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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9화 (19/172)

19화

직접 말하기 뭐하지만, 내 기억력은 나쁜 편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편이다.

한번 본 건 웬만하면 잊지 않고, 이해가 잘 안 가는 개념도 몇 번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내가 확실히 떠올리지 못하는 목소리라면, 일단 나랑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당장 목소리로 유추할 수 있는 건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뿐인데…….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시체에 꽂힌 검을 뽑은 다음 틈새를 향해 걸어갔다.

아르잔이 재차 말했다.

“도련님.”

“알아. 하지만 어찌 됐든 우리 목숨을 구해 줬잖아. 방금 공격,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우릴 죽일 수도 있었어.”

“…그렇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진담이야? 이 틈을 봐. 너무 좁잖아. 나라면 여차할 때 급하게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집사는 시간이 걸릴 거야.”

아르잔의 키는 여성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고, 옷 때문에 티가 나지 않지만 근밀도도 상당하다.

반면 나는 비쩍 마른 해골 꼴을 탈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태.

누가 이 균열을 좀 더 원활히 지날 수 있는지는 자명하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집사보다 내 컨디션이 좋잖아.”

“하지만…….”

아르잔이 어떤 식으로 날 설득할지 가만히 바라봤는데, 이 녀석이 다소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저 목소리, 어딘가 익숙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더욱 내가 가야겠는데.”

“네?”

나는 의아해하는 아르잔을 무시한 채 틈새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뒤에서 침음과 함께 아르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5분 내로 돌아오지 않으시면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래라.”

캄캄한 곳을 헤쳐 가며 생각을 이어 갔다.

당연하지만, 나와 아르잔의 접점은 많지 않다.

한때 같은 저택에 살았는데도 그렇다.

난 아직도 아르잔이 좋아하는 음식조차 뭔지 모른다.

즉 저 녀석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인물은 의외로 한정된다.

사실 이쯤 되면 답은 간단하다.

이 틈새 너머에 있는 건, 배드니커와 연관 있는 인물이다.

* * *

약 1분 정도를 나아가니 틈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틈새 너머로는 제법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일단 제법 밝은 장소였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벽면 자체가 은은히 발광하고 있었다.

야광석일까?

구석진 곳에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는데, 갈라진 틈 사이로 미약한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희귀하긴 해도 천연동굴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내 주목을 크게 이끈 건 다른 것이다.

주거의 흔적.

공간엔 바위를 가공해서 만든 게 분명한 책상, 의자, 거기에 침대까지 있었고…….

“…….”

돌침대 위에 한 사내가 앉아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꼬질꼬질한 모습에 걸레보다 조금 더 나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한쪽이 허전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오른팔이 없었지만.

외팔이라는 사실 이상으로 인상적인 건 남자의 눈빛이었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눈동자는 짐승이랑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뭐야, 이 조막만 한 애송이는.”

맥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금 내 겉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는 예상이 가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작지만 강합니다.”

“얼씨구.”

아무튼 남자는 수염 때문에 나이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처음엔 노인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때마다 풀풀 날리는 게 비듬이 아니라 먼지면 좋겠다.

나는 우선 쥐고 있던 검을 건넸다.

“여기요.”

“거기 아무 데나 놔둬라.”

“옙.”

나는 날 빠진 검을 근처 벽면에 비스듬히 세워 뒀다.

그때까지도 사내는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것 참. 대체 어떤 놈이 보석 산맥에서, 교단과 싸우나 싶었는데. 이런 젖내 나는 애새끼였을 줄이야.”

“어허.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나를 뭣 모르는 애송이 취급하는 건 그만두세요.”

겉모습은 이래도 정신머리는 서른 이상이라 꼬맹이 취급은 불쾌하다.

“그래?”

그리 말하고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핏-.

나는 고개를 비틀어 날아오는 돌조각을 피했다.

“응?”

대놓고 한숨이 나왔다.

“시험을 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은데, 댁 같은 괴인은 왜 항상 이런 기습적인 방식을-.”

썩을.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날아오는 돌조각을 네 번 더 피했다.

“호오.”

그제야 사내의 눈빛이 좀 바뀌었다.

“아예 애송이는 아니렷다? 하긴. 보석 산맥에 들어온 놈일 테니 나름 한가락 하는 놈이겠군.”

“…….”

“꼬마야, 이름이 뭐냐?”

“루안이요.”

일단 성은 숨겼다.

이 사내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드니커와 관련된 인물일 확률은 높지만, 그게 꼭 좋은 인연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지금 직접 보고 있는데도 이 남자가 누군지 감이 안 온다.

하다못해 저 수염이라도 벗기면 뭔가 감이 올 것 같은데.

“그쪽은요?”

그러자 사내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댄이라고 불러라.”

일단 태도를 보니 본명은 아니다.

가명인가?

아니면 약칭일 수도.

뭐의 준말일까.

‘대니, 대니얼, 다이너, 조나단…….’

머리를 굴려도 여전히 짚이는 이름은 없다.

“밖에 일행이 있던데 왜 혼자 왔냐.”

“둘 다 오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나 위험한 사람 아니니까 가서 친구도 데리고 와.”

이 말은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내에게선 사악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소 경박한 말투와 달리, 몸짓에선 왠지 모를 격이 느껴졌고…….

다만 나는 사람을 선악으로 단정 짓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행위인지 알고 있다.

선인이라고 해서 꼭 나에게 득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악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 낯선 인물이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히 알기 위해선 무엇보다 알아야 할 게 있다.

“그쪽은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

사람을 효용적인 측면으로 볼 때 목적만큼 확실한 게 없다.

내 말에 댄은 두 눈을 천천히 깜박이더니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글세…….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걸까. 음.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으니 오히려 할 말이 궁하군.”

“…….”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뭘 하던 새끼였고,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댄은 진리에 관한 물음을 받은 것처럼 돌연 사색에 잠겼다.

‘미친놈인가.’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광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목적이고 뭐고 피하는 게 맞는데.

내가 슬쩍 뒷걸음질을 치니 댄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

“난 여기서 복수를 꿈꾸고 있다.”

“복수요?”

“그래. 제대로 당했지.”

“누구한테요.”

“뱀 새끼.”

“보석수 말이군요.”

“맞아.”

“음.”

아르잔은 말했다.

보석 산맥에서 보석수는 절대적 재앙, 혹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직접 대면해 본 바로는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 내가 본 사파이어 스네이크는 웬만한 기사 한두 부대쯤은 단독으로 전멸시킬 역량을 가졌을 거다.

“혼자서요?”

“어.”

그런 보석수를 홀로 토벌하려는 사내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슬슬 댄의 정체성을 표현하기에 기인이란 말로도 부족해지고 있다.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균열 속에 숨겨져 있는 장소는 주거 공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또 다른 의문.

이 남자는 여기서 얼마나 머물렀을까?

“얼마나 됐습니까?”

“흠.”

댄이 습관적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팔이 잘린 이후로 쭉 저놈을 쫓았다. 산맥의 길을 자세히 알지는 않지만, 체감상 안 가본 곳은 없는 듯하군. 알고 있나? 산맥 중심까지 들어가면 밤낮을 알 수 없게 된다. 수풀이 너무 우거져서 하늘을 몽땅 가리거든. 덕분에 지금 내겐 시간관념이란 게 없어.”

모른다는 말을 참으로 길게 하는 사내였는데, 나는 그보다 다른 말이 걸렸다.

“쫓다니요? 여기가 당신의 거점 아닙니까? 저 뱀의 보금자리기도 하고.”

그러자 댄이 고개를 저었다.

“임시 보금자리지. 저 괴물은 변덕쟁이야. 수시로 주거지를 바꾼다고. 뭐, 이곳에 머문 지는 좀 오래됐지만. 어쨌든 이 드넓은 산맥에서 한번 놓치면 다시 만날 거란 보장은 없어. 내가 저놈과 찰싹 붙어 있는 이유가 되겠다.”

“…….”

나는 살짝 벌어질 뻔한 입을 닫았다.

이 장소에 있는 생활 흔적을 보니, 댄은 여기 머문 시간도 적지 않아 보였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몇 개월은 될 거다.

그럼 이 사내는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보석수를 쫓았단 걸까?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틈새 사이로 아르잔이 등장했다.

“집사?”

벌써 5분이 지났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잠깐 잊었다.

그러나 아르잔은 나 대신 댄을 빤히 보고 있었다.

“당신은…….”

어쩐지 반신반의하고 있는 표정이다.

“너는… 아. 그때 그 적발 꼬맹이인가.”

그와 달리 댄은 아르잔이 누군지 단숨에 눈치챘다.

직후 그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렇다면 애송이, 너는 혹시 델락의 아들이냐?”

나는 순간 ‘델락?’이라고 반문할 뻔했다.

모르는 이름이라서가 아니고, 이 순간, 이 남자의 입에서, 이런 형태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나는 이제 어조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델락 C. 배드니커.

철혈공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른 남자의 앞에선 나도 별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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