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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화 (5/172)

5화

징수인 케이안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는 무엇이냐고.

케이안을 아는 이들 중 아무나 붙잡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이들이 아래와 같은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자만, 오만, 그리고 방심.’

배드니커가에서 34년간 징수인으로서 종사했고, 그간 주어진 1,031개의 임무를 모두 완수했다.

그가 가장 강한 징수인은 아니지만, 가장 완벽한 징수인이란 사실엔 그 누구도 이견을 두지 않았다.

상상조차 못 했다.

설마 그 경력에 흠이 생기는 게 오늘일 거라고는.

물론 케이안의 건조한 성격은 개인적인 기록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는 않았으나, 뜻밖인 건 뜻밖인 거다.

‘나도 이제 늙은 것인가.’

은퇴를 권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케이안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앞을 보았다.

무딘 칼날은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목울대를 겨냥하고 있고.

검의 주인은 입가의 삐뚜름한 미소와는 상반되는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루안 배드니커는 이런 눈빛의 소유자였는가.

그렇다면 여태껏 본가에서 보였던 모습은 무엇일까.

그 짧은 시간 동안 각성이라도 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게 연기였나.’

케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금 루안의 공격, 육체에 새겨진 고통을 하나씩 체크하며 입을 열었다.

“…배드니커의 가전 검술 [아이언하트].”

“…….”

“턱을 쳐올린 공격은 제7식 하늘 찌르기. 가슴 중앙, 명치, 배꼽으로 이어지는 연타에선 제4식 삼연격의 흔적을 느꼈습니다.”

케이안이 루안을 보며 물었다.

“설마 도련님께선 가문의 검술을 토대로 권법을 만든 것입니까?”

그러자 루안은 짓궂게 웃더니 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렇다고 말했잖아.”

“…….”

케이안이 침음을 삼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검술과 권법의 차이는 적지 않다. 깊게 파고들수록 그 간격은 점차 벌어지고.

애초에 날붙이와 주먹은 전투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정말로 배드니커의 검술을 토대로 권법을 만든 것이라면…….’

앞서 루안이 주장한 것처럼, 그것은 단순히 무술의 창안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것은 이미 그려진 미술품, 그것도 완성품 위에 새로운 그림을 덧씌우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분위기 또한 유지해야 한다. 원래 장점을 퇴색시키면 의미가 없으니.

케이안은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작업인지.

‘검술의 창안자보다 최소 몇 수는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

만약 루안 배드니커가 정말로 가전 검술을 권법으로 승화시킨 것이라면…….

배드니커 가문은 깨달아야 한다.

장남 히이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재가, 또 한 명 있다는 것을.

* * *

검을 거두고 물러선 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징수인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

쓰러져 있던 케이안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선 흐트러진 옷매무새부터 점검했다. 케이안은 삐져나온 머리카락까지 완벽히 정리한 다음에야, 복잡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백일식.”

이윽고 나직한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연다.

“그게 도련님이 만든 무술의 이름입니까?”

“맞아.”

“훌륭하군요.”

솔직히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만든 건 아니라 약간 켕겼다.

나는 찝찝함을 없애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경의 움직임도 훌륭했어. 걸음걸이가 특이하던데 어떤 기술이지?”

“…….”

이상하게 이 말에 케이안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보았다.

“말 못 하는 거면 어쩔 수 없고.”

“그런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던 케이안이 곧 고개를 젓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혹시 제게 백일식을 이어서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마지막 시험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련님께선 이미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셨습니다.”

“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모습이 어이없어서 살짝 짓궂은 질문을 했다.

“그거 내가 둘째 형보다 뛰어나다는 뜻이 맞아?”

“제 안목이 틀린 게 아니라면.”

케이안이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말했다.

“루안 도련님의 비교 대상은 헥토르 도련님 정도가 아니겠지요.”

“…….”

케이안이 칭찬에 인색한 사내란 건 이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다 안다.

그러니 이 정도면 내게 극찬을 해준 거나 다를 바가 없다.

“방금 드린 말씀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요구였습니다. 잊어 주십시오.”

내가 곧장 대답하지 않으니 케이안이 먼저 말했다.

말은 덤덤하게 했으나 표정과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엿보인다.

징수인으로서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어떻게든 백일식의 뒤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백일식을 보여 주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군.’

말했다시피 징수인의 임무는 다양하다.

이들의 임무 중에선 ‘검사’와 ‘채점’도 있다.

배드니커의 혈통이 익힌 무술을 직접 보고, 그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노인은 가장 오래된 징수인이며, 여태껏 채점한 무술도 가장 많다.

그 정도의 인물이 백일식의 단편을 맛본 것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여 줄 수는 없고.’

징수인 케이안.

충분히 얻을 게 많은 상대다.

나는 가만히 이 사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일식은 아직 완성된 권법이 아니라서 다 보여 주기엔 좀 그래.”

“그렇습니까.”

미완성의 무공엔 당연히 허점이 많다.

타인 앞에서 생각 없이 시연했다간 완성하기도 전에 약점이나 파훼법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딱히 이 말까지 하지 않아도 케이안은 속뜻을 제대로 이해한 듯하다.

침울한 기색으로 침묵하는 걸 보니.

그럼 여기서 떡밥을 던져 볼까.

“물론 케이안 경이 믿을 만한 인물이란 건 알아. 그래서 제안이 있는데…….”

나는 긴장한 얼굴의 케이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백일식의 형形 몇 개를 보여 주지. 대신 경은 방금 전 보였던 걸음걸이를 내게 가르쳐 줄 수 있어?”

“걸음걸이라 하심은?”

“그 왜 방금 보여 줬던 거. 보폭에 변화를 줘서 실제 속도랑 착각이 들게끔 하는 기술 말이야.”

“…….”

이 말을 꺼낸 순간 케이안의 표정이 큰 폭으로 바뀌었다.

말실수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오묘한 표정이었는데,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케이안을 보며 말했다.

“혹시 나도 무례를 저지른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케이안이 두 눈을 감았다.

어쩐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양이었는데, 의외로 입은 금방 열렸다.

“34년 전.”

“응?”

“제가 일개 자유 기사였던 시절. 저는 델락 님- 그러니까 지금의 가주님을 만났습니다.”

“…….”

“크룬벨 전투가 끝난 이후였지요. 실질적으로 제국의 패배였고, 사흘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역겨운 창세암흑교단의 추종자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더군요. 죽음을 각오한 채 검을 빼들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요? 의식이 흐릿해지고 육체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됐을 때 가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케이안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내일 줄 몰랐다.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조용히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자니, 왠지 당시의 풍경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식간에 암흑교단을 도륙 내고, 저를 구하고. 그러고 가주님께서 꺼낸 첫마디가.”

케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걸음걸이가 특이하던데 어떤 기술인가?”

나는 눈가를 모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과거의 철혈공은 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입에 담았다.

이 경우엔 내가 철혈공의 말을 따라 한 셈이 되나?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나한테도 가르쳐 줄 수 있겠나.”

“…….”

“오늘 도련님을 마주하니 먼지 쌓여 있던 옛적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니까…….”

잠깐 할 말을 찾던 케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요. 왠지 모르게 그때 얘기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케이안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듯했다.

나도 잠깐 입을 닫았다.

방금 목격한 케이안의 미소는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의 미소였다.

나이를 감안하면 어색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나는 케이안이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단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가장 내 기분을 미묘하게 만드는 건, 만약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평생 이 사실을 몰랐을 거란 점이었다.

내 기억 속 케이안은 끝까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징수인으로 남았겠지.

“방금 보여 드린 걸음걸이엔 거창한 이름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암보暗步라고 부르고 있지요.”

“암보.”

“알려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도련님에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야?”

“올바르게 습득하기에 대단히 까다로운 기술이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케이안이 이어서 말했다.

“보셨다시피 실용적인 기술이라 몇몇 징수인들은 물론- 다른 도련님들 또한 이 기술의 공유를 부탁했습니다. 딱히 감출 것도 아니라서 가르쳐 줬습니다만……”

“제대로 익힌 이가 없었다?”

“제가 알기로 올바르게 익힌 건 가주님뿐입니다.”

“흐음…….”

확실히 어려운 기술 같아 보이기는 했는데 그 정도일까?

눈으로만 봐선 잘 모르겠다.

내 의중을 짐작했는지 케이안이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시연이라도 하듯 방금 전의 걸음걸이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걸음걸이보다 중요한 건 어깨의 움직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상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까보다 훨씬 느렸고, 측면으로 보여 줬기에 처음 봤을 때보다 직관적이었다.

나는 뚫어져라 그 걸음걸이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대충 알겠군. 상체와 하체의 움직임을 차별화시켜서, 상대의 인지에 혼란을 주는 게 핵심이구나.”

“그렇습니다. 상체의 움직임은 완만하게, 그러면서도 보폭은 느릿하지만 크게. 이론적으로는 이게 전부입니다만…….”

“나머지는 센스의 문제란 거군. 좋아.”

나는 케이안을 곁눈질하며 그 움직임을 따라 해 봤다.

“…이렇게, 인가?”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네 발자국은 내딛지 못했다.

“오, 오, 오오-!?”

나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 카펫에 얼굴부터 처박았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꼴이라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당장 쓰기는 어렵겠는데? 허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흉내도 못 내겠어. 방금 내 암보 어땠어?”

“…….”

케이안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물었다.

“언제부터입니까?”

“응?”

“도련님은 언제부터 가문을 속이셨던 겁니까?”

뭘 속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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