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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0화 (10/172)

10화

“십 년 처박혀서 수련만 하는 것보다 일 년 개처럼 구르는 쪽이 낫다.”

위는 나의 스승이자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말버릇 중 하나다.

조금 식상한 표현으로는 ‘고난 없이 성장도 없다.’라는 관용구가 있겠는데…….

물론 스승님은 고난을 단순히 인생의 장애물이 아닌, ‘동기로 삼을 수 있는 사건’으로 여기라 말씀하셨다.

“뭔 뜻이래요.”

“무릇 가르침이란 말하는 이보다 듣는 이의 태도가 중요한 법.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조언이라도 듣는 놈이 한 귀로 흘리면 무슨 소용이냐.”

“또 얘기가 새십니다…….”

평소라면 내 머리를 후려쳤을 스승님은, 그날은 왠지 모르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뭐든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재능은 부차적인 것이지.”

“…….”

“뚜렷한 목표. 흔들림 없는 마음가짐. 이것은 원한다고, 바란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자가 반드시 복수귀가 되는 건 아니고, 실패와 절망이 꼭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나 또한 이곳에 머물며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았으나 사람의 운명이란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더구나.”

스승님의 말은 애매모호하면서도 묘하게 납득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그 증인이라서 그렇다.

“나는 가끔 약자가 부럽다. 고난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까.”

“…….”

“그러니 막내야, 서두르지 말고 약할 때 많이 즐겨라.”

스승님은 거기서 얘기를 끝내고 싶어 했지만, 나는 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방금 스승님의 발언엔 경험이 묻어나 있었다.

직접 겪고, 깨닫지 않았다면 해줄 수 없는 종류의 조언.

그렇다면 스승님에게도 고난이 있었을까?

내가 물으니 스승님이 웃으며 옛이야기를 해주셨다.

놀라웠다.

나의 스승인 천하제일인 백노광.

그의 시작점은 노예였다.

* * *

보석 산맥.

제국의 4대 금지.

그 위험천만한 장소에 발을 들이며, 아르잔 윈터는 새삼스런 의문이 생겼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주인님의 명 때문인가?’

아마 가장 타당성 높은 이유일 거다.

저택의 주인- 루시아 배드니커가 직접 말했으니까. 루안 배드니커를 잘 부탁한다고.

그녀는 존경받아야 마땅한 인물이었다.

물론 대외적인 이미지는 좋지 않다.

철혈공의 여러 부인 중 한 명이지만, 배드니커에서의 영향력은 없는 수준이고…….

멸망한 왕국의 핏줄이기는 하지만, 현시점에선 변방의 몰락 귀족 취급을 받는다.

다른 부인과 달리 외가의 지원은 털끝만큼도 못 받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배드니커에서 영향력을 떨치기 위해선 핏줄의 활약이 최우선인데.

루시아의 하나뿐인 자식은 무재능의 표본이 돼서 배드니커는 물론, [위대한 가문] 전체에게 조롱받았다.

제국의 양익兩翼이라고 불리는 배드니커.

현 위대한 가문 중에서도 가장 명망 높은 가문.

아르잔은 루시아가 받았을 조롱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루시아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녀만큼 낡은 옷을 입어도 행동거지에선 여전히 품위가 묻어났고, 빵과 스프로 끼니를 해결할 때도 기품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아르잔은 그 사실에 동경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처지인데도 포기하지 않았던 루시아에게 말이다.

그리고 루시아의 하나뿐인 자식에게 어느 정도 흥미와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직접 마주한 순간, 그러한 기대는 산산이 깨졌지만.

“자, 잠깐…….”

아르잔은 발걸음을 멈췄다.

좀 더 앞에서 걷던 기사도 마찬가지, ‘또야?’ 하는 얼굴로 뒤를 보았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은 루안 배드니커가 있었다.

“조금만, 쉬자, 허억…….”

“알겠습니다.”

오셀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허락을 내린 순간, 루안은 흙바닥 위에 엎어졌다.

“후웁, 후욱……!”

그래도 배드니커의 핏줄인데, 어째서일까?

이 소년에게선 제 아비의 위엄도, 제 어미의 품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닮은 건 생김새 정도다.

그 곱상한 외모도 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상태에선 딱히 빛나 보이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오늘내일하는 노인처럼 헐떡이는 루안을 보며 한두 마디씩 내뱉었다.

“생각보다 너무 느린데.”

“이대로라면 기한에 못 맞출 수도 있겠어.”

“기가 찰 노릇이군. 저게 정말로 가주님의…….”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낮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아르잔은 루안을 보았지만, 듣지 못한 건지 표정에 딱히 변화가 없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조금만 더 쉬면, 괜찮아질 거야.”

허세 섞인 말 같지만 사실이다.

이상하게 곧 죽을 것처럼 헐떡대다가도 금방 회복한 뒤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민폐를 끼치기 싫은 걸까.

아니면 자존심의 문제인 걸까.

답은 루안만이 알겠지만…….

아르잔은 일단 루안이 대견했다.

이 망나니 도련님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 1년 동안 나태하고 방탕한 생활에 찌든 육체였다.

단순 뜀박질도 힘들 텐데, 지금은 기사의 속도에 맞춘 산행을 뒤따르고 있었다.

비록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루안으로선 예상 밖의 근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

물론 그 사정을 모르는 기사들은 한심한 눈으로 루안을 흘겨봤다.

‘왜 갑자기 변한 걸까?’

아르잔은 저택의 집사이자 루안의 선생으로서, 이 철없는 도련님을 교정시키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 대부분의 노력은 대부분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약 이 주 전에는 사용인으로선 저질러선 안 될 무례까지 범하고 말았다.

이 주일.

듣기로 루안이 달라진 건 약 일주일 전.

그러니까 기절했다가 일어난 직후였다고 하던데.

‘…설마.’

내 교육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한 걸까?

아르잔은 그리 생각하니 조금 미묘한 심정이 됐다.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교육자로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에 성취감이 살짝 느껴졌던 것.

“후우… 됐다. 다시 갈까?”

그사이 루안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흘린 땀이 마르지도 않았지만, 기력은 어느 정도 회복한 듯하다.

혹은 단순히 허세를 부리고 있거나.

저택의 사용인으로서, 아르잔은 그 가능성을 지나칠 수 없었다.

“도련님, 좀 더 쉬셔도 됩니다.”

“응? 그럴 수는 없지. 이러다 기한에 못 맞추면 어떡해.”

기사들의 뒷담을 들었구나.

“괜찮습니다. 정 안 되면 제가 모시면 되니까요.”

“모시다니?”

“업어 드리겠습니다.”

“…그건 좀.”

루안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일단은 계속 가자고. 이제 점심 전까지는 안 쉬어도 될 것 같으니까.”

“진심입니까?”

이 말은 아르잔이 아닌 오셀의 것이었다.

“그럼. 이제 산길도 차차 익숙해지고 있으니까.”

오셀이 픽 웃었고, 나머지 기사들도 조소 섞인 반응을 보냈다.

이번에는 못 듣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그냥 대놓고 비웃었으니.

그런데도 루안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고, 아르잔은 이 순간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아르잔이 알고 있던 루안은 이런 모욕에 내성이 없었다.

“그럼 다음 목표 지점까지 쉬지 않고 나아갈 테니, 더는 못 움직일 것 같으면 집사님께서 수행해 주시지요.”

“알겠습니다.”

점심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품에서 시계를 꺼낸 아르잔은 약 두 시간 이상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힘들겠군.’

루안이 뜻밖의 근성을 발휘하더라도 한 시간이 한계일 터.

그 이상은 육체가 못 버틴다.

아르잔은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루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지 말이다.

업는 건 싫어하는 것 같으니 부축은 어떨까. 아니면 조금 강압적인 태도로 말한다거나.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마법이라도 익혔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염려는 쓸모없는 것이 됐다.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아르잔이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허약한 도련님을 쭉 지켜보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후욱, 훅…….”

루안은 전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몸에서는 비정상적일 만큼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안색만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조금만 더.’

아르잔은 루안이 한계에 이를 때, 가령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직전 개입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루안이라도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기 전이라면 받아들이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루안이 쓰러지지를 않는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계속 걸었다.

곧 쓰러지지 않을까, 이제 진짜 한계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

손을 내뻗을 준비를 하고 있던 게 무색하게, 루안은 멈추지 않았다.

기사들이 위화감을 느낀 것도 그쯤이었다.

진작 아르잔에게 의탁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혼자 힘으로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시선을 교환한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아르잔이 다시 물었다.

루안은 대꾸할 여력도 없다는 듯 고개만 살짝 끄덕거렸다.

힘들면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덧붙이려던 아르잔은 입을 닫았다.

어쩐지 이 말을 오히려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서다.

어쨌든, 짐짝이었던 루안이 묵묵히 나아가니 막힘도 없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쭉쭉 나아가며 속도를 올렸다.

그 거침없는 진격은 오셀이 말했던 점심 휴식 시간, 즉 두 시간이 경과하기 전에 멈췄다.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본 아르잔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길밖에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절벽지대다.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지극히 좁았고, 아래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다.

아르잔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루안과 눈이 마주쳤다.

루안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채로 턱짓했다.

“뭐 해? 어서 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이 정도 길은 천 번은 뛰어다녔어.”

오랜만의 루안다운 허세였다.

아르잔은 침음을 삼켰으나 달리 수가 없었다.

보석 산맥의 길을 아는 건 기사들뿐이니까.

대신 위치는 조금 바꿨다.

원래 루안은 가장 안전한 후방에서 따라오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뒤에 기사 둘을 세웠다.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후두둑…….

첫발을 내디딘 순간, 돌조각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기사들이 루안을 보며 말했다.

“장난 아니게 높은데?”

“조심하시지요, 도련님. 헛디뎠다간 뼈 한두 군데 부러지는 걸로 안 끝납니다.”

순수하게 걱정하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아르잔은 옛날부터 이런 데엔 눈치가 없었다.

일단 루안의 표정을 보니 비아냥으로 받아들이진 않은 듯하다.

아르잔도 한숨과 함께 다시 걸었다.

그 순간 뒤에서 후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아르잔이 급히 뒤를 돌아본 순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루안이 보였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련님!”

한발 늦었다고.

아르잔이 손을 뻗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떨어지던 루안이 불현듯 번개 같은 속도로 손을 뻗었다.

일순간 그 손길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콱!

그리고 루안의 손은 울퉁불퉁 튀어나온 암벽을 붙잡았다.

떨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암벽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멈추십시오! 무너집니다!”

오셀의 말에 내뻗던 손을 거뒀다.

확실히 암벽에 금이 간 게 보였다. 어설프게 도우려 했다가는 다 같이 낙하한다.

‘하지만…….’

제법 높이가 되지만 떨어지는 순간 루안을 감싼다면 죽지는 않을 거다.

부상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전부 죽게 만들 생각입니까?”

오셀이 낮은 목소리로 재차 경고했다.

“과장이 심하시군요. 제법 높은 곳이지만, 떨어진다고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죠. 하지만 부상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집사님은 모르시겠지만, 이 밑은 위험 지역입니다.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길도 모르고.”

“그럼 이대로 도련님을 죽게 내버려 두자는 겁니까?”

“됐어, 집사.”

루안의 목소리였다.

땀범벅이 된 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루안은 그 꼴로 태연히 말했다.

“혼자 올라갈 테니까 달릴 준비나 해.”

“예?”

직후 루안의 몸뚱이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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