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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8화 (18/172)

18화

대체 어떻게 추적한 걸까?

나와 아르잔은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였다.

날이 밝더라도 금방 추적하진 못할 거라 확신했고, 그래서 팔자 좋게 아르잔을 재웠고 동굴 내부까지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마치 우리의 위치를 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따라붙었다.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니고.’

상황은 최악이었으나,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암살자들이 아직 우리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것.

‘일단 버티는 게 답인가?’

저 암살자 놈들이 우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길 바랐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일이 잘 풀릴 것 같지 않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느낀 것 중 하나.

불행한 예감은 대개 적중하더라.

근처를 배회하던 암살자 한 놈이 불현듯 고개를 팍 돌려 나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으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링소드를 꺼내서 대응했다.

채앵!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나를 공격한 암살자의 등 뒤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르잔 쪽도 전투에 돌입한 듯하다.

아르잔의 상황은 어쩌면 나보다 더 안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남 걱정이나 할 여유가 없다.

눈앞에 있는 암살자를 공격하려던 순간, 좌우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나는 반쯤 뻗었던 손을 거두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펄럭!

요란하게 로브를 휘날리며 등장한 암살자 두 명이 기이하게 생긴 곡도曲刀를 뽑더니 휘둘렀다.

혀를 차고 말았다.

지금 내 경지로 칼 든 상대와 정면에서 승부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결국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회피뿐이었는데, 살기가 진득이 묻어 있는 검술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협공에 익숙해 보이기도 하고.

이건 진영만 봐도 알 수 있다.

딱 셋만 나를 공격하고 나머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원거리 지원을 하고 있다.

이런 장소에서 셋 이상 들러붙어 봤자 서로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거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이 나온 직후.

나는 지면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내공을 실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적과의 거리가 확 벌려졌다.

물론 세 명의 암살자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려 들었지만, 나는 그 전에 검을 던지며 말했다.

“수고했어.”

암살자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내 말을 착각한 듯하다.

나는 제법 손에 익은 무기를 버리는 것에 작별을 보낸 거였는데.

콰지직!

뒤늦게 칼날에 균열이 가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산산이 조각난 칼날이 불길을 머금은 채 상대에게 쏟아졌다.

미리 주입해 둔 내공, 점차 뜨거워지는 화기가 이윽고 칼날을 부순 것이다.

공격 방향까지 완전히 설정하지는 못했는데, 이 말은 칼날의 파편이 내게도 쏟아졌다는 뜻이다.

나는 둘러메고 있던 케이프를 펼쳐 파편을 막아 냈다.

그리고 케이프를 다시 보니, 끄트머리에 불길이 붙어 있었다.

‘쓸 만하려나?’

나는 확신을 얻지 못한 채 암살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새 피범벅이 된 암살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신 검을 휘두르며 반격했다.

듣기로 교단 놈들 중에서도 특히 하덴아이하르의 하수인들이 독하다던데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푸화악!

나는 기다렸다는 듯 케이프를 휘둘렀다.

끄트머리에 붙은 불길이 거세게 몸집을 불리더니 이윽고 사방을 집어삼키는 화마火魔가 됐다.

물론 요란한 건 겉모습뿐이고, 이 정도 불길로는 옷자락 태우기도 힘들다.

다만 후방에서 지원하던 암살자들의 시선을 가리기에는 충분하다.

근접한 암살자도 마찬가지다.

사방을 둘러싼 불길에 잠시나마 시선이 빼앗긴 것.

그사이 나는 가장 중간에 서 있는 놈에게 일권을 내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암살자가 순간적으로 양팔을 교차하며 막으려 했으나.

우드득.

내지른 일권은 양팔은 물론, 그 너머의 콧대까지 짓뭉갰다.

후드가 들춰지며 드러난 낯짝엔 까뒤집힌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기절은 시켰고.’

쓰러진 놈에게선 신경을 끄고, 양쪽에 있는 암살자에게 주위를 돌렸다.

이것들은 또다시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곡도를 휘둘렀지만, 타오르는 불길에 압박을 느끼는지 첫 일격보단 정밀도가 떨어져 있었다.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각도다.

나는 허리를 꺾으며 칼날을 피한 다음, 오른쪽에 있던 암살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 뼈가 완전히 부서지며 다리가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암살자, 그 때문에 틀어진 칼날이 맞은편에 있던 동료를 향했다.

깜짝 놀란 왼쪽 암살자가 검으로 막았다.

잘못된 판단이다.

살을 지키려고 뼈를 버린 셈이랄까.

턱.

무방비한 암살자의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암살자의 얼굴에 의문이 차오른 순간, 내 손바닥에서 화염이 분출됐다.

꽈앙!

암살자는 바위에 치인 것처럼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목이 꺾인 걸 보니 즉사한 모양.

백일식 제이초식 화륜은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다.

초근접에서 방출한다면 말이다.

화르륵…….

그사이 눈속임용 화염이 완전히 걷혔고, 사태를 파악한 놈들은 암살자 셋을 재차 보냈다.

‘아오.’

나는 즉각적으로 대응하려다 말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내가 있는 자리에 비수와 침이 다발적으로 꽂혔다.

다시 암살자의 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방금처럼 케이프를 휘두르는 수법은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는 뜻인데…….

그런 도중에도 근접한 암살자 놈들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안 좋은데.’

당연히 이 싸움은 처음부터 최악의 구도였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기연이 있긴 했지만, 아직도 나의 내공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애초에 백일식은 초식의 위력이 강대한 만큼 내공 소모가 극심한 무공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템포로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5분? 10분?

‘다른 방법이 필요해.’

나는 교전을 이어 가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황에서 내게 쓸 수 있는 수단이 뭐가 있지?

불현듯 떠오른 건 케이안이었다.

그 늙은 징수인이 내게 보였던 기이한 발걸음, 암보暗步.

그건 대인전에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법이다.

암살자 같은 놈들이 상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겠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그 보법을 한 번밖에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

‘염병…….’

연습 좀 해둘걸.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

나는 콧잔등을 스치는 칼날을 피한 다음 가장 가까이 있는 암살자를 걷어찼고, 거리가 벌어졌단 생각이 든 직후 자세를 잡았다.

흔들흔들.

상체를 기묘한 리듬으로 흔든다.

언뜻 보면 병신 같은 움직임이지만, 잘 싸우던 놈이 불현듯 괴상한 동작을 취하면 경계하는 게 맞다.

이 녀석들은 그럴 확률이 더 높고.

암살자에겐 신중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그렇다.

예상대로 잠깐 추이를 지켜보는 놈들, 그사이 나는 일보를 내디뎠다.

저벅.

발걸음이 가볍고, 어쩐지 느낌도 좋다.

기억 속 케이안의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따라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연이어 전진했다.

순식간에 암살자들과의 거리가 확 좁혀졌지만, 이 녀석들은 거리 감각의 착각으로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할 거다.

그런 놈들을 죽이는 건 시체의 목을 긋는 것만큼이나 쉽다.

피잉!

썩을.

나는 비수를 피해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번엔 전부 피하지 못했다. 왼쪽 어깨에 비수 한 자루가 꽂힌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셀의 비수가 꽂힌 쪽 근처였다.

아르잔 말대로 응급 처치라도 할 걸 그랬나?

다행히 왼팔을 움직이는 데에 무리는 없었지만, 나는 암보의 치명적인 단점 하나를 깨달았다.

‘이거, 정면에 있는 상대한테만 통하잖아.’

일대일은 몰라도 일대다, 그것도 상대가 이렇게 포위하듯 사방을 둘러싼 상황에선 쓸 수가 없는 기술이다.

‘이걸 못 깨닫다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이미 맛이 간 걸지도 모르겠다.

콰직,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배어 나온 비릿한 핏물을 꿀꺽 삼킨 다음 상대를 노려봤다.

암보의 단점은 분명 치명적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금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 역시 암보가 쥐고 있다.

그럼 간단하다.

‘단점이 있다면, 보완하면 될 일.’

지금 바로, 라는 점이 난도를 몇 배는 껑충 뛰게 만들었지만.

목숨이 걸렸으니 까라면 까야지.

콰직!

다시 한번 일보를 내디뎠다.

부드럽게? 아니, 거칠게.

지극히 나다운 걸음걸이로.

물론 변화를 곁들인 건 이뿐만이 아니다.

화륵!

발바닥 밑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케이프 때처럼 눈속임을 위함이었으나, 비효율적이게 사방에 불꽃을 퍼뜨리는 방식은 아니다.

지금 내가 떠올리고 있는 건 뜨거운 햇볕 아래 흔들리는 풍경이다.

즉 아지랑이.

타닷!

그대로 내달린다.

화기를 섞은 내 걸음걸이는 기존의 암보와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됐다.

대지를 부술 듯 짓밟으며, 지나온 길엔 불길로 된 발자국이 남았다.

이 보법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지만, 여전히 은밀한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영보日影步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줬다.

쐐애액.

암살자 놈들의 투사체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정밀하게 조준된 공격일수록 오히려 적중하지 못했다.

결국 사소한 눈속임이라 몇몇 공격은 살결을 긁었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그사이 암살자 놈들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나는 차례대로 턱뼈를 부수고, 갈비뼈를 박살 냈으며, 목뼈를 꺾어 버렸다.

탓.

또다시 보충인가?

혀를 차는데, 다소 뜻밖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잔이다.

“집사?”

“…….”

아르잔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피투성이였는데, 자세히 보니 이 녀석이 흘린 피는 아니었다.

‘대체 몇 명을 죽인 거야?’

끽해 봤자 나랑 비슷한 숫자를 죽였거나 겨우 버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게다가 지금 아르잔의 안색은 어딘가 이상했다.

어쩐지 눈빛도 짐승처럼 번뜩이고 있었고.

“이리로.”

그래도 내가 아는 아르잔이 맞는지,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내 손목을 붙잡고 훌쩍 내달리기 시작했다.

포위한 암살자 놈들이 막아선 순간, 아르잔이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꽈과광!

그러자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전방의 암살자 무리가 쓸려 나갔다.

나는 가공할 위력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슨 고위 마법사가 영창 마법이라도 사용한 듯한 파괴력이었다.

‘이 녀석, 정체가 뭐야?’

기존에 생각했던 아르잔의 정체가 다시 한번 미궁에 빠졌다.

물론 지금은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니라서 잠자코 그 뒤를 따랐지만-.

어쨌든 그렇게, 아르잔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전장을 벗어났다.

* * *

동굴이 커서 다행이었다.

평범한 동굴이었다면 적을 따돌리지 못했을 거다.

말했다시피 이 동굴에서 커다란 통로는 일직선으로 하나뿐이었지만, 사이사이에 공간이 많았다.

나와 아르잔은 그중 한 곳을 은신처로 택했다.

“후욱, 후욱…….”

“집사, 괜찮아?”

아르잔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사람처럼 헐떡대고 있었다.

대답하기도 힘든지 고개만을 살짝 끄덕였다.

나는 틈새 너머로 동태를 살피며, 아르잔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이제 괜찮습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아르잔이 말했다.

나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방금 보았던 압도적인 무위, 폭발적인 기세는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눈동자도 평소대로고.

나는 아르잔이 발휘한 힘의 출처가 궁금했지만.

“…….”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어쩐지 물어 봤자 솔직한 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애초에 서로에 대해 덮어 두자고 한 게 나이기도 하고.

“난관이군. 적의 숫자가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순간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홱 뒤를 돌아봤을 때, 틈새 사이에 서 있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언제 따라붙은 거지?

심지어 이 녀석은 혼자 싸우면 승산이 없단 걸 깨달았는지, 즉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아차……!’

동료를 불러올 생각이다.

뭔가 던질 거라도 있으면 딱일 텐데, 마땅한 게 없다.

내가 이를 악물며, 몸으로라도 뒤쫓으려던 순간이다.

쐐액-!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암살자의 머리를 꿰뚫었다.

암살자는 뛰는 자세 그대로 허물어졌다.

“…….”

나는 입을 닫았다.

아르잔의 솜씨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녀석은 대단히 지쳐 있어서 암살자의 기척조차 깨닫지 못했다.

무엇보다 암살자의 두개골을 뚫은 건 칼, 즉 장검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무기.

게다가 방금의 공격, 속도.

‘엄청난 고수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셀이나 암살자는 물론이고, 케이안을 대면했을 때보다 훨씬 긴장됐다.

“거기.”

그때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 좀 주워 와라.”

어디서 들리는가 싶었는데, 동굴 벽면 근처에서 균열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틈새.

목소리는 그 속에서 들리고 있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물어봤다.

“누구신데.”

“-허.”

균열 너머의 목소리는 바람 새는 듯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궁금하면 들어와 보든가. 교단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너희의 정체엔 좀 흥미가 생기긴 하는군.”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직접 들어오기 전까지는 대화에 응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위험합니다, 도련님.”

아르잔다운 발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나도 동의하는 바다.

당장 손에 폭탄이라도 들려 있었다면 틈새 너머로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

누구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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