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는 딱히 운이 좋은 놈은 아니다.
용병질을 할 때.
D급 임무라고 알았던 게 알고 보니 B급 정도의 위험도였고, 참가한 10명 중 단 두 명만이 살았다.
물론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한 놈은 다리가 잘렸고 내 얼굴엔 끔찍한 상처가 새겨졌으니.
술집에서 우연찮게 시비가 붙었던 놈은 뒷골목을 주름잡던 암흑가의 간부였고…….
막 산 검을 의기양양하게 휘두른 당일에 칼날이 부러진 적도 있다.
애초에 내가 운이 좋은 놈이었다면 애초부터 가호를 너덧 개는 받았겠지.
그래서 지금 상황이 좀 당황스러웠다.
그렇잖아.
적이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한 극독이 나한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약이라니.
영웅담도 이런 식으로 쓰면 욕을 다발로 처먹겠다.
“하아아…….”
나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어깨에서 용암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이 열기는 내 전신을 불태울 듯 내달리다가, 순식간에 단전까지 닿았다.
겁화와 같은 기세가 움츠러든 건 그 순간이었다.
내 단전에 자리 잡은 화기火氣를 접했기 때문이다.
물론 화기의 전체적인 용량은 형편없다.
나의 최종 목표 단계인 백일白日은커녕 모닥불에도 이르지 못한 수준.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심혈을 기울여 응축한 이 에너지, 천하제일인이 만든 무공으로 쌓은 이 기운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양기陽氣라고.
간단히 말하겠다.
내 단전에 쌓인 화기는, 이론상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꽃의 상위호환이다.
덥석!
두 양기가 자연스레 합쳐졌다.
화기가 열기를 자연스레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게 불꽃의 본질이기도 하다.
물과 물이 부딪치면 파도가 치고,
땅과 땅이 부딪치면 지진이 일어난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면 서로 얽히고설키며…….
금속만큼 섞이기 힘든 건 드물다.
하지만 불꽃과 불꽃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합쳐질 뿐이다.
“하아.”
이번엔 짧게, 다시 숨을 토해낸다.
머리가 뜨겁고, 몸은 더 뜨겁다.
온탕에 몸을 푹 담근 것처럼 기분 좋은 열기가 전신을 뒤덮은 상태다.
나는 일시적인 고양감을 짧게 만끽한 다음, 오셀을 향해 질주했다.
“뭐……!”
이번엔 진심으로 놀랐는지, 오셀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사실 두꺼비 면상이라 그런지 내가 맞게 해석한지는 모르겠다.
나는 오셀에게 완전히 당도하기 전에 일장을 내질렀다.
백일식白日式 제이초식第二招式.
화륜火輪.
내 손바닥 모양의 불꽃이 오셀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화륜은 현재 내가 가진 유일한 장거리 초식이다.
위력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견제기로는 적합해서 자주 쓰는 수법이기도 했다.
의외로 내공 소모가 심해서 방금까지만 해도 쓸 수 없었던 초식이기도 했다.
화륜이 오셀의 안면에 작렬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는 꼴이 제법 요란했지만, 사실 위력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엄호해.”
아르잔에게 짧게 지시한 다음 오셀과의 거리를 좁혔다.
오셀이 거칠게 면상을 흔들며 불꽃을 털어내더니 외쳤다.
“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냐!”
“약과 독은 한 끗 차이라며. 신년 선물 잘 받았다.”
“이, 이… 감히……!”
이때 오셀의 목구멍이 불룩 부풀어 오르더니, 나를 향해 퉤 침을 뱉었다.
뻔한 새끼, 또 독이야?
나는 오셀이 뱉어낸 보라색 체액을 피하며 품속으로 단숨에 파고든 다음,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상체에 연권을 때려 넣었다.
빠바박!
미끌거리는 피부 때문에 손맛이 좋다고는 말 못 하겠다.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마찰력 때문에 공격 자체를 어느 정도 흘릴 수 있는 것 같다.
‘이거 물리력으로는 완전히 골로 보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오셀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비웃음을 지었다.
“고작 주먹질로 나를-.”
오셀의 말이 도중에 끊기며 비명으로 바뀌었다.
큼지막한 눈동자에 비수가 꽂혔기 때문.
나이스 어시스트, 아르잔.
눈깔을 부여잡으며 발광하는 오셀을 본다.
예상보다 귀찮은 적이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갖췄다.
스승님 가라사대,
세상만사 대부분의 문제란 막대한 내공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다.
주먹에 내공을 욱여넣는다.
거의 한계 직전까지 꾹꾹 눌러 담는 느낌으로.
그리고 내공의 응축이 극에 다다랐을 때.
정권을 내지른다.
백일식白日式 제일초식第一招式.
작열灼熱.
작열은 거창한 이름과 달리 단순한 정권 지르기지만-.
평범한 초식이라도 내공을 얼마나 주입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애초에 백일식은 모든 초식이 필살기다.
“꺽…….”
오셀의 고개가 꺾이더니, 징그러운 혓바닥이 밧줄처럼 축 늘어졌다.
반응은 좋았지만, 이번 공격도 제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나는 축 늘어진 혓바닥을 잡아당긴 다음 오셀의 목을 감았다.
“프허……?”
이미 시력을 잃은 오셀이 멍청한 소리를 낸 순간, 나는 혓바닥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오셀이 상황을 파악하고 바둥거렸다.
“집사!”
다행히 아르잔은 눈치가 빨랐다.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아도 혼자서 척척, 오셀이 움직임을 막기 위해 전신에 비수를 꽂았다.
아마도 힘줄을 노린 것 같은데, 그럴듯한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실수한 것 같지는 않고, 괴물이 되면서 육체 구조도 달라진 걸까?
그래도 고통은 느껴지는지 오셀의 입에선 괴성이 터져 나왔다.
생긴 것도 그렇고, 비명도 그렇고…….
이제는 이놈이 더 이상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곱게 좀 뒈져라…….’
오셀은 미친놈처럼 전신을 비틀며 난동을 부렸는데, 나는 원숭이처럼 철썩 달라붙은 채로 손아귀에 힘을 줬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힘들다.
허약한 몸뚱이로 하도 힘을 주다 보니 근육이 푸들푸들 떨릴 지경.
하지만 이게 맞다.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게 오셀을 죽일 방법이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마기가 충만하다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놈의 몸에선 착실히 마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
그렇게 오셀 놈이 지랄발광을 떨며, 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를 부쉈을까.
오셀의 몸뚱이에서 차츰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활동이 정지했다.
“…죽었냐?”
“…….”
시체는 말이 없는 법.
나는 오셀의 무언에 온몸의 힘을 풀었다.
“푸하아…….”
진짜로, 뒤지겠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산맥에 온 걸까.
‘참, 철혈공의 명이었지.’
염병, 머리도 제대로 안 돌아간다.
내가 숨을 몰아쉬며 깜깜한 하늘을 보고 있는데, 아르잔이 다가왔다.
“…죽은 겁니까?”
“그래. 이번엔 확실히.”
그래도 주둥이는 나불거릴 수 있어서 아르잔의 물음에 대꾸해 줬다.
아르잔은 복잡한 눈으로 오셀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침묵하더니.
잠시 후 비슷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러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어깨는 괜찮으십니까?”
“어깨? 아-.”
오셀의 비수에 당한 곳을 말하는 거군.
“괜찮아. 이 정도는 침만 발라도 나을 거야.”
조금 과장이 섞였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뛰어난 회복력 또한 염화제일공의 강점 중 하나니까.
“그래도 감염 위험이 있으니 소독이라도 하시지요.”
“알겠어.”
잠시 침묵.
직후 망설이던 아르잔이 묻는다.
“…도련님.”
“왜.”
“정말 도련님이십니까?”
처음 제압한 기사의 의문과 비슷했으나, 나는 그때처럼 이죽댈 수 없었다.
상대가 달라서 그렇다.
어찌 됐건 아르잔은 나와 1년 가까이 지내 봤던 녀석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저택에서 루안 배드니커의 한심한 꼴을 가장 많이 본 것도 이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대체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맞아.”
납득은 지랄.
내가 루안 배드니커인데 뭐 어쩌라고.
지친 것도 있어서 나는 귀찮은 변명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집사는?”
“예?”
“싸우는 거 다 봤어. 저놈들 말대로 평범한 집사는 아니더구만. 대체 본가에서 뭘 한 거야?”
“그건…….”
아르잔이 망설였다.
“말하기 힘들지?”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됐어.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체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언제까지고 여기 누워 있을 수는 없다.
오셀은 근방에 야행성 몬스터가 드물다고 말했지만, 이만큼 지랄을 떨었으면 자던 놈들도 일어날 거다.
“이렇게 하자. 집사가 나한테 품은 의문이 있고, 내가 집사한테 품은 의문이 있어. 공통점은 서로의 의문이 경계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거지. 맞지?”
“예?”
“서로에게 적의가 없는 상황이잖아. 방금 우린 한 팀이 돼서 같이 싸웠으니까. 그치?”
“그건, 그렇습니다만.”
당혹해하는 아르잔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불현듯 이 녀석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의외로 나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산맥을 벗어날 때까지 사소한 의문이 생겨도 접어 두자고. 이놈들을 없애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을 확보한 상황도 아니니까.”
“…….”
아르잔은 잠깐 망설이더니, 살짝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새다.
“그러겠습니다.”
생각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나는 혀를 빼물고 죽은 오셀에게 다가가 품을 뒤적거렸다.
“뭐 하십니까?”
“이놈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지. 소지품 중에 단서가 있을 거야. 집사는 다른 기사들을 뒤져 봐. 아, 한 놈은 내가 살려 뒀어.”
“음. 알겠습니다.”
아마도 단서를 가장 많이 품고 있는 건 오셀일 거다.
누가 봐도 이놈이 우두머리였으니까.
예상대로 오셀의 품에선 생각보다 쓸 만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열두 개의 금화.
보석 산맥의 대략적인 지도.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새겨진 쪽지. 좁쌀만 한 글씨로 빼곡히도 적혀 있다.
“도련님, 살아 있는 기사는 없습니다.”
“뭐?”
나는 반사적으로 금화를 깊숙한 곳에 챙긴 다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야? 거기 있는 놈한테는 손속에 사정을 뒀는데.”
“아무래도 독약을 삼킨 것 같습니다만…….”
“허어.”
오셀이 지는 걸 보고 자결한 걸까?
아니면 그 전에?
하여튼 삶에 미련이 없는 놈이었다.
아르잔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또한 시체에서 딱히 건질 건 없었습니다.”
“그래? 난 이거 두 개 찾았는데.”
나는 지도와 쪽지를 아르잔에게도 보여 줬다.
아르잔은 지도를 보고, 그다음 쪽지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서서히 그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약간 신기해져서 물었다.
“집사, 설마 이거 읽을 수 있어?”
“아…….”
아르잔의 얼굴에 낭패가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