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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6화 (6/172)

6화

“설마 가호식에도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습니까?”

잠깐 뭔 소린가 싶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 설마 여태껏 내가 재능을 숨긴 채로 지냈다 착각하고 있는 건가?

황당했으나 가만 보니 아예 엉뚱한 생각은 아니다.

내가 변방으로 추방당한 게 올해다.

아직 그때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인데,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지만…….

사실 1년 만에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건 힘들다.

케이안은 경험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애초부터 내가 재능을 숨기고 있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울 거다.

결론 나왔다.

내게 나쁠 게 없는, 딱히 풀 필요는 없는 오해다.

“알아서 생각해.”

“예.”

케이안이 별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을 보니 새삼스레 지금 상황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힘줄을 끊으려던 서슬 퍼런 얼굴이 아직 훤한데.

“도련님, 보고서 말입니다만…….”

보고.

징수인을 보내고 말고는 앞서 말한 것처럼 가문의 윗대가리, 즉 원로회란 놈들이 결정한다.

오늘 케이안을 돌려보낸다고 해도, 그놈들이 납득하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징수인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뜻인데.

“제가 오늘 겪은 일은, 있는 그대로 적어 올릴 생각입니다.”

그렇겠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케이안은, 다시금 공적인 얼굴로 그리 말했다.

딱히 실망스럽진 않았으나 아쉽기는 하다.

원로회란 놈들의 성향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나 그놈들이 루안 배드니커란 존재를 대단찮게 여기고 있단 사실은 분명하다.

과연 순순히 납득할까?

철혈의 징수인 케이안이, 루안 배드니커를 상대로 아무것도 징수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퍽이나.’

십중팔구 다른 징수인을 보내서 상황을 보다 확실히 파악하려고 들 거다.

즉 나로서는 케이안이 오늘 일을 어느 정도 숨긴 채 보고서를 올려 줬으면 한다.

물론 그럴 확률은 거의 없지만.

나는 이 말을 꺼내기 직전 케이안이 보인 간격을 생각했다.

한번 찔러볼까.

“경의 사견이 궁금한데? 보고를 올리면 원로회에선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말씀드렸듯, 원로회의 입장은 저 같은 일개 징수인은-.”

“그래서 사견이라고 말했잖아.”

잠깐 고민하던 케이안이 입을 열었다.

“맹신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말 같지 않은 말이라도 누가 꺼내느냐에 따라 신빙성이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살짝 기대 섞인 시선으로 케이안을 보고 있는 거고.

“철혈의 징수인 케이안의 보고인데도 의심할까?”

케이안은 내 헛소리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허명은 전혀 보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 의혹을 갖게 된 원로회는…….”

“의혹을 없애려고 하겠지요.”

“다른 징수인을 보낸다는 뜻이지?”

“예.”

“누가 올 것 같나?”

“최소한, 저보다 약한 자를 보내지는 않겠지요.”

‘이런 시발.’

절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애송이 상대로 너무 인력 낭비잖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간의 평가는 그렇지만, 도련님은 가주님의 직계혈족이십니다. 가문에서 가장 중히 다뤄야 할 안건이란 뜻이지요.”

“…….”

맞는 말이기는 하다.

생각해 보니 애초에 첫 징수인으로 보낸 것도 케이안이었다.

정말로 나를 별것 아닌 놈으로 취급했다면 더 낮은 서열의 징수인을 보냈겠지.

‘머리야…….’

다음에 올 징수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케이안처럼 말이 통하는 놈일까.

그때 물끄러미 나를 보던 케이안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뭐? 그럼 백일식은?”

“임무가 남았습니다. 날이 밝기 전 끝마쳐야 할 안건인데 지금 곧바로 출발해야 늦지 않을 듯하군요.”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있으나, 무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개인적인 탐구심보다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겠다는 태도.

그야말로 징수인의 귀감이라고 불릴 만하다.

‘나는 암보에 대한 단서를 잡았는데.’

대충 감은 잡았으니 앞으로 혼자 수행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거다.

어쩐지 이쪽만 단물을 빨아먹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안 좋은 건 아니고, 묘하다고.

“혹 제가 추후 다시 한번 찾아봬도 될는지요?”

“징수만 아니라면야 언제든지.”

“감사합니다.”

“근데 그럴 시간은 있나? 경은 항상 바빠 보이던데.”

“글쎄요…….”

대답을 흐린 케이안이 나를 보며 말했다.

“도련님,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가 쓸데없는 참견을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징수인의 성격은 각양각색입니다.”

케이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 명의 징수인이 있다면 백 개의 징수 방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 중에선 굳이 징수대상자와 말을 섞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드물지만 대상자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은 채 일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지요.”

별것 아닌 말처럼 들리지만 징수하는 게 목숨이라면 섬찟하다.

대상자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죽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백일식을 완성시켜야 할 것입니다.”

“…….”

“추후 어떤 징수인이 오든, 그들을 확실히 물러나게 만들 방법은 그뿐입니다.”

“가슴에 새기지.”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닌지 우려가 생기는군요.”

“그럴 리가. 오히려 고마운걸.”

사실 조언보다는 케이안의 호의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전생에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인재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어쩐지 간지럽기도 하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날도 어두우니 언덕길 조심하라고. 슬슬 눈이 침침할 나이잖아.”

“배려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 뵐 때까지 평안하시기를.”

나름 농담을 던져도 무반응만 돌아오니 섭섭하다.

케이안은 기품 있는 태도로 방을 떠났다.

징수인으로서 나타난 존재는 잠깐 무인의 모습을 비췄다가, 다시 한번 징수인으로서 사라졌다.

대단한 존재감의 노인네긴 하다.

시야에서 사라진 것만으로 공기가 확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드니.

“…….”

하지만 나는 케이안이 떠난 이후에도 긴장을 풀지 않고 한동안 방문을 노려봤다.

10초, 30초, 1분.

그렇게 몇 분 정도 더 흘렀을까.

“…갔어?”

작은 중얼거림에도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갔구나.”

나는 비로소 철혈의 징수인이 완전히 떠났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제야 뭉쳐 있던 긴장이 한숨이란 형태로 흘러나왔다.

나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침대 위에 쓰러졌다.

“…어떻게, 잘 넘기긴 했구만.”

그 경황없던 도중에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냈다.

그 사실에 만족보단 안심부터 들었고, 안심이 드니 자연스레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때의 나는 자다 깬 상태였다.

‘좀 더 잘까…….’

산재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우선은 잠부터 보충해야겠다.

나는 곧 어색한 침대의 감촉 속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 *

케이안은 저택을 나선 채 언덕길을 내려갔다.

- 날도 어두우니 언덕길 조심하라고. 슬슬 눈이 침침할 나이잖아.

픽 웃음이 나왔다.

늙은이 취급당한 게 얼마 만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선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케이안의 다음 징수 대상자가 있는 장소기도 하다.

그러나 도시 성벽을 마주하기도 전에 케이안의 발걸음은 멈췄다.

“…….”

케이안의 시선이 향한 곳은 캄캄한 어둠이 도사리는 숲이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갇힌 밤, 어두운 언덕길 너머의 숲은 괴물의 목구멍을 엿보듯 캄캄했다.

“……!”

무뚝뚝한 얼굴로 어둠을 보던 케이안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의 빛이 스쳤다.

멈칫멈칫하며, 천천히 입을 연다.

“…가주님?”

“…….”

어둠 속의 인물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케이안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이곳엔 어쩐 일로……?”

“임무지.”

철혈공이 수행하는 임무라면-.

‘황실의 특명.’

케이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도저히 파고들 화젯거리가 아니다.

케이안이 괜한 질문을 한 건 후회하고 있는데,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는?”

“…징수입니다.”

“그랬군. 잘 마무리했는가.”

케이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징수를 보류했습니다. 다음 징수를 마치는 대로 원로회에게 정식으로 보고서를 올릴 예정이고 말입니다.”

“자네가 징수를 보류했다고? 개인적 판단으로 말인가?”

“그렇습니다.”

“…….”

잠깐의 침묵 후 다시금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로회에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 나한테 말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존의 보고 체계를 무시하는 발언이었으나 다름 아닌 가주, 철혈공의 말이다.

배드니커에선 철혈공의 말이 곧 법이고, 철칙이다.

고개를 숙인 케이안이 말했다.

“이번 징수는 가주님의 혈족인 루안 도련님에 대한 건이었습니다.”

“루안.”

“예. 가주님의 막내아들 말입니다.”

“…….”

“원로회에선 루안 도련님이 배운 가문의 검술을 회수하라 명했습니다. 오른팔의 힘줄을 자르는 정도면 적당한 처사라 판단한 듯한데-.”

“본론만.”

케이안이 말했다.

“루안 도련님께서 독자적인 무술을 창안하셨습니다.”

“…….”

“그 완성도가 상당했기에 판단을 보류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별 탈 없이 완성한다면, 가주님의 큰 기쁨이 될 겁니다.”

철혈공이 입을 닫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흐릿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건 의외로군.”

“예.”

“더 할 말은 없나.”

“음. 사실 이것은 본가에 복귀한 이후에 드리려고 했던 말씀인데…….”

“말하게.”

“제 은퇴를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때마침 스산한 바람이 불며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아까보다 훨씬 긴 침묵 이후 철혈공이 말했다.

“가문의 원로들이 또 자네에게 헛소리를 늘어놓았나?”

“아닙니다.”

“그럼 왜. 앞으로 30년은 더 거뜬하다고 말한 건 자네였잖나.”

가주의 말에 케이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늘그막에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을 뿐입니다.”

“음.”

짧은 침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존중하겠네, 오랜 친우여. 원로회엔 내가 말해 두지.”

“감사합니다.”

“오래 잡았군. 이만 가보게.”

“예.”

케이안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파비조를 향했다.

언덕길 밑으로 그 신형이 완전히 사라진 후.

스으으…….

구름이 걷히며, 풀숲에 있던 철혈공의 모습이 드러났다.

철혈공의 붉은 시선이 언덕 위 저택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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