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명가의 절대무신 126화
126화. 늑대 같은 마법이군
의자가 무너지면서 탁자도 자연스레 옆으로 쓰러졌다.
술병과 술잔도 깨져서 난장판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은랑공의 부하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신속히 정리한 뒤 은랑공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줬을 뿐이다.
평범한 흑회 놈들이라면 ‘감히 이런 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철저히 절제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제대로 교육이 되어 있는 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우…….”
은랑공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멸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지만, 금방 표정 관리를 했다.
아무래도 은랑공도 보통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시리우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까부는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면서 은랑공은 시리우스의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겠지?”
“…….”
은랑공이 쳐다본 사람은 다름 아닌 환왕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환왕 전하.”
“그래, 오랜만이군.”
환왕은 은랑공과 면식이 있다고 한다.
다만 워낙 예전 일이라, 지금은 어느 정도 실력일지 잘 모르겠다는 것 같았다.
“시리우스, 대체 어떻게 저분을 포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저분이 곁에 있으면 든든하겠지.”
“…….”
“함께 풍왕까지 쓰러뜨렸으니까 말이다.”
역시 은랑공은 시리우스가 풍왕을 단독으로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마차에서 자욱한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독인가?!”
“인체에는 무해하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제피로스가 깜짝 놀라자 은랑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마력 노이즈를 발생시켜 환영 마법을 방해하는 연기다. 아무리 9서클의 환영술사라고 해도, 이 연기가 퍼져 있는 곳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
예전에 남부 지부장이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독왕이 직접 만든 특제품이라는 얘기다.
“끄응…….”
환왕이 팔짱을 낀 채 신음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가 한마디 했다.
“아직까지도 대책을 못 세운 겁니까?”
“독왕 녀석이 나를 겨냥해서 작정하고 만든 거다. 쉽지가 않다…….”
“도움이 안 되는군요, 큰형님.”
“크윽…….”
시리우스의 핀잔에 환왕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리우스, 환왕의 도움 없이 어떻게 우리를 상대할 생각이지?”
“…….”
“좋은 말로 할 때 네 아내를 바쳐라. 그러면 오늘은 그냥 물러나 주마.”
은랑공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 은랑공 곁에 있는 부하들도 6서클 이상의 실력자들밖에 없었다.
게다가 은랑공은 빙왕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8서클 마도사이기 때문에…… 환왕만 무력화시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은랑공.”
시리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
“뭐지?”
“여자 앞에 서면 자신감이 없어지는 성격인가?”
“……?”
갑작스러운 질문에 은랑공이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리냐?”
“내 아내한테 관심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추파를 던지면 되는 것 아닌가? 어째서 나한테 내 아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시리우스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정말로 매력적인 남자라면 내 아내를 유혹할 수 있을 거다. 네 매력으로 남의 여자를 빼앗는 거니, 더 보람 있는 일이겠지.”
“…….”
“그리고 나한테 심각한 패배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남자로서 매력이 부족해서 아내를 빼앗겼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시리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남편인 나한테 아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군. 정말로 꼴사나운 짓 아닌가? 남의 아내를 빼앗고 싶으면 직접 만나서 꼬드기면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남편한테 와서 징징대는 꼴을 보니 알 만하군.”
“시리우스…….”
은랑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해괴망측한 궤변을 늘어놓는군. 게다가 내가 징징대고 있다고?”
“내 말이 틀렸나? 아까부터 계속 그러는 것 같은데.”
시리우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원한다면 내 아내와의 만남 자리를 만들어 주마. 방해하지 않을 테니 열심히 꼬드겨 봐라.”
“네놈…….”
“왜? 못할 것 같나? 내 아내를 직접 만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게 될 것 같은가 보지?”
주위에서 피식 소리가 들려왔다.
시리우스의 조롱에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고 있었다.
“하긴, 너처럼 찌질한 녀석한테 유스티아는 좀 버거울 수도 있다. 성격이 워낙 쌀쌀맞아서 말이다. ‘죄송하지만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네요.’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너는 분명 마음의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게 되겠지.”
“푸훗!”
결국 옆에서 벨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 시리우스, 그 성대모사, 조금 비슷했어.”
“유스티아 님한테 들려주고 싶네요.”
베르디안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이놈들이…….”
은랑공이 까득 이를 갈았다.
기껏 표정 관리를 했는데, 다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다. 정말로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차피 나를 살려 둘 생각은 없었을 텐데.”
시리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독왕이 제조한 약물을 제공받았다는 건 이미 빙왕과 독왕이 손을 잡은 상태라는 얘기겠지. 네가 빙왕의 부하인 이상, 우리를 반드시 처리해야 할 거다.”
“그건…….”
“애초에 너는 아내를 넘겨받았다고 해서 얌전히 물러갈 놈이 아니다. 우리를 조롱하며 공격을 개시하겠지.”
“…….”
정곡을 찔린 은랑공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더 이상 너하고 얘기를 나눠 봤자 시간 낭비일 것 같군.”
은랑공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부하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왔다.
“전부 죽여라. 시리우스만 제외하고.”
그렇게 말하며 은랑공은 시리우스를 노려봤다.
“시리우스, 너는 죽이지 않는다. 네 아내를 취하는 광경을 구경시켜 주고 싶으니 말이다.”
“꿈도 크군, 은랑공.”
은랑공의 수행원은 전부 네 명.
두 명은 6서클이고 나머지 두 명은 7서클이었다.
다들 중견 가문이나 흑회 조직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을 실력자였다.
“맹주님.”
그때였다.
알레이온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저런 잔챙이들까지 일일이 상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러자 제피로스도 팔을 걷어붙였다.
“저한테도 맡겨 주십시오, 맹주님. 가르쳐 주신 권법으로 다 때려눕히겠습니다.”
“으음, 그러면 나도 나설 수밖에 없군.”
“어쩔 수 없네요.”
알레이온과 제피로스에 이어서 벨리드와 베르디안도 앞으로 나섰다.
“저쪽도 네 명, 이쪽도 네 명…… 사람 숫자가 딱 맞군.”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동안 수련한 성과를 보여라.”
“네……!”
은랑공의 부하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절반은 검을 뽑았다. 나머지 절반은 손을 들고 공격 마법을 날렸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제피로스였다.
마력병장으로 몸을 감싸고 공격 마법을 튕겨 낸 뒤, 가장 앞장선 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쿵, 쿠웅!
시리우스가 어젯밤 전수한 강맹권법(强猛拳法)의 초식이 펼쳐졌다.
마력으로 강화된 주먹이 상대의 어깨와 명치를 후려쳤다.
“하압!”
벨리드의 지원 사격을 받으면서 돌진한 알레이온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의 마법검과 충돌해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알레이온은 교묘한 움직임으로 상대에게 빈틈을 만들었고, 그 직후 흑영탈명 검법으로 깊은 상처를 입혔다.
후방에 있던 놈들이 다급히 공격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멀리서 뻗어 온 베르디안의 채찍이 그 오른손을 후려쳤다.
“으윽!”
적들이 다급히 대응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베르디안의 전신과 채찍에는 유운진기가 실려 있었으니까.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적들을 유린했다.
베르디안 자신도 채찍과 일체화되어 교묘한 움직임으로 적들의 반격을 피했다.
그러는 사이 제피로스의 주먹이 한 놈의 머리통을 부쉈다.
그 직후 알레이온도 상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이어서 베르디안의 채찍이 적의 목을 휘감았고, 바로 달려든 벨리드가 가검으로 그 머리통을 후려쳤다.
“……!”
순식간에 한 명만 남았다.
그래도 그는 주춤하지 않았다.
제대로 교육받은 놈이라서 그런지, 결사의 각오로 돌격을 시도했다.
그의 표적은 베르디안이었다.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몸집이 작은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채찍을 경계하여 방어 마법을 전개하고 달려들었지만…….
“윽……!”
갑자기 휘청거리면서 쓰러졌다.
베르디안이 뿌려 놓은 독을 그대로 들이마셨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벨리드가 재빨리 달려들어서 숨통을 끊었다.
“후우, 내가 두 놈이나 쓰러뜨렸네.”
“잠깐만요. 제가 무력화시킨 놈한테 마무리만 했을 뿐이잖아요?”
“어? 그런가?”
벨리드와 베르디안이 느긋하게 대화를 나눴다.
싸움에 나선 네 사람 모두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그들이 흔해 빠진 마법이나 검술로 싸웠다면 패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리우스한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기에 생소한 기술들로 허를 찌르면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은랑공은 당황한 눈치였다.
시리우스도 아니고 그 부하들에게 이렇게 완패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리우스는 입을 열었다.
“부하들이 다 죽었군.”
“큭…….”
“그 녀석들만 데리고 와도 발그라드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를 너무 얕봤다.”
시리우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정천맹이다, 은랑공.”
“…….”
은랑공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놈들…….”
부하들은 은랑공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버렸다.
하지만 은랑공은 그런 부하들에게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시리우스는 은랑공이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느꼈다.
“맹주님, 저놈도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래, 우리가 잡아 볼게.”
제피로스와 벨리드가 은랑공에게 덤벼들려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러서.”
“맹주님, 하지만…….”
“저런 쓰레기 색골 자식 정도는 우리가 상대해도 될 것 같은데?”
시리우스는 앞으로 걸어가서 벨리드의 뒤통수를 한 대 쳤다.
“아야!”
“잔챙이 몇 명 쓰러뜨렸다고 우쭐하지 마라.”
“아, 알았어…….”
투덜거리면서 벨리드가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도 물러섰기 때문에, 시리우스와 은랑공이 일대일로 대치하게 되었다.
“…….”
시리우스는 은랑공을 가만히 살펴봤다.
벨리드는 여자를 밝히는 색골이라고 우습게 여겼지만, 은랑공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8서클의 마력을 갖고 있는데…… 풍왕의 오른팔이었던 가르발디 이상의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시리우스.”
은랑공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은랑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아는가?”
“머리카락 색깔 때문인가?”
은랑공은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은랑(銀狼). 즉, 은색 늑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니다, 시리우스.”
그 순간.
무수히 많은 ‘얼음의 송곳니’가 시리우스를 향해 쏟아졌다.
“북부 지역에 서식하는 ‘은색 늑대’처럼,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기기 때문이지.”
“맹주님……!”
제피로스가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합세하려 했다.
하지만 알레이온이 그 어깨를 붙잡았다.
“방해된다. 물러서.”
“하지만……!”
“맹주님을 얕보지 마라, 막내.”
쿠웅!
쏟아지는 얼음의 송곳니를 뚫고, 시리우스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상처 하나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은랑공이 경악했다.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 같은 마법이군.”
“……!”
“은색 늑대…… 은랑인가.”
숨을 삼키는 은랑공을 내려다보면서, 시리우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천랑(天狼)의 힘을 보여 주마.”
하늘 높이 솟아오른 시리우스가 천랑신공을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