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는 송곳니기사단을 전체적으로 보았다.
생각보다 수가 많지는 않다.
“경들이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까놓고 말하면 다섯 명이다.
그래도 가주의 직계혈족인데 좀 너무한 대우가 아닌가 싶다가도, 오히려 우르르 몰려오는 것보단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예상 밖의 상황이다.
본가의 기사가 나를 찾아온 건 전생에는 없던 일인데, 이 말은 나의 바뀐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케이안이 벌써 본가에 보고를 올린 건가?’
이제 고작 1주일이 지났다.
저택과 본가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마법이 적용된 통신수단을 사용한 거라면 얼추 말이 된다.
“본가에서 나를 왜 찾아.”
“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명? 무슨 명.”
“예. 지금부터 가주님의 말씀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앞에 선 놈, 그러니까 오셀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루안 배드니커는 당월이 지나기 전까지 본가를 방문하여 [2차 가호식]에 참여하도록.”
“…….”
“…….”
“끝이야?”
“예.”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2차 가호식에 참여하라고?”
“그것이 가주님의 명입니다.”
“내가 왜.”
오셀이 내 말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송구하오나 저희는 그저 명령만 하달받은 입장이라, 가주님의 속뜻까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사실 전생의 나였다면 이 자리에서 환호성을 내질렀을 거다.
2차 가호식에 참여하라는 철혈공의 명은, 해석하기에 따라 아버지가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라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내 머릿속에 그딴 꽃밭은 피어 있지도 않다.
‘어쩐지 구린내가 나는데.’
케이안의 보고가 원로회를 걸쳐 철혈공의 귀에까지 들어간 건가?
“잠깐. 방금 언제까지랬어?”
“당월이 지나기 전입니다.”
“오늘이 몇 일이더라.”
“12월 17일입니다.”
“2주도 안 남았잖아.”
제국 변방에 세워진 이 저택에서 본가까지- 마차를 타고 달려도 2주란 기간은 빠듯하다.
나는 멀뚱히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 녀석들이 나를 골리려고 헛소리를 지껄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맥을 통하면 늦지 않을 겁니다.”
“산맥?”
“[보석 산맥] 말입니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오는 길에 답사도 겸해 보석 산맥을 통했는데 약 1주일 정도 걸리더군요.”
그제야 나는 이들이 소규모인 이유를 알았다. 애초에 나를 데리고 산맥을 넘을 생각으로 온 것이다.
평지가 아닌 산행이라면 인원이 많아 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니.
‘…가주의 명령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한데.’
배드니커 가문에서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가주의 한마디가 곧 법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
언뜻 선택지를 주는 듯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 거절하면 이번엔 징수인이 무더기로 날 찾아올 거다.
힘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목숨을 끊기 위해서 말이다.
솔직히 억지로 끌려가는 기분이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실 나로서도 본가로 가는 게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배드니커의 본가엔 원로회가 있고, 가주도 있다.
그들에게 직접 백일식을 보이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담판을 짓는다면 당분간 가문의 집적거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
물론 본가에 있는 형제란 것들이 시비를 걸겠지만 큰 상관은 없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도를 넘으면 짓밟으면 된다.
대충 판단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가자고. 어서.”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일찍 출발하시지요.”
아직 해가 중천이긴 하지만…….
그 보석 산맥인지 뭔지 하는 곳에 다다를 때쯤이면 해가 저물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럼 객실이 있으니 오늘은 저택에서-.”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미 근처 도시에 숙소를 잡아 뒀습니다.”
그렇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셀을 보았다.
어쩐지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낯짝을 보자니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셀이랬나?”
“예.”
“말 좀 그만 끊어라.”
처음인 데다 애초에 내 밑 사람도 아니라 가볍게 주의를 줬다.
오셀은 입가의 미소를 여전히 유지한 채 고개만 살짝 숙였다.
“유념하지요.”
* * *
기사들이 떠난 뒤엔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챙겨야 할 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대 1주일 이상은 산을 타야 하니 이 꼴로 갈 수는 없다.
우선은 사용인을 시켜서 움직이기 쉬운 활동복과 가방, 그리고 침낭을 준비시켰다.
사용인들은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대놓고 묻는 놈은 없었다.
아직도 나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귀찮은 설명이나 변명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먹을 건 어떡한다.”
당연하지만 배낭에 1주일 치의 식량을 모두 넣을 수는 없다. 어떻게 집어넣을 수는 있다고 해도 상할 게 분명하고.
물론 기사들이 설마 나를 굶길 것 같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어쨌든 산맥을 향하는 거니, 정 안 되면 직접 발로 뛰며 식재료를 구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조리도구, 조미료쯤은 가방에 들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빵빵하게 차오른 배낭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저택 창고에나 가볼까.”
전생에서 저택을 나설 때 창고를 한번 털었는데, 그때 유용하게 썼던 아티팩트들이 있다.
확장마법이 걸린 가방.
여러 의미로 나침반보다는 유용한 손목시계.
언뜻 반지로 보이지만, 형태와 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검까지.
당장 이번 본가행에 쓸 만한 건 이 정도일까?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가방에 짐을 하나둘씩 쑤셔 넣었다.
대단한 마도구는 아니라 짐을 왕창 넣을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부피의 3~4배 정도? 게다가 줄여 주는 건 부피뿐이라 무게는 그대로다.
나는 짐을 죄다 넣고 가방을 메 봤다.
좀 무겁기는 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이걸 메고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괜찮은 수련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산 생각나네.”
영산을 정복해야 끝나는 수련이 있었다. 집채만 한 철근을 질질 끌며 말이다.
딱히 시간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요괴 놈들이 많이 도사리는 곳이라 열 번은 죽을 뻔했다.
결국 정상을 정복하고 나니 스승님이 큼지막한 복숭아를 던져 줬는데, 그게 참 맛있었다.
고된 일을 끝낸 직후라 맛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맛있었다. 아마 내가 살면서 먹은 과일 중 제일 맛있었을 거다.
나중에 대사형에게 들었는데 그 복숭아, 대단한 영약이라는 듯하다.
“영약이라…….”
다시 한번 영약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보통 내공을 쌓는 방식은 운공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다.
이에 비하면 타인의 내공을 물려받거나, 강제로 뺏거나, 혹은 영약을 섭취하는 방식은 모두 크고 작은 리스크가 있다.
지금의 나는 아니다.
영약을 먹는다고 제대로 소화를 못 하거나, 부작용에 시달릴 일은 없다.
이미 한번 걸었던 길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어떻게든 내공을 확보한 다음 외공에 집중하거나 습득한 무공을 발전, 개량… 혹은 실전 경험을 쌓는 게 맞다.
“아니, 잠깐만.”
영약이라는 단어가 보석 산맥과 합쳐지더니, 수면 아래 묻혀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극염초였나?”
문자 그대로 극양極陽의 기운을 품은 풀인데, 단 한 번이라도 사람의 눈에 노출이 되면 그 시점에서 성장이 멈춘다고 한다.
즉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깊은 자연일수록 양질의 극염초가 자라기 쉽다는 뜻인데…….
“보석 산맥.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제국 최대 크기의 극염초가 그곳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애매하게 표현한 이유는, 막상 극염초를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없기 때문.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보석 산맥의 극염초가 유명해진 것은 어떤 미친 범죄자 때문이다.
화마火魔.
지금부터 몇 년 뒤, 제국 전역에 겁화를 퍼뜨리게 될 방화범이다.
고작 1년 사이에 열댓 개의 마을을 불태운 미친놈인데, 이에 휘말린 피해자만 1만 명에 가깝다.
아무튼 이놈은 최후에 대도시에서 방화를 계획하다가 기사단에게 제압당했는데, 그간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 드러난 사실은.
겉보기엔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었고.
원래는 적탑赤塔 소속의 마법사였으며.
주변 인물의 증언에 따르면 딱히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피해 규모가 규모인 만큼 심문은 철저히 이뤄졌고, 마침내 평범했던 마법사가 화마가 된 이유가 밝혀졌다.
극염초가 원인이었다.
아무튼 약과 독은 한 끗 차이다.
약이 과하면 언제든 독이 되고, 독도 잘 다루면 얼마든지 약이 될 수 있다.
극염초를 먹은 마법사는 그 영약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고 화마火魔가 된 것이다.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기억은 아니네.”
물론 극염초는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영약이다.
나라면 멀쩡한 마법사를 미치게 만든 극염초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지.
근데 뭐 어쩌라고.
극염초가 보석 산맥에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애초에 범위가 너무 넓다.
산 하나만 해도 찾는 데에 몇 주는 걸릴 텐데 산맥 전체가 그 범위라고?
천운이 닿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아무튼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짐 정리도 얼추 마무리한 시점이었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들어와.”
“예.”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실례합니다, 도련님.”
“…….”
붉은 머리카락에 정장.
보기만 해도 허리가 아픈 똑바른 자세와 벽돌 같은 표정.
앞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과 달리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다.
어디 알기만 할까.
과거의 내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던 여자이자 공포의 대상.
집사 아르잔.
회귀 직후 내 몸뚱이를 두들겨 팼던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