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독특하게 생긴 문양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역세모 모양? 그 주변을 기이하게 생긴 문양이 원의 형태로 감싸고 있었는데.
내 미적 감각으로는 그 이상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 문양은 사파이어 스네이크와 상당한 근접한 곳에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들어와 있는 동굴 쪽에.
“…그게 뭡니까?”
“거꾸로 세워진 탑이다. 세상 곳곳에 숨겨져 있는 고대의 건축물이지.”
세모가 아니라 탑이었나 보다.
근데 그게 왜?
“잊힌 신의 제단. 이렇게 말하면 너도 알겠지?”
“아.”
잊힌 신이라는 단어에 납득하고 말았다.
이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린 신이 있다.
제국이 믿는 72신.
온갖 괴물과 짐승들의 수호신인 13용왕.
마지막으로 아홉 정령신과 다섯 왕.
여기에 암흑교단이 믿는 앙신을 더하는 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세상의 신이란 저 99위位를 의미한다.
반면 잊힌 신은 더는 기억하는 자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신격을 잃은 존재들이다.
물론 격만 잃었을 뿐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은 여전히 신위神威게 걸맞다고 한다.
그래서 잊힌 신의 제단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에게 합당한 제물을 바치고, 잊힌 신에게 인정받는다면 그들의 첫 번째 신도가 될 수 있으니까.
잊힌 신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
자신을 망각의 늪에서 꺼내 준 첫 번째 신도의 바람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주는 것.
간단히 말해서, 잊힌 신의 선악을 결정하는 건 첫 번째 신도의 성향에 달렸다.
“…교단에 잊힌 신의 신격이 넘어간다면.”
“마왕의 수가 하나 더 늘 수도 있겠지. 최악의 경우긴 하겠지만.”
이제야 아귀가 맞는다.
이 암살자 놈들이 동굴에서 몸을 사린 이유 말이다.
전투로 번졌다가 잊힌 신에게 밉보이거나, 혹은 제단에 손상이 가는 게 무서운 거다.
그에 비하면 보석수 토벌이란 지극히 사소한 문제.
“그렇다면 교단 놈들한테 보석수 토벌이란 부수적인 거였군요.”
“맞아. 그래서 놈들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거였어. 사파이어 스네이크가 동면에서 깨어나, 이 동굴을 나설 때를 말이야.”
“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칼자크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우린 산맥에 있는 놈들의 병력은 나도 파악하지 못했다. 제사장 하나만 해도 골치 아픈 전력인데, 놈들의 목적을 고려하면 그에 버금가는 강자가 몇이나 더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잊힌 신의 제단을 확보하는 건 제단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이 동굴에 출입구는 두 개뿐이다. 그중 하나를 보석수가 틀어막고 있으니 지금으로선 하나뿐이지. 교단은 너희가 나올 때까지 거기서 대기할 거다.”
칼자크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보석수를 해치워야 해.”
“그쪽의 출입구로 탈출하자는 거군요.”
“그래. 이후엔 산맥을 빠르게 벗어난 뒤, 배드니커에 이 소식을 전한다. 그런 다음 토벌대를 구성해 놈들을 치는 게 최선이야.”
칼자크는 말을 마치고는 나와 아르잔을 보며 말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고, 너희 둘에게 더 좋은 의견이 있다면 듣도록 하마.”
“…….”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렸지만, 사실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고려했을 때 칼자크가 내린 게 최선의 판단이 맞다.
물론 나머지 방법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거지, 저 방법 자체가 엄청난 묘수인 건 아니고.
일반적으로 보석수와의 전투도 목숨이 몇 개나 있어도 부족할 테니.
“둘 다 내 말에 따르는 걸로 안다? 나중에 딴소리 마.”
“고작 셋으로 보석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애초에 나 혼자 잡으려고 했던 놈이다. 두 명이나 더해졌는데 못 잡을 이유가 없지.”
칼자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력 점검은… 뭐. 다음에 할까. 오늘은 일단 쉬도록 해라. 둘 다 얼굴이 똥빛인 게 많이 지친 것 같군.”
“알겠습니다.”
아르잔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연이은 전투로 제법 피곤한 상태였다.
나는 적당한 곳에 담요를 펼친 다음 벌러덩 누웠다.
지면의 딱딱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 * *
나는 전신을 얻어맞은 듯한 뻐근함이 눈을 떴다.
‘으어어…….’
딱딱한 바닥에서 퍼질러 잔 대가였다.
그나마 입은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현재 너에 대해서 아는 건?”
“가주님과 원로회, 그리고 주인마님뿐입니다.”
“그렇군. 잘 알겠다. 힘들었겠어.”
칼자크와 아르잔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는 척했다.
“저놈은 어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쩐지 짚이는 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확실히 눈치가 빨라 보이더군. 배짱도 두둑하고. 신기해. 왜 델락의 입에서 저놈 이름을 듣지 못했을까?”
아무래도 중요한 얘기는 이미 끝난 것 같았는데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르잔과 약속한 게 있다 보니 여기서 의도치 않게 엿들었다면 기분만 찝찝해졌을 거다.
나는 일부러 뒤척여 기척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좋은 아침. 아침인지는 모르겠다만.”
시계를 꺼내서 확인하니 오후 9시였다.
나는 칼자크를 보며 말했다.
“그쪽은 안 주무셨습니까?”
“원래 늙으면 잠이 줄더라. 참. 육포는 잘 먹었다.”
“육포요?”
칼자크가 턱짓하는 곳엔 빈 육포 봉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배낭에 있던 걸 꺼내 먹은 모양이다.
“배에 기름칠 안 한 지 오래돼서 말이야. 짭짤한 게 맛있더라.”
“…뭐,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목숨을 빚진 대가로 육포 한 봉지면 싼 편이지.
“그럼 이제 건설적인 얘기를 해볼까. 어떻게 저 뱀 새끼를 없앨지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쪽은 그놈과 직접 싸워 봤으니 아는 게 많겠군요.”
그러자 칼자크가 눈가를 좁히며, 뭔가 맘에 들지 않는 태도로 날 흘겨봤다.
“왜요.”
“계속 그쪽 그쪽이라고 말하니까 듣기 좋지 않아서.”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사범님이면 돼.”
“제가 제자도 아닌데 그건 좀.”
“그럼 형님.”
“그냥 선배님으로 합시다.”
“왜 선배야?”
“저보다 오래 무도를 걸으셨잖아요.”
“흠… 뭐 편한 대로 불러라.”
칼자크는 탐탁찮은 기색으로 대답하더니,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보석수를 잡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오늘부터 너희 둘을 가르쳐 주마.”
“가르치다니, 너무 팔자 좋은 거 아닙니까? 시간 여유도 없는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누구냐, 배드니커의 명망 높은 대사범이시다. 한두 달이면 기본적인 건 머릿속에 박힐 테지.”
한두 달?
“선배님, 혹시 보석수 사냥 기간은 어느 정도로 잡고 있습니까?
“글쎄. 자세한 건 너희 수준을 봐야 알 것 같기는 한데, 최소 삼 개월은 걸리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순간 찬물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 일이 잘 풀리나 싶었다.
“삼 개월이요?”
“어.”
“너무 긴데요.”
“길어? 그럼 넌 어느 정도 생각했는데.”
나는 보석수를 토벌한 뒤, 본가로의 복귀 일정까지 고려한 다음 입을 열었다.
“넉넉잡아 사흘?”
“뭐? 하하하…….”
칼자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았다.
이럴 땐 무표정을 고수하는 것만으로 내 진심을 전달할 수 있다.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있으니, 칼자크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멎었다.
이윽고 완전한 침묵이 내려앉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느낌을 받았다.
“애송아. 너, 보석수를 너무 쉽게 보고 있는 거 아니냐.”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꼭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느껴졌다.
“델락이 보석수 세 놈의 목을 땄다니까 우스워 보여? 몇 년 동안 저 뱀 새끼 잡겠다고 이 염병을 떠는 나는 병신으로 보이고?”
“그럴 리가요.”
“너… 하아.”
칼자크는 이마를 탁 치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델락 이후로 명성을 바라고 이 산맥을 찾아온 놈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놈들 중 보석수 토벌에 성공한 놈은 단 한 명도 없었지. 살아 돌아간 놈들?”
칼자크가 하나뿐인 검지를 폈다.
“한 1할은 될까? 웃긴 건 그놈들 중 보석수를 실제로 본 건 절반도 안 된다는 거지. 나머지 절반은 보석수 그림자도 못 보고 도망쳤다.”
“…….”
“젊은 혈기도 좋지만 오래 살고 싶다면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
“주제는 잘 압니다.”
아무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칼자크의 말을 끊었다.
“보석수의 역량도, 물론 선배님보단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겠고요.”
“기껏해야 잠자는 보석수를 먼발치에서 본 게 다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지껄이는 거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사정을 말씀드렸잖습니까?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 반드시 본가로 가야 합니다.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주님의 명이라서 그렇습니다.”
“…….”
“선배님은 대사범이 되기 전부터 가주님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테지요.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자식이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칼자크가 입을 닫더니, 눈빛을 바꾸었는데 나는 그 눈동자에서 동정과 연민을 느꼈다.
“델락의 아들이라고 해서 배드니커의 삶만 있는 게 아니다. 델락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도 삶이 끝나거나 하지는 않아. 너는 아직 어리잖아.”
나는 당황해서 눈만 깜박댔다.
그 답답하고 보수적인 본가에, 이런 생각을 지닌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과거의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칼자크를 만났고, 이런 충고를 들었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겠다고.
“잘 압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배드니커의 이름에 얽매이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제게 가문의 이름은 족쇄가 아니라 수단이니까.”
“수단이라고?”
“배드니커의 이름은 쓸 만합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죠.”
칼자크가 나를 노려봤다.
이놈이 허세를 부리는 건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탐색의 눈빛이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허언은 아니군. 좋아. 그렇다면 직접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어.”
설마 싸우자는 건가?
나는 케이안을 생각하며, 지겨운 레퍼토리란 생각을 했으나.
칼자크는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돌로 만든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집더니 이쪽을 향해 보여 줬다.
“이게 뭔 줄 알겠냐?”
꼭 거울처럼 생겼다.
내 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신비로운 푸른 광택이다.
뭔가 눈에 익은데?
“받아라.”
칼자크가 그걸 내게 던졌다.
탁, 손에 드니 그럭저럭 무게감이 느껴졌다.
단단하지만 미끈미끈한 감촉.
순간 나는 이게 뭔지 깨달았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비늘입니까?”
“그래. 제법 옛날에 놈과 싸울 때 몇 개 주워 놨지.”
칼자크가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말했다.
“어떤 방식을 써도 좋다. 그걸 손상시켜 봐라.”