 시리우스 님.”
시리우스가 한마디 하자, 슈레흐트의 시선이 시리우스에게 향했다.
“이 정도는 가벼운 인사라 할 수 있지요.”
“상대에게 독을 먹이는 걸로 인사를 하다니, 독왕의 최측근답군.”
“그래야 서로를 알 수 있지요.”
슈레흐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이런 독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독에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겁니다.”
“…….”
그 말을 듣고, 시리우스는 환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독왕의 최측근들은 원래 저렇게 머리가 돌아 버린 놈들입니까?”
“독한 놈들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베르디안한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서로에게 독살을 시도하면서 유능한 놈만 살아남도록 하는 게 독왕 파벌의 분위기인 걸까.
“방금 스튜에는 제가 독자적으로 배합한 독을 넣었습니다. 한 숟갈만 먹어도 쓰러져야 하는데 멀쩡하다니…… 대단하시군요.”
슈레흐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대체 어떻게 그 정도의 내성을 획득하셨습니까? 궁금합니다.”
“내 수하로 들어오면 알려 주지, 슈레흐트.”
“네?”
“지금 내 수하가 되면 네가 막내가 된다. 그동안 베르디안이 막내였는데, 비로소 막내 신세를 탈출하는군.”
“…….”
“베르디안 밑에서 막내 노릇을 잘하면 언젠가 가르쳐 주마.”
시리우스의 말을 듣고, 슈레흐트가 피식 웃었다.
“그 아이 밑으로 들어가란 말입니까?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소소한 농담이다. 너 같은 놈을 수하로 삼을 생각은 없으니까.”
시리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 있던 환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서로 농담은 충분히 주고받은 것 같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떻겠나?”
“본론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용건이 있으니 굳이 이런 건물까지 세운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환왕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삼두사 중 한 명인 네놈이 직접 나왔다는 건, 독왕의 메시지를 갖고 왔다는 거겠지. 어디 한번 얘기를 해 봐.”
“환왕 전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뭐라고?”
“딱히 여러분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이 건물을 세운 건 아닙니다.”
슈레흐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여러분이 여기에 들어오란 보장도 없고 말이죠. 여러분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시리우스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 여관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
그냥 비행 마법과 경공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말입니다. 이게 건물처럼 보입니까?”
“뭐라고?”
슈레흐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가루가 퍼지는 모습을 보면서 환왕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하루아침에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막대한 양의 독극물을 마법으로 가공하여 여관 형태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만약 시리우스와 환왕이 이 여관을 그냥 지나쳤더라면…… 손가락을 한번 튕겨서 회수한 뒤, 다른 함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시리우스, 아무리 당신이 독에 내성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 양을 모조리 뒤집어쓰고도 견뎌 내는 건…….”
“재주가 대단하군, 슈레흐트.”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슈레흐트의 말을 끊으면서, 시리우스가 손을 뻗어 환왕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네?”
콰아앙!
갑자기 분출한 막대한 화염이, 시리우스와 환왕을 덮치려던 독가루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 정신 나간 놈……!”
“발버둥 치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환왕이 휘말리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화천의 공력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막대한 화염으로 독극물을 모조리 불태워 버린 뒤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망치고 있군요.”
슈레흐트가 불꽃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온몸이 불에 그슬린 상태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저놈을 잡아서, 독왕의 근황이나 들어 봅시다.”
“이, 이 자식아……!”
목소리를 높이는 환왕을 붙잡은 채, 시리우스는 경공을 사용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