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잠깐 나를 보던 댄이 다시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대답해라. 너는 델락의 아들이냐.”
“…….”
어조가 달라지자 분위기도 바뀌었다.
어쩐지 앞선 것과 달리 이번 질문에는 성실히 대답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맞습니다. 루안 배드니커가 제 이름이죠.”
“루안? 루안 배드니커……. 들은 적 없는데.”
댄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건 의외인데.’
내 이름을 들은 적 없다니.
잘난 척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때의 나는 나름대로 가문 내외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무려 가문의 보검을 갖다 판 미친놈이었으니.
‘아니지.’
이 댄이란 남자가 보석 산맥에 머문 지 수년 이상이라면 나를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제 정체는 밝혔습니다. 이제 그쪽이 누구신지 말해 주셔야겠는데요.”
“음…….”
잠깐 고민하던 댄이 말했다.
“그래야겠군. 우선… 댄은 내 본명이 아니야. 가명이다.”
“예.”
순순히 수긍하니 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왜 안 놀라.”
“그야 딱 봐도 가명이었잖아요.”
“그래?”
댄은 충격받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곧 고개를 털었다.
“뭐 아무렴 어때. 내 진짜 이름은 칼자크다.”
“칼자크……!”
옆에 있던 아르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혹시 본가本家의 대사범이십니까?”
그러자 칼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도검선생이다.”
* * *
배드니커가 가진 영향력은 범국가적이다.
단순히 가문이 지닌 물리력 때문만은 아니다.
위대한 가문 중 하나이며.
가문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비옥한 영지.
각지에서 활약 중인 영웅들.
철혈공이라는 이름의 상징성.
그리고 선택받은 이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배드니커의 본가.
속칭 장미 저택.
듣기로 장미 저택의 서고에는 전 제국에서 모은 비급서가 넘치고, 무기고엔 명장이 제작한 온갖 무구와 장신구가, 창고엔 영약과 비약이 저 하늘의 별보다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고 한다.
이 풍부한 자원들이 오직 배드니커의 소속자들에게만 허락된다.
그러니 배드니커의 그늘 아래로 들어오려는 자들은 항상 넘친다.
꼭 혈연이 아니라도 좋다.
기사나 근위병, 시종, 하다못해 정원사라도, 배드니커의 울타리 안에 속하기만 한다면 저 자원들을 일부라도 누릴 수 있다.
때문에 배드니커에서 일하는 자들은 까다로운 선별을 통과해야만 했고, 일개 사용인이라도 가문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대사범이란.
그런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시겠다.
일반적인 자들과 달리 스스로 배드니커의 문을 두드리지 않은 자들.
자식들의 교육과 단련을 위해서, 무려 철혈공이 직접 제국을 떠돌며 초빙한 강자들.
‘도검선생.’
본가에서 쫓겨난 나조차도 그 위명은 잘 알고 있다.
열 명의 대사범 중에서도 검을 다루는 강자.
그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선 인기가 제일 좋았다.
배드니커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무예는 검술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본가에 있을 땐 도검선생의 제자가 되는 걸 꿈꿨다.
직접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자식들이 전부 참가할 수 있는 공통 수업을 몇 번 들은 게 전부였지만.
애초에 도검선성의 성격이 개차반이라 제자가 없다고 들었다.
거기에 약 몇 년 전에…….
‘행방불명됐다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회귀 전, 칼자크는 끝내 보석수를 토벌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목숨을 잃은 시점까지, 이 지긋지긋한 승부를 현재진행형으로 이어 갔거나.
혹은 저 뱀 보석수에게 죽었겠지.
어떤 결말이건 집념만큼은 대단하다.
평범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진작 꽁지를 내뺐을 승부를, 이 남자는 고독하게 몇 년이나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얼굴이로군.”
칼자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두 가지 있습니다.”
“뭔데?”
“팔은 보석수한테 당한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입니까?”
그러자 칼자크가 보다 강렬해진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질문의 의도가 뭐지?”
“교단이 중간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고…….”
나는 에둘러 말하려다가, 딱히 예의를 따지는 상대는 아닌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했다.
“도검선생의 강함이 보석수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서요.”
“으하하!”
칼자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요약하면, 대사범이란 놈이 고작 몬스터 따위한테 당한 게 믿을 수 없나 보군.”
너무 꼬아 듣는데?
딱히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행히 칼자크는 화난 기색 없이 설명을 이어 갔다.
“여러모로 내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전장은 늪지대였고, 저놈은 부하들을 동원했으며, 나는 검을 잃은 상태였지.”
“그렇군요.”
내 반응을 본 칼자크가 픽 웃으며 말했다.
“대사범이나 되는 작자가 패배하고, 변명이나 늘어놓는 꼴이 구차하냐?”
“그럴 리가요.”
이대로 두면 오해가 깊어질 것 같아서 나는 덧붙여서 말했다.
“그만한 악조건이 겹친 상황이었다면 오히려 살아남으신 게 대단한 겁니다. 게다가…….”
“게다가?”
“승부는 아직 도중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오히려 질문했던 칼자크가 미묘한 표정이 돼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어쩐지 머쓱한 태도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다시 나를 보며 말한다.
“질문은 두 가지랬지? 또 하나는 뭐냐?”
나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질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 댄이었죠?”
“응?”
“본명이 칼자크인데 처음에 왜 댄이라고 말했습니까? 어떻게 줄여도 칼자크가 댄이 될 수는 없는데요.”
“…바로 그렇기 때문이지.”
칼자크가 씩 웃었다.
“댄이라고 말하면 내 진짜 이름을 추측할 때도 그 가명이랑 연관 지을 거 아니냐? 준말이라고 생각하거나. 실은 전혀 관계가 없는데 말이지.”
“…….”
“나는 그렇게 헛수고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기분이 좋아진다.”
과연 생긴 것만큼이나 뒤틀린 심사의 소유자였다.
별개로 내 기분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는데, 칼자크의 저 수 얕은 계략에 그대로 농락당했기 때문이다.
아마 넷째 사형이 이 꼴을 봤다면 특유의 냉정한 얼굴로 ‘막내야. 또 속았구나.’라고 말했겠지.
“그런데 너희는 산맥에 뭔 일로 왔냐? 설마 소싯적 가주 흉내를 내러 온 건 아니겠지.”
“다릅니다. 가주님과 연관이 없지는 않지만요.”
“그게 뭔 말이냐.”
나는 이 동굴까지 오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칼자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배드니커에 암살자? 그것도 앙신의 숭배자들이 기어들어 왔다고?”
“믿기 힘드신 걸 압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린 건 모두 사실이에요.”
“허……. 잠시 비운 사이에 배드니커 꼴이 말이 아니구만. 가주는 이 사실을 알고 있냐?”
“글쎄요. 가서 여쭤봐야죠.”
“그렇군. 좋아.”
그리고 품을 뒤적거리더니, 꺼낸 무언가를 우리에게 가볍게 던졌다.
받고 나서 보니 묘하게 생긴 열매였다.
“뭡니까?”
“그걸 부숴서 머리 위에 뿌려라.”
칼자크가 코를 툭툭 쳤다.
“지금 너희, 교단 놈들의 추적향에 노출됐을 테니까.”
“추적향?”
“놈들이 다루는 암기에 기본적으로 묻어 있는 향이지. 기본적으로는 맡을 수 없는 향이다. 추적향과 짝이 되는 또 하나의 향이 있는데, 그걸 맡아야 은은하게 느낄 수 있다더군.”
“아.”
흔적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나는 혀를 차며 즉시 칼자크의 지시대로 했다.
파각-.
“으엑.”
호두처럼 생긴 열매를 부수니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칼자크를 보았다.
“…이 방법밖에 없습니까?”
“응.”
확실히 냄새를 묻어 버리기엔 더할 나위 없을 것 같기는 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열매를 머리 위에 솔솔 뿌렸다.
의외로 아르잔은 덤덤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극도로 굳은 것이었다.
그사이 칼자크는 미묘한 얼굴로 우리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걸 뿌렸으니 암살자 놈들은 곧 철수할 거다.”
“하덴아이하르의 암살자들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이상하게도 이 동굴에 오래 머무는 걸 피하더군. 아마 보석수 때문이겠지.”
너무 이쪽에 유리한 해석이 아닐까 싶다가도,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도에도 이쪽에만 병력이 주둔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마 전부 철수하지는 않을 거다. 몇 놈은 남아서 정찰을 계속할 텐데 그건 내가 처리하면 돼.”
“혹시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교단의 병력을 자주 처리했습니까?”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그랬지. 암살자는 좋은 대련 상대야. 긴장감을 유지시켜 주니까.”
역시나라고 해야 하나.
교단이 경계하고 있는 방해꾼의 정체는 칼자크였다.
확실히 이 정도 실력자라면 암살자를 처리하는 건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아무튼.
예상치 못한 우군이 합류했다.
이 남자와 힘을 합친다면, 교단 놈들의 포위를 뚫는 것도 가능할 거다.
나는 비로소 한시름 놓았는데.
“좋아.”
칼자크가 씨익 웃으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럼 너희는 내 복수를 도와라.”
“예?”
“보석수. 같이 잡자고. 빨리 잡고 나도 배드니커에 복귀하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 * *
아르잔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한 대로인데? 보석수 같이 잡자니까.”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군요.”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희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닐 거다.”
나는 이쯤에서 끼어들었다.
“보석수보다 교단 쪽이 더 위험하다는 뜻입니까?”
“맞아. 이곳엔 교의 제사장이 있으니까.”
“……!”
아르잔이 깜짝 놀랐다.
반응은 그보다 덜했지만, 나도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암흑교단의 제사장이라면 이른바 간부다.
무려 마왕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들.
베일에 싸인 교주와 그 최측근을 제하면, 사실상 교단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위험한 존재인 것.
“…그렇게 강합니까?”
“솔직히 나도 전력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팔을 뺏기기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거든. 나도 한 방 먹여 주기는 했지만, 계산서 때려 보면 명백한 내 손해지.”
나는 칼자크의 허전한 팔소매를 보며 말했다.
“보석수한테 잃은 게 아니었군요.”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다.
나는 칼자크가 보석수에게 팔을 뺏겨서, 그 복수를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팔을 자른 건 교단의 제사장이란다.
그렇다면… 칼자크는 팔 한쪽보다 훨씬 귀중한 것을 보석수에게 뺏긴 것일까.
다른 의문도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냐.”
“그쪽 말씀대로라면 보석수보다 교단이 더 강하다는 뜻인데, 그럼 왜 놈들은 보석수를 토벌하지 않고 있는 겁니까?”
“모른다.”
칼자크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
“나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더군. 다만 교단은 이 동굴의 깊숙한 곳까지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어. 피치 못하게 진입해야 할 때도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
이 동굴에 다른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교단 놈들만이 아는, 어떤 비밀 말이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품에서 지도를 펼쳐 보았다.
칼자크가 흥미를 표했다.
“그건 뭐냐?”
“교단의 암살자한테서 뺏은 지도입니다.”
“지도를 갖고 있을 정도면 제법 거물이었나 보군. 내게도 보여 다오.”
나는 칼자크에게 지도를 건넸다.
나나 아르잔은 깨닫지 못한 것도, 교단과 오랜 세월 싸웠던 칼자크라면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잠깐 지도를 보던 칼자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렇군. 이거였나.”
“뭔가 찾았습니까?”
“그래. 왜 저 새끼들이 동굴에서 활개를 못 치는지 알겠다.”
칼자크가 내게 지도를 보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