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9화 (9/172)

9화

전생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인 철혈공이다.

물론 나는 아버지란 양반과 몇 마디 대화도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대면한 적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럼에도 배드니커라는 성姓을 소유했고, 그 가문의 녹을 먹으며 살았던 자로서…….

철혈공이 가진 영향력은 보이지 않는 압박이 돼서 나를 옭아맸다.

즉 철혈공의 공포는 내게 있어 딱히 증명되지 않은, 불확실한 종류의 공포였다.

반면 눈앞에 있는 아르잔은 내게 이미 검증된 공포다.

전생에서, 나는 아르잔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떨릴 지경이라 있는 힘껏 피해 다녔다.

물론 그때의 폭력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건 아르잔 특유의 서늘한 눈빛이었다.

‘애는 기억 속이랑 똑같네.’

기계처럼 날 묵묵히 때려 팼던 때도 저 얼굴이었다.

말도 안 통하고, 잘못했다 사과해도 주먹만 휘두르니 미성숙한 시절의 내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사실 그래서 궁금했다.

내가 아르잔을 실제로 보면 어떤 심정이 될지 말이다.

영혼과 육체란 떼 놓을 수 없는 개념이고, 몸뚱이에 각인된 공포란 의외로 질기니까.

뜻하지 않게 그 궁금증을 풀 기회가 온 셈이었는데.

“안녕.”

예상대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야 아르잔보다 백 배는 무서운 사람한테, 10년 동안, 천 배는 더 두들겨 맞았으니까.

이 순간 딱히 중요하지 않은 사실도 하나 깨달았다.

앞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으로 굴복할 일은 없을 것이란 사실이다.

“예,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아르잔의 허리가 직각으로 기울었다.

“자숙의 시간을 최소 1주는 더 가지려고 했습니다만, 사용인에게 흘려들을 수 없는 보고를 들어서요.”

“흘려들을 수 없는 보고?”

“송곳니기사단이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련님을 데리고 본가로 간다고.”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해했다.

바로 방금 있었던 일인데 벌써 아르잔의 귀에까지 들어간 게 신기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몰래 엿들었을 리는 없고…….’

이 저택에, 아르잔의 눈과 귀가 돼 주는 녀석들이 있다는 뜻인데.

물론 아르잔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용인들이 냅다 일러바쳤을 가능성도 있지만.

만약 전자라면 아르잔은 생각보다 음험한 녀석일 수도 있다.

“…도련님의 본가행은 물론 기쁜 일이나, 그 과정에서 보석 산맥을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기사들이 그렇다더라.”

그러자 아르잔이 입을 닫았다.

어쩐지 한숨을 내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을 앞에 둔 얼굴이기도 했다.

“도련님은 보석 산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습니까?”

“제국의 가장 큰 산맥이잖아.”

“그 이외는요.”

“이름이 좀 특이하다? 광산이라도 있나 봐.”

전생에 용병으로 굴러먹기는 했지만, 나는 제국의 지리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른다.

애초에 활동 구역부터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배드니커라는 이름을 듣는 것 자체가 압박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위명이 들리지 않는 제국의 외지 근처에서 활동했다.

“제국 4대 금지 중 한 곳입니다. 혹 금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닥치고 있어 봤다.

예상대로 아르잔이 설명을 이어 갔다.

“제국령임에도, 제국이 정복하지 못한 땅입니다.”

“…….”

“위험지대에 제국이 몇 번이고 토벌대를 보냈으나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요. 결국 무리하게 정복하는 것보다 방치하는 게 실리적이라 판단했기에 출입을 금지禁止했고, 금지禁地가 됐습니다.”

“하핫.”

“…….”

“…….”

농담인가 싶어 웃어 줬는데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아 웃음기를 지웠다.

“하지만 기사들은 산맥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딱히 위험하다는 뉘앙스도 아니었고.”

“딱 한 번이었지 않습니까.”

아르잔이 검지를 쭉 펴며 말했다.

“1이라는 숫자는 통계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얘기를 듣다 보니, 보석 산맥이라는 곳이 내 예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르잔이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그래도 가야 해.”

“그렇게까지 본가로 돌아가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건 가주님 명령이라고.”

그러자 아르잔의 차분한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번졌다.

“집사는 본가에서 일했으니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이번 건 거절할 수 있는 종류가 아냐.”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의외로 쉽게 납득하는구나.

어쩌면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르잔이 아니라 과거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아르잔은 나를 보며 다소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직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송곳니기사단이 다시 저택을 찾았다.

이놈들은 저택 앞에 서 있는 나를 본 다음, 아르잔을 보더니 물었다.

“저분은?”

“집사 아르잔이야. 우리 저택의 자랑이지. 여차저차 해서 이번에 동행하게 됐다.”

“음…….”

기사 다섯 중 두 명 정도가 멍하니 아르잔을 보았다.

직업상 귀족 영애 정도는 자주 봤을 텐데, 그런 놈들이 보기에도 인상적인 외모인가 보다.

그러나 오셀만큼은 눈가를 좁혔다.

“일개 집사가 함께할 만큼 만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만…….”

“…….”

이 순간 나는 무심코 든 위화감에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그 느끼한 낯짝을 바라보는데, 이 녀석은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 말없이 시선을 교환할 때쯤 아르잔이 말했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

나는 아르잔의 말을 끊었다.

“그럼 산맥을 가는데 시종 한 명도 없이 가라고?”

그리고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말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물론 경들 중 한 명이 전속으로 내 수발을 들어 준다면야 생각해 보지.”

재수 없게 웃으며 덧붙이니 기사 놈들의 표정이 굳었다. 몇몇 녀석은 딱하다는 시선으로 아르잔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저희가 지킬 수 있는 건 도련님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길.”

“당연한 소리를. 일개 집사와 철혈공의 아들인 나. 누굴 우선해야 하는지는 뻔하잖아.”

이 말은 아마 아르잔의 표정까지 굳게 만들었을 테지만.

나는 아르잔의 눈치를 보는 대신 오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그러자 이 녀석은 저번처럼 입꼬리만 슬쩍 올리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출발하실까요?”

* * *

“보석 산맥은 제국 수도를 기준으로 동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균 해발은 3,000m로 대륙 최고봉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만, 이곳이 위험한 이유는 높이와 큰 상관이 없습니다.”

“…….”

“보석 산맥에 서식하는 몬스터 때문입니다. 도련님, 일어나십시오.”

“…안 잤어.‘

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잠깐 나를 보던 아르잔이 다시 설명을 이어 갔고, 나는 대충 듣는 척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평온하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이동하는 데만 쓰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출발한 당일.

우리는 저택을 나선 직후 곧바로 가까운 마을에 들렀다.

거기서 보석 산맥으로 향하는 마차를 구한 다음 몸을 실었고, 첫째 날은 노숙을 하며 보냈다.

물론 경비는 모두 오셀이 냈다.

날이 밝은 직후엔 다시 이동을 시작했고……. 오셀의 말대로라면 오늘 오후쯤 산맥에 도착할 것이다.

“의외로 금방이네. 산맥이 우리 저택이랑 가까웠나?”

“정확히는 보석 산맥이 대단히 크기 때문입니다. 제국 수도를 기준으로 동남이라면 어떻게 가도 이 산맥을 반드시 접하게 되지요.”

“음.”

“보석 산맥에선 매 탐사마다 새로운 동식물이 발견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몇몇 학자들이 그곳을 이름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기도 하지요. 이는 산맥의 환경 탓에 돌연변이가 출현하는 확률이 대단히 높기 때문인데, 일반적으로 초입부에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또다시 잠들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집사.”

“예.”

“자질구레한 설명은 됐으니 핵심만 말하지.”

“핵심 말입니까?”

지금 말하고 있잖습니까? 아르잔이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진지한 얼굴로 지껄인 몇백 마디 말이 전부 핵심이었나 보다.

“애초에 이름이 왜 보석 산맥이야? 광산이라도 있나?”

아마 출발하기 전에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도 대답은 듣지 못했다.

“…….”

아르잔이 두 눈을 깜박였다.

설마 그런 간단한 걸 물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초연하고 감정 변화가 적은 녀석이다 보니, 금방 침착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산맥에서 절대 마주하면 안 될 몬스터가 있습니다.”

“몬스터?”

“예. 돌연변이 중에서도 특히나 위험한 개체이지요.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여럿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부릅니다.”

아르잔이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보석수寶石獸라고요.”

“…그런 위험한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가는 게 맞는 건가?”

“그러니 제가 동행하는 것입니다. 도련님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서.”

아르잔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산맥에서 보석수와 마주칠 확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칠 확률과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오셀 경에게 들으니, 우리는 산맥 초입부에서 더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니 확률은 더더욱 떨어지겠지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

나는 창문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낮은 확률은 아닌데.”

때마침 마차가 언덕을 넘어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산맥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저택을 나서고 이틀.

우리는 보석 산맥에 진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