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24화
124화. 소문을 못 들은 모양
“세피아 양은 좀 어떤 것 같나요?”
경매장에서 구출한 소녀 세피아 르블링드의 얘기를 듣고, 유스티아도 마음 아파했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큰 것 같아서 환왕한테 맡겨 놨어.”
“환왕한테요?”
“환영 마법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그렇군요.”
유스티아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르블링드 가문이 멸망해서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 쪽에서 보살펴 주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 우리가 직접 보살펴 줄 수는 없지만.”
시리우스에게 어린 여자아이를 보살피는 능력은 없다.
베르디안처럼 충분히 컸다면 모를까, 세피아는 아직 열 살이니까.
심지어 세피아는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말을 못하는 상태라…… 더더욱 대하기 어려웠다.
“상처 입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돌봐 줘야 할지…… 티타니아 언니라면 잘 달래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러면 일단 티타니아 님한테 보낼까?”
“글쎄요. 충분히 안정된 상태라면 모를까,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것도 그렇군. 일단 지켜봐야겠어.”
세피아는 정신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다.
일단 환왕의 환영 마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지켜본 뒤 방침을 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죠.”
“왜 그러지?”
“동부 지역에서도 연맹은 아이를 납치해서 어디론가 보내곤 했잖아요?”
“그랬지.”
납치된 아이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계속 추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은랑공은 세피아 양을 어디로 보내지 않고 경매장에 넘겼어요. 좀 이상하지 않나요?”
“…….”
시리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을 납치해서 끌고 가는 파벌이 따로 있다는 얘기겠군.”
“네, 빙왕 파벌이 아닌 다른 파벌에서 아이들을 끌고 갔다는 얘기죠.”
대체 어떤 놈들이 어떤 의도로 아이들을 납치해간 걸까.
“그렇다고 해서 빙왕 파벌이 악독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지만요.”
“그래, 빙왕 파벌도 악독한 놈들이지.”
색마를 연상케 하는 은랑공의 행각만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단 은랑공부터 유인할 생각이야. 가만히 있어도 나를 죽이러 찾아올 것 같으니까.”
“그렇군요.”
“도시 내부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만 해둬.”
“천랑검단으로 도시를 지킬 건가요?”
“그것도 하겠지만…… 놈을 유인하면 돼.”
“……?”
유스티아가 눈을 깜박였다.
“뭘 어떻게 할 건데요?”
“유스티아, 부탁 한 가지만 하자.”
시리우스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대체 무슨 중요한 부탁을 하려는 걸까. 유스티아는 자세를 바로 하고 시리우스의 얘기를 들었다.
“가게 하나 차려 줘.”
“…….”
돈 많은 아내한테 가게 차릴 돈을 내달라고 부탁하는 무능한 남편.
누가 보면 꼭 그런 모습이었다.
* * *
발그라드 끄트머리.
시내로 들어오기 위한 길목 옆에는 통행세를 징수하던 2층짜리 검문소가 있었다.
하지만 모데로드 가문이 몰락하면서 검문소도 폐쇄되었다.
그 검문소에…… 새로운 간판이 달렸다.
“천랑객잔?”
벨리드가 바깥에서 간판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데?”
“그냥 여관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된다. 1층에서는 식사를 할 수 있고, 2층에서는 잠을 잘 수 있고.”
시리우스가 1층에서 빵을 뜯어먹으며 대답하자, 벨리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누가 이런 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 조금만 들어가도 발그라드 중심가인데.”
“딱히 손님을 받기 위한 건 아니야.”
“뭐?”
“이 위치가 가장 적당할 것 같아서 말이다.”
북부의 다른 지역에서 발그라드로 들어오려면 이쪽 길목을 지나가야 한다.
즉, 은랑공이 부하들을 이끌고 발그라드를 습격한다면 이 천랑객잔 앞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는 초소(哨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아니, 그런데 왜 여관처럼 차려 놓는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냥 멍하니 적들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으면 심심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가게 앞 공터를 가리켰다.
“수련하기에 적당한 공터도 있고.”
“아…….”
“벨리드, 너도 시간 날 때마다 여기 와서 수련해라. 내가 봐줄 테니까.”
현재 벨리드는 발그라드 안팎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협력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많이 바쁜 상황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수련을 하면 좋을 것이다.
“맹주님!”
그때 2층에서 제피로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창고에 있던 물건을 치우고, 이층침대를 설치했습니다!”
“그래, 침대 하나는 네가 써라.”
“감사합니다!”
“내려와서 식사 좀 해라. 있다가 권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네……!”
시리우스와 제피로스의 대화를 듣고 벨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제피로스 저 녀석은 아예 여기서 잠까지 자기로 한 거야?”
“그래, 2층에 침대를 몇 개 놨으니까.”
이미 제피로스는 여기서 머무르면서 시리우스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제피로스는 마력병장으로 육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솔직히 기술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시리우스는 무림의 권법이나 장법을 가르쳐 줘서 근접전 능력을 극대화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잘래!”
“마음대로 해라.”
벨리드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 베르디안이 나타났다.
참고로 베르디안은 여기서 10분 거리에 연구실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시리우스 님.”
“너도 밥 먹으러 온 거냐?”
“아니요. 영약이 완성되어서요.”
베르디안이 환약통을 건넸다.
“시리우스 님이 주문하신 백빙환(白氷丸)이에요.”
백빙환은 백빙화와 다른 약재를 조합한 영약이다.
그동안 베르디안과 함께 연구한 결과, 백빙화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부작용을 줄이는 조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백빙화만 단독으로 복용했지만, 이렇게 백빙환으로 만들어 복용하면 더 안정적으로 내공을 얻을 수 있다.
“고맙군. 잘 복용하지.”
시리우스는 환약통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디안, 급한 일 있나?”
“네?”
“벨리드와 한번 대련을 해 봐라. 서로 상태를 점검해야 하니.”
벨리드와 베르디안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좋아, 내 삼재검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 주지.”
“채찍으로 맞고 울지나 마세요.”
벨리드가 팔을 걷어붙이고 객잔 앞 공터로 향했고, 베르디안도 그 뒤를 따랐다.
“맹주님, 저도 저 녀석들하고 대련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때 1층으로 내려온 제피로스가 빵을 먹으면서 말했다.
“안 되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
“감사합…….”
“하지만, 너는 마력병장을 쓰지 마라.”
“네?”
제피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마력병장을 쓰지 않고 저 녀석들과 싸우라고요?”
“너는 네 육체를 보다 정확히 파악해야 돼. 일단 맨몸으로 싸우는 방법부터 다시 익혀.”
마력병장을 쓰면 제피로스가 벨리드와 베르디안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마력병장이 없다면 시리우스에게 무술을 배운 벨리드와 베르디안이 유리하다.
“나는 내공 없이 싸워도 웬만한 놈들은 쓰러뜨릴 자신이 있다. 너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해.”
“으음…….”
그런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환왕이 찜찜한 표정을 지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큰형님도 여기 오시는 겁니까?”
“누가 큰형님이야…….”
제피로스의 질문에 환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우스, 일단 이 녀석한테 밥이라도 먹여 줘라.”
“…….”
환왕 옆에는…… 세피아가 있었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환왕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안 떨어지려고 하더군, 젠장…….”
“그랬군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세피아는 환왕의 옷자락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세피아.”
“……!”
세피아가 시리우스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경매장에서 구해 준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안쪽으로 들어와라. 지금은 빵밖에 없긴 하지만…….”
그렇게 말을 건넨 뒤, 시리우스는 환왕을 쳐다봤다.
“큰형님도 같이 오시죠. 큰형님이 함께 있어야 세피아도 안심하고 식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쯧…….”
환왕이 혀를 차면서 세피아를 데리고 천랑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공터에서 대련을 시작한 벨리드와 베르디안을 힐끔 쳐다본 뒤, 시리우스는 빵을 꺼내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된 손님은 없는 객잔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리우스의 측근들이 계속 드나든다면…… 은랑공이든 누구든 접근했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 * *
늦은 밤.
벨리드와 베르디안에게 연달아 패배한 제피로스에게 권법 초식 하나를 가르쳐 준 뒤, 시리우스는 천랑객잔 2층으로 올라갔다.
“…….”
객잔 앞 공터에서 제피로스가 혼자 권법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벨리드도 그 옆에서 가검을 휘두르며 삼재검법을 수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시리우스는 베르디안이 준비해 준 환약통을 열었다.
백빙화 말고 다른 약재도 들어갔기 때문에 은은한 향기가 났다.
시리우스는 백빙환을 씹어서 삼킨 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역시 더 안정적이군.’
금방 가슴속이 차가워졌다.
백빙화의 냉기가 몸에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혈맥 속에서 엉키는 느낌이 없었다.
혈맥을 잘 통하게 하는 약재와 조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복용하면 백어증(白瘀症)에 걸릴 일도 없지.’
백어증은 예전에 시리우스가 앓고 있던 병이다.
백빙화를 잘못 복용하면 혈맥에 냉기가 엉켜 백어증에 걸린다.
유테루스 가문은 시리우스의 백어증을 악화시키기 위해 백빙화 가루를 술에 타서 먹인 적이 있다.
‘그런데 시리우스는 어쩌다가 백빙화를 먹게 된 걸까?’
예전에도 백빙화를 먹은 적이 있으니까 백어증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짐작가는 것이 없었다.
‘카니스루트 가문에 가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카니스루트 가문은 북부 지역에서도 변방에 있다.
거기를 찾아가려면 이곳 발그라드를 한참 비워야 한다.
은랑공과의 싸움을 앞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지금은 백빙화의 기운을 녹여 내는 것에 집중하자.’
시리우스는 천랑신공의 구결에 맞춰서 진기를 운용했다.
백빙환에서 흡수된 백빙화의 냉기가 진기의 흐름에 휩쓸려 서서히 안정되었다.
이걸 단전으로 보낸 뒤, 그동안 갖고 있던 극음의 내공에 더했다.
물론, 이렇게 하면 금색 천 년초에서 얻어 낸 극양의 내공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극양의 내공이 차가운 기운에 대항하겠다는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걸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음과 양의 조화가 깨져서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
시리우스는 잡생각을 지우고 음과 양을 조화롭게 하는 것에 집중했다.
음양지체가 아니더라도 천랑신공을 제대로 운용하면 극음과 극양을 공존시킬 수 있다.
음과 양이 어우러지는 태극의 모양을 의식하면서, 막대한 내공을 안정화시켰다.
이것은 백빙환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시리우스는 계속해서 천랑신공을 운용했다.
“후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바깥은 밝아져 있었다.
단전을 확인하니, 딱 5갑자였던 내공이 6갑자에 근접한 상태였다.
시리우스가 기대한 만큼의 내공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백빙화는 이제 더 이상 안 먹어도 되겠군.’
원래 같은 영약을 여러 번 먹으면 효과가 약해지는 법이다.
앞으로는 백빙화를 입수해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게 좋을 것이다.
“…….”
시리우스는 방구석에 뒀던 흑철검을 집어 들었다.
몇 번 사용해 보고 느낀 거지만, 이 새카만 검은 극음의 무공에 더 잘 반응하는 것 같다.
르블링드 가문에 대대로 내려져오는 검인 것 같은데, 어떤 내력이 있을까.
시리우스는 흑철검을 들고 북명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시커먼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몇 번 휘둘러본 뒤, 백랑의 공력으로 전환했다.
흑색 칼날에 백색 검기가 일렁였다.
시리우스는 차디찬 검기를 계속 키운 뒤…… 단번에 압축했다.
일렁이던 냉기가 단단한 빙검(氷劍)이 되었다.
백랑의 공력을 사용한 검강이었다.
휘익!
얼어붙은 칼날을 휘둘러 공기를 가른 뒤, 시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겠군.”
만족감을 느끼며 검강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1층으로 내려갔다.
“……?”
1층에 마련된 자리에 환왕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확인해 보니, 세피아가 환왕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쓰셨습니까? 육아 재능이 있었던 겁니까?”
“조용히 해라. 깬다.”
환왕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깥쪽 탁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까 새가 날아와서 종이쪽지 하나를 두고 갔다.”
“새가 종이쪽지를 두고 갔다고요?”
“확인해 봐라. 나는 못 봤으니.”
탁자 위에는 정말로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리우스가 쪽지를 펴 보니, 유려한 필체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뒤, 시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누가 보낸 거냐?”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누가 보냈는지는 확실하군요.”
시리우스는 쪽지를 환왕에게 보여 줬다.
그러자 환왕도 풋 하고 웃었다.
“이건 누가 봐도 은랑공이군.”
오늘밤 네 아내를 취하러 갈 테니, 예쁘게 단장시켜 놓고 기다려라.
쪽지에는 그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은랑공이 아직 소문을 못 들은 모양입니다.”
“그래, 나 같으면 무서워서 이런 쪽지는 보내지 못할 텐데 말이다.”
시리우스 카니스루트는 아내를 탐내는 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 소문을 은랑공이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으니…… 직접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